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PART - one> #신호 ②
천장 끝까지 뻗어올라간 긴 직사각 모양의 창을 등 지고 사정없이 내리꽂히는 한여름의 햇볕에 포박을 당한 것처럼 무력하게 앉아있는 랄라의 모습이 나인의 눈에 들어왔다. 1년 중 가장 덥다는 대서를 막 지나고 있었다. 올해는 유독 장마기간이 짧았던 까닭인지 오전에도 날은 푹푹 찌듯 더웠다. 창의센터 사무실이 위치한 A동은 단지 중앙 가장 넓은 자리를 차지하며 위치해있다. A동은 세로획이 두꺼운, 부감샷으로 보면 좌우가 바뀐 기역자 모양을 한 5층 짜리 콘크리트 건물이다. 엘리베이터, 화장실, 창고 등의 공용부가 건물 중앙에 몰려 있고 건물 외측으로 개별화된 사무공간이 둘러있는 구조였다. 검붉은 벽돌로 치장된 건물 외벽은 일정한 간격을 두고 늘어선 창들이 행과 열에 맞춰 줄지어 이어진 모양을 띄고 있다. 산을 등진 단지의 지리적 위치 때문인지 A동 내부는 낮동안에도 그늘지고 서늘했다. 서측 세로획에 위치한 공간들은 낮 동안 비교적 해가 많이 드는 편에 속했다. 센터 사무실은 오후동안 풍성하게 해를 받는 2층 서측에 운좋게 위치해 있었지만 여름 한낮 동안에는 그야말로 햇볕 감옥과도 같았다. 그날도 어김없이 무기력한 시간이 한동안 이어졌다. 나인은 센터 사무실 중간 통로를 사이에 두고 랄라의 대각선 건너편 자리에 앉아 가로획 건물을 통과한 햇빛의 일부가 창에 굴절돼 아슬아슬하게 랄라의 목을 겨누고 있는 모습을 한동안 지켜보았다.
나인이 랄라의 표정 변화를 감지한 건 그녀가 머리에 힘을 빼고 고개를 한쪽으로 떨구었을 때였다. 목 부위로 내리꽂히던 햇살 한 자락의 주위 그늘진 틈에 랄라의 이목구비가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낮아진 조도 탓인지 랄라의 낯빛은 어두웠다. 랄라의 감은 눈 위로 미간이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펴졌다. 랄라는 이내 느리게 감은 눈을 뜨고 오른손에 있던 수화기를 왼쪽 어깨와 머리 사이에 끼워 넣었다. 랄라가 들고 있던 수화기의 위치를 바꾸는 동안 하얀 칼날 같은 햇볕이 부서지듯 흔들렸고 랄라의 얼굴은 밝아졌다 어두워졌다.
나인은 직감적으로 랄라가 골치 아픈 민원인을 응대중이라는 걸 알아챘다. 준 공기관의 성격을 띄는 업무의 특성상 불편사항이나 정책 의견 개진과 같은 민원이 끊이지 않았지만 두어 달 전쯤 그 일이 있은 후부터는 막무가내로 욕설을 쏟아 붓는 악성 민원이 하루에도 몇번씩 들어오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이라면 사건이 점차 잊혀진다는 것이었다. 하루걸러 한 번 많게는 하루 대여섯 통씩 걸려오던 민원전화는 그 횟수와 빈도가 확연히 줄어 현재는 잊을 만 하면 한 번씩 걸려오는 중이었지만 열흘이 넘도록 없던 이 고약한 민원 응대 업무가 하필 이날 랄라에게 할당된 것이었다.
과거 개발도상국식의 하드웨어 개발이 아닌 모든 다른 방식의 개발을 몸소 증명할 목적으로 들어선 이곳은, 주변 지대 상승의 효과가 큰 방식으로 단지가 개발되기 소망했던 일부 지역 주민과 상인들 입장에서 그야말로 눈엣가시와도 같은 곳이었다. 의도적인 외면과 기피로 일관하며 정치적 때를 기다리는 이 숙련된 민원인들은 빌미가 생기면 시와 시의회, 센터 등으로 전화를 걸어 민원을 넣었다. 대개는 대규모 행사 진행시 발생하는 소음 관련 민원이었고, 범상치 않은 이상한 인물들이 이 단지를 드나들고 있다거나 동네 분위기 망치는 해괴한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는 고발성 민원도 왕왕 들려왔다. 이런 민원들은 담당자에게 접수된 뒤 민원접수 엑셀시트에 민원의 긴급성 여부와 주요내용, 기타 특이사항들이 빼곡히 기입되어 평시에는 2주에 한 번꼴로 S시 총괄부서에 보고되는 절차에 따라 처리되었다. 그러나 약 두 달 전쯤 그 일이 있고부터는 양태가 달라서 첫 민원전화가 발생한 그 다음날로 경영지원실로부터 민원응대와 관련 응대매뉴얼이 하달되었는데, 그 내용은 최대한 경청할 것, “죄송합니다”와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내부시스템을 점검하고 있다”는 말 외 다른 말은 삼가할 것, 최대한 공손한 자세로 응대하고 감정적 태도와 언사는 자제할 것 등과 같은 것이었다. 언뜻 평이한 내용인듯 보이지만 차분히 뜯어보면 그 요지는 책임회피성 메시지를 꾸준히 발신하라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나인은 근래 들어 이 처치곤란의 민원을 받은 적이 없었음에도 랄라의 통화 장면을 목격하면서는 자신이 민원인을 상대하고 있는 것 마냥 속이 일렁이는 걸 느꼈다. 이 민원인들은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며 한탄을 늘어놓다가 어디 이상한 애들이 들어와서 동네 분위기를 다 망치고 있다고 막무가내로 꾸지람을 늘어놓았다. 그들은 무례하고 경망스럽기 짝이 없는 언사만으로도 상대가 녹다운될 걸 예상이라도 한듯이 책임 있는 답신을 듣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홀가분하게 통화를 끊는 것처럼 보였다. 반대로 일면식도 없는 상대의 이 근본 없는 화 덩어리가 점진적으로 수그러들 때까지 하달된 매뉴얼대로 앞으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주의하겠다는 말과 죄송합니다를 번갈아 되풀이 할뿐인 나인은 실상 타인의 안위 따위 안중에도 없는 이 익명의 민원인들의 비사회적 이기에 대하여 수화기를 들고 있는 내내 생각했다. 진을 쏙 빼놓는 민원인 응대 후 나인은 “이기적 유전자의 자기복제로 만들어진 기계적 존재”(1)들이 사회적 관계 안에서의 상호작용을 통해 공공의 이익을 위해 개인의 불편과 희생을 감수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전제로 발생하는 창의센터의 모든 사업에 회의감이 들었다. 그런 그녀가 이 회의를 이기는 방법 중 하나로 택한 전술이 바로 몇몇 비사회적 인격체들의 폭력적 언사로 민원인들을 모종의 집단이 아닌 개별화하며 속으로 흠씬 욕지기를 하고 문제를 축소해 해석해내는 것이었다.
나인은 지금 랄라의 통화 장면을 목격하면서도 비슷한 전술을 취해보려 노력 중이었다. 그와 더불어 나인은 민원을 받아내던 자신의 표정은 어떠했을지 짐작해봤다. 랄라의 민원전화를 함께 받고 있는 것처럼 천천히 그때의 상황을 재현해보면서였다. 나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을까. 지금의 랄라처럼 나도 모르는 미세한 얼굴근육의 변화가 있었을까. 그리고 그것을 지금의 나처럼 랄라가 알아채주었을까. 사건발생 두 달이 경과하고 있음에도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찌푸려지고 있었다. 나인은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무표정으로 돌아온 랄라의 얼굴을 본 뒤 묘한 안도감을 느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녀는 여전히 괴로움에 시달리고 있고 더불어 그녀도 알고 있을 것이었다. 그녀의 가장 가까운 동료 역시 아무렇지 않지 않다는 걸. 그 날 이후로 내내 이상하다는 걸. 곧잘 웃다가도 얼굴을 일그러트리고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이 되었다는 걸. 염세에 빠져 허우적대다가 세상 끝장이라도 낼 사람처럼 화를 내며 비탄에 빠졌다가 현실부정을 거듭하며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굴다가 결국 죄책감에 시달리고 만다는 걸.
나인은 그녀의 어두운 얼굴과 수화기를 집어든 손 사이 그 어딘가를 한참동안 응시했다.
(1) 리처드 도킨슨 <이기적 유전자> 중에서
커버사진: Unsplash의Ye Jinghan
소설 <PART>는 one, two, three 등 총 3부로 구성될 예정이며 위 글은 그 중 1부(one)에 속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