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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eaterrace Nov 16. 2019

안녕, 나의 첫사랑.

넌 나에게 매일 첫사랑 #11




금빛 기와가 햇빛을 받아 눈이 부시다. 물 위에 반사된 모습으로 겨우 그 자태를 확인하게 하는 금각사. 그 앞에 우리가 서있다. 벅찬 기분에 눈물이 올라오는 것을 겨우 참아본다. 드디어 오다니. 조금 빨리 올 걸.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가는데 생각의 회로를 끊는 목소리가 귀에 스친다.


"지현아, 왜 이렇게 슬퍼 보여?"


함께 온 동료가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내며 묻는다.


"여기에 꼭 와보고 싶었거든. 여기에 온 걸로... 나는... 이번 여행의 목적 달성이야."


표정을 보니 더 묻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있는 게 분명하다. 그렇지만 이내 고개를 돌려 못 본채 한다. 첫사랑의 마무리는 나 혼자의 몫이니까. 게다가 남은 여행도 잘해야 하니까.


해질 무렵의 청수사(기요미즈테라)를 보고 숙소에 돌아와서 이현에게 편지를 썼다. 교토의 인이 찍힌 편지를 보내고 싶었다. '함께'라는 말만 빼면 나는 약속을 지키러 이 땅에 왔노라고 알려주고 싶었다.


오빠.

잘 지내지? 오빠에게 이런 안부를 묻게 되는 날이 올 줄 몰랐네. 우리의 긴 공백이 끝이 나면 오빠는 줄곧 나에게 그렇게 묻고 했는데 말야.

나는 오늘 금각사에 왔어. 오빠와 함께 오자고 약속했었는데, 결국 그 약속은 지키지 못했지만 혼자라도 와보기를 잘한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나는 용기가 없는 사람이야. 오빠가 나에게 주었던 사랑과 넉넉함으로 지금의 내가 있다는 것을 잊지 않고 살게. 나중에 우리가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면 웃으며 서로를 떠올릴 수 있으면 좋겠어.

고마워. 오빠.
내 첫사랑이 되어줘서.

20XX. 5. 5
교토에서 지현.


5월의 교토는 매우 더웠다. 우리가 만나 사랑을 했던 그 여름만큼.




여자의 나이에 그 지위와 가치가 부여되는 나라에 살고 있다.


스물여섯이 되던 해, 이현은 나에게 새로운 크리스마스 케이크의 삶을 살게 된 것을 축하해 주었다.


"여자의 나이는 크리스마스 케이크라지만, 이제 지현이는 스물여섯이니까 다시 돌아올 크리스마스를 위해 새로이 만들어지는 케이크가 된 거야. 점점 더 가치가 빛날 지현이의 새 케이크 삶을 응원하며. 메리 크리스마스!"


그리고 나는 지금 계란 한 판의 나이가 넘었다. 계약직이 아닌 정식교사에게 들어오는 만남의 제안은 여러 통로를 통해서였다. 학교 선생님들의 소개팅도 있었고, 여대 졸업앨범을 통한 일명 뚜쟁이들의 맹목적인 연락도 있었다. 그중에서도 결혼정보회사에서 매겨지는 나의 점수는 30이라는 앞자리로 우선 평가절하가 되었다. 나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었다. 점점 더 가치가 빛날 새 케이크의 삶은 현실에서는 없었다.



종로에서 동아리 친구를 만났다. 그러니까, 그녀는 석이를 아는 그런 친구였다.


1년 정도 호주에서 워킹 홀리데이를 지내고 돌아온 터였다. 그곳에서 그녀는 4살 연하의 일본인 남자 친구가 있었고 그들은 열렬히 사랑을 했다고 했다. 그리고 그녀가 호주를 떠나면서 헤어졌다고 했다. 이유를 묻는 나에게 국적이 다른 연하의 남자를 계속 만나는 것이 현실적으로 쉽지 않음을 서로 인정했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연애는 계속할 수 있지만, 결혼은 어렵다,라는 판단에서였다고. 그녀 역시 과거의 나처럼 남자 친구가 있었던 채로 호주로 떠났다가 새로운 사랑을 하게 되었는데, 결국은 그 새 사랑도 현실의 벽을 함께 넘을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얼마나 아프게 헤어졌을지 누구보다 잘 안다. 먹먹한 마음을 위로하지 못해 그만 화제를 다른 것으로 돌렸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너한테 할 말이 있어. 그때는 사실 미안해서 이야기하지 못했지만."


그렇게 서두를 떼는 그녀의 말을 듣고 잠시 가슴이 뛰었다.


"석이가 군에 있는 동안, 나한테 연락을 몇 번 했어. 내 사진을 가지고 선후임들에게 여자 친구라고 했다면서. 한 번 보러 와주면 안 되겠냐고. 너한테 배신을 하는 것 같아서 그 후로는 다시는 연락도 받지 않았는데, 어쨌든 괜히 나까지 너를 배신하는 기분이 들어서 이야기하지 못했어."


석이의 행동에 배신감 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았으나, 절친한 친구의 고백에 나는 작은 모멸감을 느꼈다. 혹시라도 '너의 구 남친이 사실은 나를 좋아했었나 봐'라고 생각하고 있을까 봐, 친구에게 등신 같은 사람으로 평가될까 봐서였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상관은 없었다. 석이는 나에 대한 배신감으로 내 절친에게 접근하는 방식으로 복수를 택했던 것을 나는 짐작으로 안다. 제대 후 내 전화가 아닌 우리 집 전화를 통해 엄마와 나의 안부를 물었던 이야기를 몇 번을 들었으니까. 제대해서도 한동안은 나를 잊지 못했던 녀석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그럼에도 그는 나에게 아무것도 아니었으니까. 잔인하게도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다만, 가끔 꿈에서 그를 우연히라도 만날 때면 나는 그와 마주치지 않기 위해 도망을 간다. 주로 신촌 전철역에서인데, 건너편에서 나를 발견한 석이가 나를 향해 걸어오고 나는 그를 피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걸어보지만 생각대로 쉽게 움직여지지 않았다. 결국 그와의 재회는 악몽과 동일하다는 증거였다.


그 무렵, 홍의 결혼 소식을 들었다. 음악을 전공한 괜찮은 집안의 여자와 결혼해 문정동에 신혼집을 차렸노라고 후배가 말했다. 그 자리가 선배 자리였어야 한다고 나를 대신해 안타까워했다. 그렇지만, 나는 홍을 다시 만나지 않았던 것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그래야 이현에 대한 내 마음을 나 자신에게 증명할 수 있다고 믿었었고, 시간이 지난 지금에 그 선택이 맞았다는 것을 알기에.




남편과의 저녁 데이트에서 차가 밀려 들른 재즈바에서 세바스찬과 마주친 미아. 상상 속 그들은 여전히 사랑하고 여전히 행복하게 함께 한다. 하지만, 현실 속 그들은 각자의 삶을 살고 있었고, 그것을 서로가 응원하는 것으로 <라라랜드>는 끝이 난다. 이미 남의 여자가 된 미아를 바라보는 세바스찬, 그리고 미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는 미아.


세바스찬의 얼굴이 순간, 이현의 얼굴로 바뀐다. 나는 울고야 만다. 미안해서. 내 남편과 함께 있는,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다리를 건너온 나 자신을 설명할 길이 없어서.


꿈속에서 이현과의 만남은 항상 이런 식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나를 따뜻하게 대해주었고, 기린 속눈썹을 늘리며 부드럽게 웃어주었다. 그러면 입 옆으로 패이는 그의 보조개 웃음. 그럴수록 나는 더 나 자신을 찢고 싶었다.


누가 괴로웠을까를 묻는다면 나는 단연코 미아이다. 결혼이라는 제도에서 나는 이미 누군가에 소속된 사람이므로. 둘의 관계를 다시 회복시킬 수 없는 곳으로 떠난 사람은 나이므로.


나는 안다. 그는 아직 나를 기억하다고 있다는 것을.


나는 용기가 없는 사람이다. 눈발이 휘몰아치던 그날 밤의 나처럼. 사랑했지만, 다시 사랑할 수가 없는 비겁한 사람. 금각사에서 쓴 편지는 결국 부치지 못했다.


그날 그 편지를 우체통에 넣었다면, 과연 우리는 지금 다시 사랑하고 있을까.







이전 10화 안녕이라는 인사조차 못 할까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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