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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Love and. 0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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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종현 Dec 30. 2017

로맨틱과 나이브의 중간

로맨틱과 나이브의 중간

예전에 사랑했던 이가 말했다.

"사랑하기에 우린 모든 어려운 과정을 이겨낼 거야."

우리는 모든 행복한 순간을 같이 했다. 그리고 그 아이는 아주 사소한 일로 나를 떠났다. 그 사소한 일은 그 아이가 말했던 어려운 과정을 뛰어넘는 일이었나 보다. 역시 인간이란 행복한 순간에는 역경의 순간을 논하기 어려운 존재였던가?

사랑하기에 모든 어려운 과정을 이겨낼 거란 말은 참, 어린 나이의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이다. "아주 로맨틱"함과 동시에 "아주 나이브"하다. 세상 풍파 어느 정도 겪어보고 그런 말을 쉽게 내뱉을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정말 위인이거나 철이 덜 들었거나 바람둥이 거나 허풍쟁이일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 말이 아직도 좋다. "사랑하기에 우린 어떤 어려운 일도 헤쳐나갈 거야." 그런 말을 들려줄 사람을 만나고 싶다. 비록 나는 그 말을 전혀 신뢰하지 않지만 말이다. 



미얀마에 왜 왔어요?

얼마 전 크리스마스 파티를 다녀왔다. 아직 크리스마스가 되려면 조금 남았지만, 여기 미얀마에서 살고 있는 많은 외국인들은 벌써부터 크리스마스 기념 파티를 시작하고 있다. 나도 벌써 두 군데나 다녀왔다. 파티에서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은 이렇다.

"미얀마에는 왜 온 거예요?"

왜 난 미얀마에 왔을까? 사실 석사과정 중 한 학기를 외국에서 인턴을 하는 것이 정규편성 과정이기도 하지만 인턴 할 나라를 선택하는 건 100% 나의 결정이었다. 미얀마, 잘 알지도 못하는 나라, 단순히 사진 속에서 보이던 이미지들로 기억되던 나라를 나는 불쑥 찾아왔다.

난 그런 질문을 받으면 진지하게 나의 인턴 생활로 보내고 있는 컨설팅 업무와 석사 논문의 지루한 데이터 수집 과정을 말하기가 싫어서 그냥 가벼이 말한다.

"제 인생의 반쪽을 찾으러 왔어요."

한국 사람이라면 당연히 이게 농담이라는 걸 알 텐데, 쓸데없이 진지한 서양 애들은 이걸 진짜로 믿는다. 그리고 묻는다.

"어떤 타입을 좋아하세요? 선호하는 인종이라던가? 현지인도 괜찮으세요?"

나는 인종은 상관이 없다고 말했다. 그 대신 말한다.

"돈만 좀 많으면 돼요."

그리고 그들은 또 믿는다.



우리는 왜 뜨겁지 못할까?

나는 인생을 조금 서툴게 사는 사람이다. 누군가는 인생은 누구에게나 처음이기에 서툴기 마련이라고 했지만. 무작정 부딪히기엔 조금 늙은 나이가 이젠 되어버린 것 같다. 이젠 예전처럼 부딪쳐서 받은 상처가 쉽사리 낫질 않는다.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 상처를 회복하는 시간이 더디다.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만나 스페인 중년의 남자가 이런 말을 했다.

"상처 받기 싫어서 전 지금 만나는 사람에게 최선을 다해 다가가질 못하는 거 같아요."

그는 3년 간 교제를 하던 이가 바람을 피우는 장면을 자신의 집 방문을 열면서 확인했다고 했다.

"바람을 핀 현장을 목격하고도 여자 친구는 지금 보이는 게 사실과는 전혀 다르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침대 옆에는 여기저기 흔적이 남겨져 있었어요. 널브러진 콘돔 포장지며..."

그리고 그 사건은 그를 한동안 괴롭혔다. 트라우마가 되어버린 그 일로 그는 아직도 사람을 잘 믿지 못한다고 했다.

사랑에는 보험이 없기에 우리 모두 조심한다.


 알고 지내는 어떤 동생이 말했다.

"그 사람과의 끝이 보여서 도저히 진심을 다해 사랑하지 못하겠어. 또 나만 상처 받고 말 것 같아."

나는 말했다.

"그래도 끝까지 사랑해 봐. 그래도 끝까지 최선을 다해서 사랑해 봐. 그 사랑의 끝은 지질하고 더럽고 추잡하고 혹은 처절하게 아플지라도, 지금은 너의 연인을 최고로 사랑해 봐. 그게 나중에 아프더라도 너만 바보 같아 보일지라도 덜 후회하는 일이라는 걸 너도 잘 알잖아."


말은 이렇게 하지만, 나도 사실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나도 트라우마가 남긴 지난 사랑으로 현재의 사랑에, 현재의 인생이 조심스럽다. 그리고 그건 우리가 누군가를 만나거나 무슨 일을 할 때, 열정을 조금씩 갉아먹는 결과로 작용한다. 그럼에도, 그럼에도 우리는 최선을 다해 뜨거워야 한다. 비록 현실 속의 우리의 관계는 바람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 흘러, 그 끝이 찌질하고 아프더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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