텃밭 단톡에 상추를 도둑맞았다는 글이 올라왔다. 사진을 보니 옹기종기 모여 있는 상추들 사이 빈자리가 눈에 띄었다. 그러고 보니 며칠 전에 엄마네 텃밭도 열무를 도둑맞았다고 했던 것이 기억난다.
훔친 상추쌈, 훔친 열무김치, 훔친 상추겉절이, 훔친 열무국수. 훔친 작물로 도둑은 봄을 만끽하겠지. 기왕 훔친 거 맛있게 만들었으면 좋겠다. 맛있게 먹다가 혀나 씹었으면 좋겠다. 도둑맞은 이들이 느끼는 봄의 맛이 꼭 그럴 테니 말이다.
널브러진 대파를 본다. 중학교 2학년 시절 담임 선생님은 복도에서 마주칠 때마다 어깨를 펴고 고개를 들고 다니라고 하셨다. 아무리 의식을 해도 쉽지 않았다. 조금만 긴장이 풀리면 움츠러들고 숙이고 있었다. 움츠러들고 숙이고 있어야 덜 맞는다는 것을 선생님이 알 리가 없었겠지. 꼿꼿해지기란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대파를 몇 번 일으켜 세우다 포기했다. 널브러진 채라도 상관없으니 죽지만 말아줬으면 좋겠다.
상추도 사람을 가린다. 내가 뜯었을 때보다 엄마가 뜯었을 때 회복이 더 빠르다. 내가 항암치료를 받던 시기가 떠오른다. 보호자들은 식물 같았다. 매일 희망을 틔우고 희망을 맺고 희망을 뿌렸다. 옆 식물이 뽑혀나가도 멈추지 않은 채 계속 말이다. 잠깐 대화를 나눈 사람이라면 모두 엄마를 좋아했다. 그 누구도 죽을 것이라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상추도 그런 기운을 엄마에게 느꼈을지 모르겠다.
당근싹이 많이 컸다. 흙 밑에 뿌리도 모양새를 제대로 갖추고 있으려나. 텃밭 농사에서 구황작물과 뿌리채소는 보물상자를 열어보는 기분이라던데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봄 당근 수확 시기를 찾아보니 적어도 두 달은 더 기다려야 한단다. 내가 마음이 급해서 잘 견딜 수 있을지 모르겠다.
쑥갓이 상추를 품고 있다. 쑥갓을 옮겨줘야 할까. 상추를 옮겨줘야 할까. 아니면 그냥 두는 것이 옳을까. 그냥 두는 것이 좋을 리가 있을까. 뿌리가 뒤엉켜봤자 좋을 것이 없을 것이다. 쑥갓이 조금 더 잘 자랐으니 쑥갓을 옮겨 심어야겠다.
분명 심을 때 나름 골고루 간격을 두고 심었었다. 그런데 왜 코딱지 만한 것들이 옹기종기 모여 자라고 있는 것일까. 서로 몸을 맞대고 자라고 있는 것이 대견하면서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뭉쳐서 자란 것은 그렇다 치더라고 분명 이랑에 골고루 심었는데 다른 아이들은 왜 하나도 싹을 틔우지 못한 걸까. 사실 식물도 외로움을 타는 것은 아닐까. 뭉쳐야 서로 힘을 받고 그런 것이 아닐까. 솎아주지 않은 다른 텃밭의 치커리, 상추, 쑥갓이 내 텃밭의 똥풀(치커리, 상추, 쑥갓) 보다 잘 자라는 것을 보면 설득력 있는 주장 같기도 하다.
감자 줄기는 나무가 다 되었다. 잔 줄기가 새로 뻗을까 걱정이 되었는데 괜한 걱정이었던 것 같다. 땅 속에는 몇 개의 감자가 숨겨져 있으려나. 감자를 수확하기 전에 다음 작물을 슬슬 고르고 심을 준비도 해야 하는데 마땅히 생각나는 것이 없다. 좀 쉽고 맛있는 것이 없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