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격과 공포의 장보기
(미리 말하지만, 이 이야기는 8-90년대 시골의 이야기가 아니다. 2010년대에 초등학교를 다녔던, 지극히 평범한..! 이십 대의 이야기다.)
나는 지방의 아주 작은 도시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아, 아주 작은 도시라는 말보다는 아주 큰 시골이라고 하는 편이 맞겠다. 할아버지, 아빠, 고모들이 다녔던 초등학교를 나도 다녔고, 내가 졸업할 때의 전교생은 서른두 명이었다. 1학년부터 6학년까지 내 번호는 한 번도 변하지 않고 7번이었다. 마을에서 나는 누구누구의 손녀딸, 누구누구의 딸, 까만 벽돌 이층 집에 사는 애로 불렸다. 서로의 사정을 모르는 이웃이 없었다.
부모님 두 분 다 직장에 다니셨지만 농사는 또 다른 큰 일이었다. 밭에는 내 나이랑 같은 감나무, 매실나무, 대추나무가 우뚝 우뚝 솟아 있었다. 주말이면 새벽부터 일어나 모종을 심고, 풀을 뽑고 약을 치며 각종 농작물을 살폈다. 집안의 막내인 나도 그 일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이 바뀔 때마다 토마토, 오이, 배추, 옥수수, 마늘 등을 빼곡하게 심고 땅을 돌보고 열매를 거둬들였다. 마당 한구석에서 여유롭게 쌀겨를 먹고 자라는 닭들은 아침이면 따끈따끈한 달걀을 선물해줬다.
식사시간이 가까워지면 엄마와 함께 소쿠리와 호미를 들고 밭에 나갔다. 봄에는 달래를 캐고 부추를 베어 부침개를 해 먹고, 여름엔 오이, 호박잎을 따서 오이냉국과 쌈밥을 푸짐하게 먹었다. 가을에는 실하게 자란 늙은 호박을 따다 호박죽을 쑤어 먹고, 겨울에는 밭에서 키운 배추를 손수 절여 김장김치를 담갔다. 우리가 마트에 가는 일은 우리집 밭이나 마당에 없는 것, 예를 들어 돼지고기나 소고기, 공산품 따위를 사야 할 때 말고는 없었다.
그렇게 자급자족이 이루어지는 시골에서 18년을 살던 내가 경기도에서 자취를 시작했을 때, 많은 것이 충격적이었다. 우선 너무 비싼 채소와 과일값 때문이었다. 대문 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있었던 농산물들이 손을 벌벌 떨게 하는 가격을 붙이고 누워있었다.
호미질 몇 번에 소쿠리 한가득 채워지던 취나물과 달래가 귀한 음식이었다니...
오이를 마트에서 사 먹어야 한다니...
토마토랑 가지 사는데 이렇게 큰돈을....?
바구니에 채소를 담을 때마다 앞으로의 생활에 대한 걱정을 덤으로 얻는 기분이었다. 친구에게 이 이야기를 하니 친구는 미간을 한껏 찌푸리며 나에게 되물었다.
"오이를 마트에서 안사면 어떻게 먹어..?"
"..."
친구에게 차마 '밭'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경기도민으로 살기에 내 태생은 너무 날것 그 자체였다.
그렇게 나의 예측 불가한 도시생활이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