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PART-two> #무력⑥
다음날 나인은 평소보다 1시간 30분이나 일찍 눈을 떴다. 토요일 아침이었음에도 나인은 습관적으로 늦잠을 잔 것인가 걱정하며 화들짝 놀라 눈을 떠 벽시계를 봤다. 아직 이른 아침이었다. 나인은 집으로 돌아와 종일 잠을 잤다. 랄라와 헤어진 뒤로 쭉이었다. 침실이 온통 하얗게 밝았다. 형광등을 켜두었나 싶어 새삼 천장을 다시 살펴볼 정도였다. 나인은 창 밖의 가로등에 의지해 잠을 청하다가도 무서움이 사라지지 않을 때면 머리 맡에 헤드라이트를 켜두고 잘 때가 있었다. 이 빌라가 마음에 들었던 이유는 침실의 역시 이 긴 창 때문이긴 했다. 매트리스에 누워 손을 뻗으면 창틀이 닿도록 천장에서부터 길게 4개의 창이 침실 벽면에 가득했다. 그 덕에 다닥다닥 붙어 지어진 빌라촌에서도 꽤 채광이 좋았다. 창이 있는 쪽으로 길게 매트리스를 붙여둔 까닭도 수면을 위해서였다. 나인은 벽과 창에 붙어 누워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와 빛에 의지해 잠을 청했다.
오랜만에 숙면을 취한 듯 몸이 개운했다. 어제의 일이 오래된 일처럼 까마득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아득했다. 나인은 침대에 바로 누워 선명하게 자국이 남은 꿈을 되집어 생각했다. 민지에 대한 것이었는데 정작 그 꿈을 되살려 생각할수록 나인은 정녕 꿈을 꾼 것인지 자신의 상상인 것인지 헷갈려졌다.
창의테크밸리의 어느 쪽문에 서서 멀어지는 민지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본 사람은 나인이었다. 나인은 자신을 한참 바라볼 것을 알면서도 뒤 한번 돌아보지 않고 멀어지고야 마는 민지를 한참 서서 바라보았다. 자기네집 근처 대형 쇼핑몰에서 간단히 요기를 하고 서점에 들려 오랜만에 쇼핑을 하자는 민지의 제안을 아니 간곡한 요청을 세번이나 거절한 뒤였다. 민지는 곧 어머니생신이라고 하지 않았느냐며 선물도 고르고 저녁은 자기가 사겠다는 말로 나인을 꼬셨다. 마지막에는 거의 조르다시피 했다. 나인은 지난 주말에도 민지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주중에도 많은 시간을 민지에게 할애하고 있었다. 지난 주말에는 변호사 면담을 함께 하고 해당 내용을 공동행동 멤버들에게 공유하며 향후 계획을 함께 논의했다. 모두 기꺼이 민지의 집근처 카페에 모여주었다. 페이스북앱을 핸드폰에서 삭제한 후 민지는 조금 안정을 찾은 것 같았지만 그래도 매번 마지막은 주변 말에 일일이 반응하지 말자는 다짐을 하며 헤어졌다. 온 몸의 세포가 아파오도록 출근이 끔찍한 건 나인도 마찬가지였다. 나인은 카톡과 사내 메신저로 불쑥 시비하듯 말을 걸어오는 인간들에게 일일이 반응하지 않았다. 그래도 자신의 카톡창에 대화방이 쭉 도열된 것 만으로도 진이 다 빠졌다. 대응전략을 고민하기 위해 함부로 카톡내용을 지우지도 못했다. 한 주가 막 시작되고 있었지만 나인은 벌써 다 소진된 느낌이었다. 아니 앞으로 갈 길이 더 까마득히 멀었다. 숨이 턱턱 막혔다. 나인은 민지의 요청을 한번은 이번 엄마 선물은 현금으로 할 예정이라고 둘러대고 또 한번은 공모 선정팀 워크샵 설명자료 준비를 핑계대며 그러나 결국 오늘은 좀 쉬고 싶다는 진심을 전하며 거절했다. 그러고도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던 나인은 쪽문에서 지하철역 방향으로 걸어가는 민지를 불안한 마음으로 지켜본 것이었다. 그렇게 나인에게 마지막 민지의 모습은 계속 뒷모습이었다.
그녀가 멀어지던 때가 훤한 대낮이었음에도 나인은 민지의 마지막 모습을 회상할 때면 꼭 시커먼 밤이 되어있었다. 기억은 어느덧 상상이 덧붙여져 제멋대로 바뀌어있다. 민지는 나인과 헤어지고 이곳에 다시 출현한다. 그리고 그녀는 그때야 이 곳의 출입이 오늘로 마지막이라는 것을 안다. 그녀는 자신의 집 베란다, 이전의 세입자가 운동하려고 설치해둔 철봉에 TV 케이블선을 묶어 자신의 목을 매달기 전에 집을 빠져나와 마지막으로 이곳에 다시 나타난다. 마지막을 정리하기 위해 온 것이지만 2년 가까이 머문 이곳을 떠나던 그녀는 이상하게도 계속 빈 손이다. 나인의 상상 속 민지는 허둥지둥 야반도주 하듯 떠나지 않는다. 그보다 그녀는 나인의 머릿속에서만은 꽤 도발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민지는 센터장실 센터장 C의 책상 의자에 앉아있다. 정확한 시간은 알 수 없다. 그러나 공간은 꽤 긴 시간 비어진 채다. 그러므로 어림잡아 자정쯤 되었을까 나인은 짐작했다. 센터장실엔 시계가 없다. 그런데도 민지는 왼쪽 손목의 애플워치로 시간을 확인해볼 생각은 굳이 하지 않았다. 5월의 밤이었다. 왠지 그걸로 된 것 같았다. 센터장실의 공기는 텁텁했다. 민지는 책상 의자에 앉아 공기가 보이는 듯 천장을 바라보며 후후 하고 소리를 내 심호흡을 한다. 그러다 갑자기 호흡을 멈추고 꼭 해야 할 일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책상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창가 쪽으로 걸어가 낡은 샷시를 찌거덕 열어본다. 바람은 불어 들어오지 않았지만 사무실 공기가 달라진다는 걸 그녀는 느낀다. 문득 떠오른 듯 옷걸이 쪽으로 걸어가 옷걸이에 삐딱하게 걸린 가디건의 주머니를 헤집듯 뒤진다. 별 소득이 없다. 다음에는 책상 서랍을 거칠게 열어본다. 책상 서랍장 세 칸을 모두 열어봐도 소득이 없었다. 민지는 책상의 왼편 벽에 붙은 철제서랍장까지 열어보기 시작한다. 첫번째 서랍을 열고 민지는 행동을 멈춘다. 그는 민지와 둘이 저녁식사를 할 때면 간간히 담배를 피웠다. 가끔 생각날 때 한대씩 핀다고 했다. 처음에는 담배를 피워도 되냐고 묻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그마저도 묻지 않았다. 센터장C는 사람들에게 폐가 되지 않으려 늘 조심했고 그래서 대게의 사람들에게 점잖은 인상을 주었지만 일부는 그가 자신의 어떤 행동이 사람들에게 폐가 되는 것인지 구분해내지 못하는 사람이란 걸 알았다. 민지는 골초인 편에 속했다. 별다른 거부감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녀는 센터장 C가 가끔 생각날 때 한번씩 담배를 피우고 있다는 알고 있었다. 아니 그도 사실 골초였을지도 몰랐다.
그녀는 메모지들 사이에 끼워진 담뱃케이스를 집어든다. 담배케이스는 안쓴 메모지들처럼 단정하다. 담배케이스 안은 두 개비만 비고 거의 꽉 차있다. 민지는 그 중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고 이번엔 라이터를 찾는다. 라이터는 금새 찾았다. 라이터는 담배케이스가 있던 자리 바닥에 깔려있다. 오랜만에 당겨보는 라이터는 어째 조금 뻑뻑한 것 같다. 몇 번의 쇠소리 끝에 불이 당겨진다. 바람이 불지 않음에도 버릇처럼 한 손으로 바람을 막고 담배에 불을 붙인다. 어둠 속에 담뱃불이 빨갛게 올라오고 담배연기가 위로 피어오른다. 민지는 츄리닝 바지 주머니에 담배케이스를 소중히 넣어둔다. 그리곤 그제야 라이터를 이리저리 살펴본다. 아무런 글자도 새겨지지 않은 슈퍼에서 파는 값싼 라이터였다. 민지는 라이터도 담배를 넣은 주머니에 차례로 넣어둔다. 민지는 창가 옆 간이테이블 의자에 앉아 곧게 선 담배연기를 바라본다. 한 모금 들이켜 뱉고는 흩어지는 담배연기를 무심히 쳐다본다. 머리엔 아무런 생각이 없다. 그저 담배를 피워대는 것에 온 정신을 집중해보는 것이다. 민지는 다시 일어나 센터장실 문 쪽으로 걸어가 이번엔 문을 연다. 역시 센터장실 밖 사무실엔 아무도 없다. 어둠 속에 누군가 켜둔 모니터 화면의 빛이 번지듯 보인다. 어지럽게 정리 안 된 누군가의 책상이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드러났다. 책상 하나 하나 둘러보다 민지는 자신의 책상에 시선을 멈춘다. 담배 한 모금 머금고 다시 훅 하고 내뱉어본다. 담배연기가 눈 앞에 자욱했다 사라진다. 다시 앞으로 걸어본다. 정면만 무심히 응시하고 있다. 얼마 못가 발 밑에 툭 하고 뭔가 걸린다. 민지는 발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행사를 치르고 남은 다과들이 뒤죽박죽 섞여 있는 박스가 어둠 속에 보였다. 애써 손 댈 생각 없이 박스를 돌아선다. 다시 담배 한 모금을 마시고 훅 하고 내뱉는다. 담배연기가 다시 흩어진다. 나란히 놓여진 복합기를 지나다 찰카닥 하는 소리가 텅 빈 사무실에 울렸다. 고개를 돌린다. 인기척을 느낀 메인도어의 잠금장치가 열리는 소리였다. 사무실 밖으로 나갈 생각이 없던 민지였지만 꼭 그러려고 했던 사람처럼 문을 열고 나간다. 기다랗고 검은 통로 바닥에 노란 형광띠를 따라 걷는다. 두 손은 주머니에 꽂은 채 담배 한 모금 훅 마시고 찍 하고 뱉는다. 눈앞이 흐릿해진다. 어쩐지 경계심이 사라진다. 통로를 지나오니 넓은 홀이 나왔다. 민지는 감각적으로 쓰레기통을 찾는다. 쓰레기통은 곳곳에 있지 않았다. 민지는 코워킹스페이스존 수납장 안쪽에 숨겨져 있는 쓰레기통을 알고 있다. 수납장을 열고 쓰레기통을 꺼내 덮여진 비닐 한 구석에 담배를 눌러 끈다. 동그랗게 검은색 구멍이 그림자처럼 생겼다. 민지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그냥 그렇게 통 속에 담배꽁초를 버리고 자신의 츄리닝 주머니 속에서 담배케이스를 꺼내 새로운 개피 하나를 꺼내 다시 문다. 그리곤 쓰레기통을 정리할 생각 없이 그대로 다시 넓은 홀을 향해 걸어간다. 어둠 속에서 가지런히 놓인 의자들이 펼쳐져있는 게 보인다. 민지는 잠깐 이만한 논밭이 있으면 어땠을까 생각한다.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민지는 한 쪽에 세워진 빈 책장으로 시선을 옮긴다. 빈 책장의 깊은 어둠을 들여다보며 다시 담배 한모금을 들이마신 후 후 하고 뱉는다. 이 책장을 채우기 위해 애썼던 시간이 우습게 떠오른다. 모두의 서재라는 이름이 붙은 이 책장은 누구든 시민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을 큐레이션해 비치하고 누구나 빌려갈 수 있도록 되어있는 열린책장이었다. 매번 섬세한 기획이 필요한 이 책장은 꽉 차있던 적이 없었다. 센터 개소식때 잠시 반정도 차있었을 뿐이었다. 당시 초대 센터장이 자신의 인맥으로 채운 것들이었다. 그 반쯤 채워진 책장을 배경으로 귀빈들이 사진을 찍었다. 그 사진에 민지는 없다. 민지는 책장을 등지고 홀쪽을 바라본다. 담배를 다시 한모금 들이마신 후 후 하고 내뱉는다. 민지는 이 홀의 상징과도 같은 책장 앞에서 이제 퇴근해보겠습니다 라는 생각을 하다가 민지는 말로도 해보기로 한다.
“이제 퇴근해보겠습니다”
“이제 퇴근해보겠습니다~~~~”
자신만 들리도록 조용히 한 번, 두번째는 낼 수 있는 한 큰 소리를 냈다. 홀 저쪽에서 대형스피커의 스위치를 막 켠 것처럼 쩡하고 울렸다. 그리고 민지는 뚜벅뚜벅 홀을 가로질러 공유주방 옆 쓰레기통에 아까처럼 대충 담배를 눌러버렸다. 그리곤 지체 없이 그대로 걸어 비상신호 조명등에 의지해 계단을 내려왔다. A동 현관로비에 이르러 거침없이 앞 정문을 향해 걸어간다. 평소에는 잘 이용하지 않는 문이다. 오늘은 왠지 그러고 싶었다. 뚜벅뚜벅 한걸음씩 내딛는다. A동 로비에 있는 카페테리아에서 냉장고 소리가 윙하고 돌아갔다. 냉장고의 불빛이 카페 유리문 안 정리되지 않은 가판대와 입간판을 또렷하게 드러낸다. 칠판형 입간판에는 제철과일로 만든 수제쥬스라는 문구와 함께 딸기가 주스로 변하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어쩐 일인지 민지는 입간판에 그려진 딸기쥬스가 먹음직스럽지 않아 보였다.
유리문을 밀어 연다. 아까와 다르게 시원한 바람이 훅하고 몸에 끼쳐왔다. 잠시 서서 바람을 느낀다. 그리고 현관 앞 계단을 천천히 내려온다. 수위실이 있는 정문은 오른쪽이다. 정면에는 민주노조 파괴하는 어용노조 결성 결사 반대 라고 쓰여진 현수막이 크게 붙어있다. 현수막이 살짝 펄럭이는 것을 보던 민지는 왼쪽 쪽문 쪽으로 방향을 틀어 걷는다. 검은 공기 속 나무는 짙은 회색이 되었다. 저 멀리 가로등이 하나 무의미하게 바닥을 비추고 있다. 가끔 이곳은 도시에 있는 것 같지 않다. 특히 지금과 같은 어둑한 밤에는 완전히 뚝 떨어진 세계 같다. 누구도 구원하지 못할. 저 멀리 바닥을 비춘 가로등을 보며 민지는 걷는다. 그리고 조금 빨리 걷는다. 그러다 오른쪽 수풀 속에서 바스락 거리는 소리에 민지는 고개를 훽하고 돌린다. 움직이는 물체가 자신 말고 또 있을 수 있다는 사실에 잠깐 뒷 머리근육이 위로 솟는다. 짙은 어둠 저 나무 숲 어딘가 꿈틀하는 검회색의 물체가 시야에 들어왔다. 걸어야 한다는 뇌의 반응과 다르게 다리는 움직이지 않는다. 그 때 검은 공기 중에 두 개의 초록색 눈동자가 민지를 응시하고 있는 것이 한 눈에 보였다. 들개다. 버려진 I동 뒤 방치된 동산에서 내려온 들개. 네 놈들 이었구나. 들개 한 마리가 축 늘어진 무언가를 물고 우뚝 서서 도대체 어디서 나타난 생물체냐는 듯 민지를 응시하고 있다. 지금은 들개의 시간. 자신들만의 시간을 빼앗긴 그들이 언제든 공격해올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민지는 그대로 서있지 못했을 거였다. 미지에 대한 공포심은 그것이 들개라는 것을 아는 순간 이상하게 사라져있다. 민지는 움직이지 않았다. 공격할 마음이 없다는 의지를 담아 다만 민지는 온 몸으로 서있다. 그 순간 움직인 쪽은 들개였다. 입에 문 걸 뚝 내려놓고는 뒷걸음으로 이쪽을 응시한 채 유유히 어둠 속으로 초록색 두 눈동자가 사라졌다. 민지는 그제야 다시 정면을 보았다. 그리고 다시 뚜벅뚜벅 걷는다. 이 곳을 걸어 나간다. 그리고 마지막 숨통의 길목 위에 선다.
커버사진: Unsplash의Manuel Venturini
소설 <PART>는 one, two, three 등 총 3부로 구성될 예정이며 위 글은 그 중 2부(two)에 속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