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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은지 Feb 18. 2016

14. 구조

숙련자 서퍼의 배려

1.

잠을 자기나 한 걸까?

잠깐 눈을 감았다 뜬 것 같은데

알람 소리가 울렸다.


서핑대회가 열리고 있지 않을까?

새벽에  서핑할 수 있지 않을까?


주섬주섬 옷을 입고

일단 해변 쪽으로 가봤다.


(이미지 사진) 아침 6시반 즈음의 하조대 해수욕장/ 양양 하조대 2015년 10월/ 출처: 김은지


바다 결이고 뭐고

강원도 동해바다의 차가운 바람이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차가운 바람에

콧구멍이 뻥 뚫렸다.


아직 열지 않은 해변,

차가운 바람.

핑계 김에 아침 서핑은 포기했다.



2.

동해바다의 차가운 바람을 맞고 들어오니

허술해 보이기만 했던 캐러반이

든든한 성처럼 느껴졌다.


찬 바람 맞고 잠이 다 깨,

아침부터 고상을 떨며 차를 마시게 되었다.

일요일 아침마다 늦잠이었는데,

200여 km 떨어진 양양에 와서

티타임을 즐기고 있는 나를 보자니

자꾸만 피식 웃음이 났다.


↑소형 캐러반 내부 모습/ 하조대 서피비치 2015년 9월/ 출처: 김은지


간밤에 걸어둔 웻수트는

아직도 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젖은 웻수트를 다시 입어야 하다니...

서핑할 때 즈음엔 날이 다시 따뜻해지길 바랐다.



3.

아침 시간이 남으니

근처 낙산사 구경이라도 해야겠다 싶었다.


일단 맥모닝으로 아침식사를 하려

속초 시내까지 갔다가

낙산사로 향했다.


여름이 지난 양양과 속초는 한적했다.


뻥뻥 뚫린 도로를 마음껏 왕복하다가

기분이 이상해 지도를 확인해봤다.

아침을 먹겠다고 간 속초가

너무 멀었었다.

하조대-낙산 거리 내에서 아침을 먹었어야 했는데

속초는 낙산을 벗어나 더 가야 하는 거리였었다.


고상하고 우아하게

하루를 시작하려 했는데

시작부터 헛발질이었다.


바닷바람 맞고 잠이 깬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다.



4.

가족과  여름휴가를 오면 늘 들리던

낙산사.

휴가철이 지나

북적이던 모습이 없는

한적한 사찰의 모습이었다.


한적한 낙산사가 낯설었는지,

너무나 오랜만에 들린 거였는지,

그도 아니면 혼자 간 게 처음이어서인지.

간만에 방문한 낙산사가 새롭게 느껴졌다.


↑낙산사 의상대(좌), 홍련암 가는 길(중), 홍련암(우)/ 양양 낙산사 2015년 9월/ 출처: 김은지



5.

유람을 마치고 하조대로 돌아오니

서핑대회가 진행 중이었다.

각 부문 결승전들이 치러지고 있었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거친 바다와 좋지 못한 파도였다.

이날은 특히,

기후가 쉽게 바뀌었다.

내가 선수였다면

집에 간다고 했을 것이다.


악조건 속에서도

대회를 치르는 서퍼들의 모습은

여전히 멋있어 보였다.


↑(좌우 사진 비교)한 시간도 되지 않아 바뀐 날씨/ 하조대 서피비치 2015년 9월/ 출처: 김은지



6.

오늘은 테이크오프에 성공하리라 다짐했다.


라인업까지 열심히 패들하지만

나의 발목을 잡는 조류.

이날도 조류 덕에

라인업까지 패들하는 것에

꽤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써야 했다.


몇 달이 지난 지금도 이때를 생각하면

눈물 날 것 같다.



7.

나를 포함한 서퍼들은

라인업에 비교적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라인업에서도 좋은 자리가 있는 법.

하지만 비기너인 나한테

그 자리에 설 날이 오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라인업을 개척하자!


'어제도 연습, 오늘도 연습했으니

새 라인업에서 테이크오프 할 수 있지 않을까?'


"실력은 계단식으로 오른다."

란 말이 실현되길 기대하며

서퍼들이 모여있는 라인업을 떠났다.


내가 멀리 온 걸까,

다른 서퍼들이 라이딩해 간 걸까?

바다 위는 점점 한적해져 갔다.


얼마 지나

내 근처에 계시던 다른 여자 서퍼 곁으로

남자 서퍼분이 오셨다.


'커플 부럽다.' 생각하고 있는데 별안간

"여기(여자 서퍼) 리시 잡으세요, 같이 패들 하셔야 돼요!"

라고 나에게 말씀하시는 남자 서퍼분.


????


내가 왜 그래야 하는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왠지 그게 당연한 거였다.

순간, 순전히 본능적으로 서퍼분의 말씀을 들었다.

당시 난 생존본능의 노예였다.


숙련자로 추정되는 남자 서퍼분의 말대로 했다.

남자 서퍼- 여자 서퍼-나의 순서로  연결됐다.

서핑보드 위에 엎드려

다른 여자 서퍼분은 남자 서퍼의,

나는 여자 서퍼의 리시를  한 손으로 각자 잡고

다른 손으론 열심히 패들 해

바다를 빠져나왔다.


나는 어느 지점까지 패들 해 나오자

정신이 들고

"고맙습니다."*란 말을 연거푸 하게 되었다.

남자 서퍼분은

"너무 멀리 가지 마세요."란 말씀만 남기고 떠나셨다.


내가 조류에 떠밀려 내려가다 못해

구해줘야 하는 구역까지 갔고,

그 여자 서퍼 분과

자력으로 돌아오기 힘들고

파도도 없는 곳에 있었던 것이었다.


*나의 경우 얼떨결에 '고맙다.'는 말씀을 드려 다행이었다. 숙련자들이 조류에 떠내려간 비기너를 구해줘도 '고맙다.'는 말을 듣지 못하는 경우도 왕왕 있다고 한다.  도움받은 비기너 분들도 당황해서 그런 것이었겠지만, 비기너라면 이런 상황에 일단 '고맙다.'고 말하자. 뭔지 몰라도 일단  도움받았다는 건 확실니까!



8.

이런 건 본 적도 배운 적도 없는 상황이었다.

황당하고 이해가 안 가는 상황.


나는 늘 서핑보드와 리시로 연결돼있어서

서핑이 안전할 거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누군가가 나를  구조한 것이었다는 것에 놀라게 되었다.

내가 그렇게 위험한 상황에 처했었다고

전혀 자각하지 못했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지금 생각해도 등골이 오싹한 경험이었다.

하루는 세탁기 당하고

하루는 표류할  뻔했다.

그것만 생각한다면 다시는 서핑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직까지도 서핑을 사랑한다.

비기너의 어려움을 지나치지 않는

숙련자 서퍼의 도움으로

서핑에 대한 공포가 생길 틈이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관망대 위에서 서핑 대회를 촬영중인 사진사(?)/ 하조대 서피비치 2015년 9월/ 출처: 김은지




다음 글, 2016년 3월 2일(수) 발행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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