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에는 이런 글을 쓰기가 좀 민망한 게, 워낙 국내에서도 영어 잘하는 사람도 많고, 어릴 때부터 해외에서 자라거나 유학을 다녀온 사람들도 많아 영어를 잘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몇 년 전, 인터넷에 글을 쓰기로 다짐했던 때를 떠올려보며, 나처럼 이전의 해외경험이 1도 없이 해외취업 혹은 외국인들과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도움과 위로(?)가 되고자 예전에 썼던 글을 새로 업데이트해봄.
Intro
종종 인생의 중요한 깨달음은 좋은 형태로 찾아오지 않아서, 한 번 크게 당해봐야 깨달을 때가 있다. 물론 현명한 사람들은 그러기 전에 미리 준비하지만, 나는 항상 당해봐야 정신을 차린다. 그렇기에 나 자신을 당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 종종 밀어 넣기도 한다.
내 영어가 가장 빨리 단기간에 늘었던 순간은 영어 때문에 'X무시'당한 순간들이 쌓였을 때다. 결과적으로 해외에서 일하는 건 그렇게 내가 당할 수밖에 없는 환경으로 나를 밀어 넣은 셈이었다.
아무튼 이 정도면 그래도 괜찮지 않나 싶은 영어 실력으로 무작정 간 해외. 한국에서 나는 유럽계 회사를 다니며 본사와 꾸준히 이메일로 연락을 하고, 가끔 본사나 해외고객들과 전화를 주고받기도 했다. (물론 그 전화 내용의 대부분은 ‘이거 보냈냐, 언제 도착하냐. 너는 왜 내 이메일에 답장 안 하냐? 등 아주 간단한 내용) 나는 내 영어가 괜찮은 줄 알았는데 전혀 괜찮지 않았고. 그걸 나만 모르고 있었다.
처음 나는 한국인은 한 명도 없는 직장에 들어가게 됐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다. 분명 면접도 다 봤는데... 얘네들 뭐라는 거야? 게다가 싱가포리안 특유의 영어 악센트에 적응하지 못한 나는 환장할 노릇이었다. (언어 실력은 대화의 내용을 어느 정도 숙지하고 있을 때와 없을 때 현격한 차이가 난다. 단적인 예로 한국에서도 입사 초기, 선배들이 하는 말이 한국어인데도 외계어처럼 들렸던 경험, 다들 있을 거다.) 그렇게 나는 못 알아들어서 미안하고, 나를 답답해하는 사람들이 늘어갈 무렵, 작은 해프닝이 쌓여가기 시작했다.
1
"이건 이렇게 하고 저건 저렇게 하면 돼."
"아... 미안, 다시 한번 말해 줄래?"
"(깊은 한숨과 싸늘한 눈빛) 아니, 나 재방송 안 할 거야."
그렇게 내가 못 알아먹은 적이 몇 번 지나고, 매니저는 더 이상 참지 않고 그 말을 던졌다. 냉랭한 한 마디를 날리고 자기 자리로 돌아가던 매니저. 순간 얼어붙은 사무실 분위기. 옆 동료가 다시 차근차근 내게 설명해 주는데, 너무 비참했다. 그 상황이 그저 짜증 나 "뭐 저런 그지 같은... XXX" 같은 한국 욕만 늘었다.
2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난 다른 회사로 옮기게 됐다. 그곳엔 다행히(?) 나 말고 한국인이 한 명 더 있었다. 영국인 이사와 필리핀 매니저로 이루어진 2차 면접도 무사히 마치고 일하던 어느 날.
"네가 어떻게 나랑 같이 일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분명 내가 회사 들어오기 전 나를 면접 본 영국인 이사. 내가 그의 말을 몇 번 못 알아듣자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내가 말할 때 틀린 문법이 있으면, 낮은 목소리와 결코 따뜻하지 않은 표정으로 차갑게 지적하던 그. 면접에서는 예상 질문과 답변을 달달 외웠기에 나의 진짜 영어실력이 드러나지 않았지만, 실전에선 달랐다.
'야, 넌 모국어로 일하고 있잖아. 니 모국어가 운 좋게 세계 공용어인 거라고!!'
정말 부끄러운 말이지만 그가 한창 일하고 있는 내 옆을 지나며 아래의 말을 했는데 못 알아들은 적이 있었다.
“Hey Sara, How is it going?”
그는 내 인생에서 처음 만난 영국 런던* 사람이었고, 초반엔 정말 그의 억양에 적응이 안 되었다. 그전까지 내 영어 선생님들은 미드에 나온 미국 사람들이었는데, 미국 사람들은 여기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의 잉글랜드 억양을 못 알아들었다고 해야겠지. 언젠가 스코틀랜드 사람과 이야기한 적이 있었는데, 스코틀랜드 억양은 또 다른 세상이었다.
3
"이번 일은 사라에게 맡기자."
내가 참석하지 않았던 어떤 미팅. 새로 시작하는 프로젝트에 나를 넣자는 동료들의 말에 필리핀 매니저가 조용히 한 마디 했다.
"사라는 영어 못해서 안 돼."
미팅에 참석했던 동료가 굳이 내게 안 전해줘도 될 내용을 내게 전해주었다.
'도대체 내가 뭘 했다고 나한테 이러는 거야!!!!'
처음 듣는 말도 아닌데 그때 비로소 화가 났다. 그때서야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같은 실력으로 같이 회사에 들어왔는데 왜 내가 이렇게 무시받아야 되나... 입사 3개월째, 처음으로 나의 생존에 불안을 느꼈다. 나도 그들도 모두 원망스러웠다.
4.
지금까지는 회사에서의 이야기이고, 여담으로 기억나는 싱가포리안 썸남과의 에피소드.
어느 날, 그와 저녁을 먹고 맥주를 마시러 갔던 때였다. 나는 별생각 없이 맥주의 라벨에 적힌 작은 글씨를 보고 있었는데, 그가 말했다.
“뭐 읽고 있어? 무슨 말인지 내가 알려줄까?
“나 이거 이해할 수 있는데.”
“아, 알았어.”
해외에서 공부를 한 것도 아니고 한국에서의 전형적인 영어 교육을 받은 사람인 나는 당연히 말하기보다 읽기를 더 잘했다. 영어가 모국어이고, 한국의 영어교육을 모르는 그는 당연히 이를 몰랐을 거다. 그때 다시 한번 느꼈다. 도대체 내 영어 말하기는 얼마나 처참하단 거지.............?
여기까지 놓고 긍정회로를 돌려보자면 그래도 나는 아주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그런 영어실력에도 불구하고 직장도 있고, 나 좋다는 사람도 있으니. 그러나 그때 내가 갖고 있었던 것들은 모래 위에 성을 지은 것 마냥 위태로웠다. 결국 현재의 내가 바뀌지 않으면 그건 다 무너질 뿐이었다.
그렇게 생존의 위협을 느끼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영어 공부를 시작했다. 그리고 몇 가지 철칙을 세웠다.
가지고 있던 외국영화 중 하나를 골라 통째로 외울 것 - 그걸 출퇴근 시 무조건 듣기
웬만하면 한국 사람 만나지 말 것,
외국인이 많은 모임에 나갈 것,
영어 스터디
그렇게 몇 달을 그저 내 공부와 일에 충실했다. 그렇게 하나에 몰입하자 희한하게도 누가 뭐라든 별로 신경 쓰이지도 않았다. '그래, 나 못해. 어쩌라고?
필리핀 매니저가 나는 못할 거라고 했던 프로젝트의 태스크포스팀에 들어가게 됐고, 그 프로젝트는 성공적으로 끝났다. 그렇게 4개월이 지났을까? 회사의 HR 담당자가 나에게 말했다.
"너랑 OOO(다른 한국인 동료)는 영어 참 잘한다."
"내가 잘한다고?"
"응."
내가 못한다는 사실에 너무 익숙해져 있던 나는, 그 말을 그저 '듣기 좋은 말'로 여겼다. 그러던 어느 날 동료 A가 동료 B를 뒷담 화하는 내용이 다른 일을 하고 있던 내 귀에 들어왔다. 마치 라디오를 듣는 것 마냥 편안하게. 정말 신기했다. (아마 뒷담화라서 더 그런 듯. ^^)
어느새부턴가 외국인에게 "다시 한번 더 말해 줄래?"라고 말하는 횟수도 현저히 줄어들었음을 깨달았다. 물론 그 후로도 계속 영어 스터디를 하고, 영어에 계속 나를 노출시키는 활동을 계속했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내 영어가 그래도 전보다 확실히 나아졌구나.'를 느낀 건 그로부터 2년 후, 뜻하지 않게 찾아온 말싸움(?) 덕분이었다. 회사의 모든 거래처와 최소 한 번씩은 싸웠다는 일화로 유명한 그녀에게서 전화가 왔다.
"안녕, 사라, 너희 이걸 그냥 선적시키면 어떡해? 이거 증명서도 없잖아."
"그래서 지난 한 달 동안 이걸 어떻게 할지 우리가 의논한 거였잖아. 너도 그 이메일에 참조되어 있잖아."
"아니 그걸 왜 보내냐고."
"증명서가 있는 거면 우리가 왜 지난 한 달 동안 그 수많은 이메일 보내고 일을 했겠니? 바로 보냈겠지. 너도 영업팀의 OO 하고 이야기했잖아. 이제 와서 무슨 말이야?"
아무튼 이런 대화를 5분 정도 했다. 나는 씩씩 거리며 전화를 끊었는데, 10초 후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대박. 나 지금 영어로 싸운 거야? 그것도 전화로? ^0^'
난 비로소 나를 X무시했던사람들에게감사함마저느끼게 되었다. 그들은 영어 공부하라고 신이 내게 보내준 사람들이었다!
Outro
진작 시작했어야 하는 공부는 몇 번이나 자존심에 상처받고, 타인을 저주한 끝에야 시작됐다. 누군가 나의 부족함을 알려주면 나 자신을 반성해야 하는데, 알량한 자존심만 세우고 있었다. 그래서 예전에 어느 책에서 본 아래의 말은 참 진리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