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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채 Oct 10. 2022

향기는 사치, 나는 대체 누가 돌봐줘?

씻는 것도 생존형으로 살았던 5년


보디 로션을 샀다. 로즈우드 향인 1000밀리리터짜리 로션은 오롯이 나의 것, 우리 식구 중 그걸 쓰는 사람은 나뿐이다. 유아용 제품도 아니고, 남편이 쓸 만한 향도 아니다. 그동안은 아이들도 쓸 수 있는, 그야말로 온가족이 함께 쓰는 향 없는 보디 로션을 써왔다. 육아 중에는 이래저래 신경 쓸 부분이 많으니 내가 따로 쓸 보디 로션 같은 건 고민할 여력이 없었다. 또 유아 용품 구입이 확 늘어나다보니 다른 생활비를 조금 아끼는 차원에서 다같이 한 제품을 쓰는 것도 한 방법이었다.


갑자기 나를 위한 보디 로션을 구입한 건, 순전히 지난 주말 서울에 갔다가 친구들의 집에서 잠을 잤기 때문이었다. 하루는 J의 집, 또 하루는 S의 집, 이렇게 아이가 없이 성인 여자들만 사는 집에서 2박을 지내고 왔다. 그런데 두 날 모두 같은 상황이 벌어졌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친구들은 이렇게 말했다. "오늘 하루 피곤했을 텐데 따뜻한 물로 천천히 씻고 나와~"


화장실에는 각자의 취향에 맞춘 샴푸와 트리트먼트, 보디 워시, 보디 로션 들이 놓여 있었다. J의 집 화장실에는 한편에 디퓨저가 있어 은은한 향이 풍겼고, S의 집 화장실에는 기분에 따라 쓸 수 있게끔 향이 다른 보디 워시가 4통이나 놓여 있었다. 코끝으로 스며드는 그 향들을 음미하며 천천히 씻었다. 다 씻고서 보디 로션도 발랐다.




저녁밥을 먹은 뒤에, 천천히 씻고서, 향기로운 보디 로션을 바르는 일이 새롭게 다가온 것은 종전까지의 내게 그 일들이 당연하지 않았기 때문일 테다.


일단 저녁밥을 먹은 뒤에는 아이들과 놀아주고 씻기고 재워야 한다. 그러다 보면 10시쯤은 되거나 아이들과 같이 잠들어 아침을 맞이하곤 한다. 씻을 타이밍을 놓쳐버리면 하루 정도는 샤워를 건너뛰는 날도 많고, 그마저도 아이들이 등원하고 내가 출근하기 전에 10분 만에 부랴부랴 씻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작업이 많이 쌓여 마음이 급한 날은 보디 로션도 바르지 않고 뛰쳐 나가기 일쑤.


아, 지난 5년간 나는 지극히 생존하기 위해 씻어온 것이다! 적절한 사회생활에 방해가 되지 않을 만큼 겨우겨우. 생존형 샤워에는 내 취향의 향도 없고 여유도 없었다.


두 아이를 낳고, 아이들을 돌보는 사람이 된 뒤로, 나를 돌보아야 한다는 사실은 까맣게 잊고 지냈다. 저녁 식사를 하고 천천히 씻고 자기 취향의 보디 로션을 바르는 일만으로도, 지난 하루의 고된 여정이 씻겨 내려간다는 사실을 나는 자주 잊었던 것이다.  




물론 아직 어린 아이들과 24시간을 보내며 완전히 내가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만큼, 원하는 물건들로 나를 돌볼 수는 없을 것이다. 당분간은 생존형 샤워가 이어지겠지. 잠든 아이들 옆에 쓰러져 내 몸을 씻을 기력이 없어 '씻어야 해, 씻어야 해' 되뇌며 잠들고, 아이들과 함께하며 자꾸 타이밍을 놓치다보면, 나는 언제고 아이들에게 TV를 틀어주고 화장실 문을 열어둔 채 후다닥 몸을 씻고 뛰어 나오는 일을 반복할 것이다.


마음을 살피어 돌보는 일 역시 당장은 녹록지 않을 것이다. 내 몸이 수년 동안 잊혔던 만큼 마음 또한 한편에서 방치되어 있었을 테니까. 우선순위에서 밀려난 나의 초상을 몇 번이고 발견하게 되리라.


하지만 이제 내게는 내 몫의 보디 로션이 생겼다. 장미 덩굴이 있는 숲을 걷는 듯한 냄새가 풍기는 로션. 숲 냄새. 이것은 온전히 나의 취향이고 나의 몫이다. 아무도 돌봐주는 이 없던 나의 몸을, 이 로션을 바르는 동안은 잠시라도 쓰다듬게 되겠지. 그러다보면 쫓기듯 뜀박질하던 어떤 하루도 조금은 더 천천히 흘러가겠지.


자꾸만 맡고 싶은 내 몫의 냄새. 오른팔 위에 코를 대고 킁킁킁, 기분이 좋아진다.



서울 성수동에 갔다가 가방도 하나 샀다. 살림 용품 말고, 육아 용품 말고, 온전히 내게 어울리는 나의 물건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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