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수지 Oct 26. 2024

전쟁에서 종전까지


"언니야 따라해봐라, 수지야 비피더스 줘" 


나는 언니에게 발음을 고쳐주고 있었다. "수지야 비피더스 좀 갖다 줄래?"가 내가 언니에게 듣고 싶은 말이었다. 하지만 수디야 비키더스, 비비더스, 비비스, 아 비키... 매번 바뀌는 발음에 갑자기 짜증이 몰려왔다. 천천히 말하면 제대로 말할 수 있는데 왜 저렇게 말하는 걸까? 할 수 없다면 바라지 않겠지만 할 수 있는데 노력하지 않는 모습이 나를 화나게 만들었다. 나는 비피더스를 제대로 말하기 전까진 절대 주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 아니 생각해 보니 왜 내가 가져다줘야 하는 거지? 스스로 갖다 먹으라고 말하니 바닥에 앉아있던 언니는 세모눈을 하고서 힘껏 나를 째려보았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나는 언니의 손발이 되어줄 수도 없고 알아듣기 힘든 말을 맞는 것처럼 이해하기도 싫었다.  


둘이서 왜 그러고 있냐고 엄마가 묻자 나는 발음을 제대로 할 수 있는데 노력하지 않는다고 언니를 더 다그쳤다. 엄마는 그러지 말라고 나를 말리시더니 비피더스를 언니에게 갖다 주었는데 그때부터 가족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래서 안 되는 거예요. 다 해주니까 안 되는 거라고!!"


나는 부모님께 언제까지 언니를 아이처럼 대할 생각이냐고 물었다. 쩔둑거리지만 보조기 없이 걸을 수 있고 오른손은 못쓰지만 왼손은 멀쩡한데 게다가 쿠팡에서 물건 주문도 하고 SNS에 자기 사진 업로드할 정도로 알 거 다 아는데 왜 스스로 하지 못하게 하냐고 물었다. 그건 네가 잘 몰라서 그렇다며 엄마와 아버지가 오랜만에 입을 모아 나에게 작정하고 설명하러 들었다. 사실 부모님 이야기를 듣고 이해가 되지 않았던 건 결국 혼자서 하게 되면 무조건 위험하다식의 논리였다. 물론 알아서 하면 좋겠지만 그래도 자신들이 옆에 있을 때 더 도와줘야 하는 게 부모로서의 역할이라고 여겼다. 


대화를 나눌수록 점점 더 이해하기 어려웠다. 10년을 옆에서 간병했으니 이제는 언니가 자립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을 시작해도 되지 않느냐고 다시 물었지만 아버지는 우리끼리 잘 살고 있는데 1년에 한 번씩 와서 아무것도 모르면서 모든 걸 다 네 방식대로 바꾸려는 걸 참을 수 없다고 하셨다. "우리끼리." 그 말이 내 귀에 화살촉처럼 꽂혔다. 내가 있으면 안 될 곳에 온 걸까. 만나면 이렇게 싸우기만 하는데 정말 이제는 한국에 그만 와야 하는 걸까. 남편도 "그냥 장모님, 장인어른 알아서 하시게 내버려 두지 왜 자꾸 수지가 싸움거리를 만드냐"며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모두가 이해되지 않았다. 이 집에 있는 누구도, 아무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왜 언니는 세탁기 못 돌려요?"

"그건 구부리고 조작하다 다칠 수도 있고 또 세제를 한 손으로 들기 무겁잖아."


"왜 언니가 냉장고에서 반찬통 못 꺼내와요?"

"그건 우리 집 반찬통이 대부분 유리라 무겁고 깨지면 다칠 수 있어"


나는 요즘 종이세제도 나온다며 세제를 바꾸면 된다고 말했다. 그리고 버튼 한 번만 누르면 끝나는 일인데, 그 간단한 것조차 왜 부모님이 해주셔야 하냐고 목에 잔 핏줄이 생기도록 힘주어 말했다. "반찬통이 무거우면 가벼운 플라스틱으로 바꾸면 되는 거 아닙니까? 제발 스스로 할 수 있는 걸 하나씩 만들어가는 걸 도와주세요. 그게 지금 부모님이 하셔야 할 일이라고요!" 진지하게 말했지만 내 말이 과연 그들에게 닿았을지 의문이었다.


끝이 나지 않는 다툼 속에서 우리는 서로 너무나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부모님은 언니의 아픔을 품고 자신들이 살아 있는 동안만이라도 고생하지 않게 손발이 되어주고 싶어 했다. 반면 나는, 부모님이 이 세상에 계시지 않을 때 가족이라고는 나 하나뿐인 언니를 부모님처럼 돌봐줄 자신이 없었다. 나도 내 권리를 주장할 수 있지 않을까. 언니는 더 이상 부모님에게 의지할 수만은 없었다. 지금보다 더 열심히 스스로 사는 연습을 시작해야 했다. 도움이 필요한 장애인이 아니라 혼자서도 살아갈 수 있는 평범한 사람으로서 말이다. 이제라도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나와 부모님의 언쟁이 거세질수록 언니는 점점 더 슬픈 얼굴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러다 결국 모든 게 자기 때문이라며 방문을 닫고 들어가 버렸다. 이내 펑펑 우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10년 동안 반복된 이 패턴이 벗어날 수 없는 굴레처럼 느껴져서 사실 그 울음소리마저도 듣기가 힘들었다.


화장실에 가려는데 언니 방에서 누군가와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렸다. 통화를 하고 있었고 아마도 큰이모가 아닐까 싶었다. 언니는 정말 끔찍이도 큰이모를 좋아한다. 현재 언니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고 아픈 언니를 변함없이 대해주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하다. 매일 서로 문자를 주고받고 전화하는 사이가 된 지도 벌써 10년째. 특히 가족에게도 말하지 않는 속마음을 큰이모에게는 스스럼없이 털어놓곤 했다.


나도 큰이모를 좋아한다. 그냥 좋아하는 걸 넘어서 한 인간으로서 존경하고 내가 닮고 싶은 사람이기도 하다.

아주 어릴 때부터 성인이 된 지금까지 이모를 만나거나 헤어질 때 잠시 통화하고 끊을 때도 언제나 나에게 우리 수지 사랑한다는 말을 해주셨다. 부모님에게는 어색한데 이모에게는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도 아마 이모가 나에게 많이 해준 말이라 그런지 모르겠다. 


명절에 친척들 챙기느라 제일 늦게 식사를 하셨고 아무도 안듣는 아버지의 재미없는 말도 끝까지 경청하며 들어주셨다. 늘 사람들 칭찬을 자주 하셨는데 덕분에 외가 식구들의 좋은 점은 큰이모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 이렇게 천사 같던 큰이모도 딱 한번 나에게 욕한 적이 있는데 그건 내가 치매 걸린 이모부 엉덩이 밑에 용돈 봉투를 놔두었을 때다. 한사코 안받겠다고 하셔서 몰래 숨겨두었는데 정말 단단히 화가 나셔서 내게 전화를 하시더니 걸쭉한 욕을 퍼부으셨다. 이제 신혼이고 외국사는 네가 무슨 돈이 있냐는 거다. 사실 욕인데도 기분나쁘기는 커녕 코미디처럼 웃겼는데 큰이모가 드디어 천상계에서 인간계로 내려온 거 같아 오히려 더 친근하고 좋았다. 이모를 만날 때마다 느꼈던 헤아릴 수 없이 깊고 진한 이 감정은 어른이 된 지금까지도 내가 사랑받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기억하게 해주었다.


"수지야, 우리 수연이가 그러더라. 이모야 나는 제대로 걸을 수 있을까? 나도 수지처럼 여행 갈 수 있을까? 이모야 나도 행복할 수 있을까?" 


이모는 이 젊고 예쁜 것이 어쩌다 이런말을 하게 되었을까 안타까움에 같이 우셨다고 했다. 우리 수연이도 수지도 맘이 많이 상하지? 언니도 잘 하고 싶은데 제대로 안되니까 얼마나 답답할까 그리고 수지도 언니가 더 노력했으면 하는데 얼마나 속상할까 이모는 너희 둘이 너무 잘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마음들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다 우리가 가족이라서 이렇게 하는 거 아니겠나. 그리고 우리에게는 오늘 뿐이라며 오늘 더 많이 사랑하자고 말해주셨다. 나에게 정말 고생이 많다며 이모가 많이 사랑하고 보고 싶다고 말해주셨다.


내가 큰이모와 통화하는 걸 다 듣고 있었는지 전화를 끊자마자 언니가 내게 다가왔다. 언니는 내 손을 잡으며 다시 발음 연습을 열심히 하겠다고 했지만 말하는 게 너무 어렵다며 펑펑 눈물을 쏟아냈다. 너무 서럽게 우는 언니를 지켜보고 있던 엄마도 따라 눈물을 흘리셨다. 그런데 나와 아빠는 그저 멍하니 두 사람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여기서 같이 울어야 할 타이밍인가? 두 사람이 타고 있는 감정의 파도에 나와 아버지는 완전히 동떨어져 있었다. 아마도 우리집 눈물 DNA는 분명 외탁인가보다. 


"나는 1등 사람이 안되고 싶어. 그냥 평범한 사람이 되고 싶어" 


언니는 그저 평범해지고 싶다고 했다. 1등이라는 말에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자기는 그런거 필요 없다고 했다. 그저 다른 사람들처럼 빨래를 편하게 돌리고 냉장고에서 반찬통을 꺼내고 요구르트에 빨대를 쉽게 꽂을 수 있는 사람, 중국집에 전화해서 점원이 알아들을 수 있게 짬뽕을 주문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했다. 


가족이란 게 참 신기하다. 서로 같은 편인 것 같다가도 어느 순간 적이 되기도 하고 어려운 일이 생기면 한데 힘을 모으지만 그러다 편해지면 감정이 상하는 일이 꼭 생긴다. 한창 다투던 우리 가족에게 큰이모라는 현인이 없었다면 아마 우리는 여전히 어리석게 서로를 헐뜯으며 전쟁을 치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가족을 하나로 묶어줄 수 있는 참어른 한 명 덕분에 오늘도 우리는 무사히 종전을 치뤘다. 아니 휴전인가? 




이전 09화 나의 착한 스토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