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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eaterrace Nov 12. 2019

그대의 눈물 안고 봄에 서 있을게

넌 나에게 매일 첫사랑 #9




싸이월드를 통해 홍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서로의 미래를 축복하며 헤어졌던 이유에 걸맞게 그는 CPA(공인회계사 시험)를 통과했고, 3대 회계법인 중 하나에 소속된 회계사였다.


도대체 몇 년 만인가. 취업을 준비하던 대학생들이 이제 어엿한 사회인이 되어 다시 만난다니, 감회가 새로웠다. 말쑥하게 차려입은 정장에 밝은 미소가 빛이 나는 사람이었다. 그 말속에 자신감이 넘쳐났다. 그도 그럴 것이 만나던 당시 도서 제작사를 경영하던 그의 아버지는 이미 100억대 자산가가 되어 있었고, 그 자신도 번듯한 명함을 가진 전문직종의 사회인이 되어 있었으니 말이다.


놀기를 좋아했고, 심지어 잘 놀았던 사람의 면모는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한창 공부를 하던 시절에도 노래방을 좋아했는데 가창력은 물론이고 랩이나 흥도 부족함이 없었다. 그 시절 그렇게 날고 기던 그였으니, 부족할 것 없어 보이는 현재에는 더하면 더했지 모자라지 않았다.


그렇다고 늘 에너지가 탱천한 사람이었던 것은 아니다. 헤어진 첫사랑이 다시 찾아와 그를 흔들었을 때 매몰차게 돌아서지 못했던 순정남이기도 했고, 낭만을 즐기는 서정적인 사람이기도 했다. 그 당시 그는 하루도 빠짐없이 나에게 편지를 썼다. 주로 이메일이기는 했지만, 시험 준비로 자주 만나지 못하는 미안한 마음을 편지에 녹여 자신의 일상을 전하기도 하고, 좋은 음악과 좋은 글귀를 써주었다.  


나도 임용시험 준비생이 아니라 어엿한 교사가 되어 그를 대하고 있으니, 서로의 미래를 위해 헤어진 사람들답게 서로에게 당당했고, 빛이 나는 서로가 더욱 근사하게 느껴졌다. 근사한 밥을 먹었고, 근사한 곳에서 술을 마셨다. 이현이 마음에 걸리는 것을 빼고는 근사한 만남이었다.


두 번째 홍을 만나러 가던 날은 크리스마스이브였다. 연인들이 함께 하는 크리스마스이브에 왜 이현과 함께가 아닌 홍과 함께였는지는 기억나지가 않는다. 아마도 이현과 사소한 말다툼으로 연락이 단절된 상태였지 싶다. 삐치거나 화가 나면 이현의 전화를 받지 않곤 했다. 신촌 현대백화점의 지하통로에는 연인으로 보이는 사람들, 연인 또는 친구를 기다리는 사람들, 그리고 크리스마스 캐럴로 북적북적했다.


홍은 크리스마스 카드와 CD를 내밀었다. 예전에도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CD에 구워 선물하곤 했다. CD와 그 케이스에는 영화의 한 장면을 바탕으로 '바람의 검심 추억 편 OST'라고 쓰여 있었다. 사서 선물한 것보다 더 큰 감동이다. 나를 떠올리며 음악을 고르고 CD에 구우며 디자인까지 고심했을 그의 정성 때문이었다.  


들떠 있는 분위기만큼이나 홍도 들떠 있었다. 확신은 할 수 없었지만, 이대로 그와 함께 있다가는 불편한 상황이 올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홍은 나에게 중요한 말을 하려고 마음먹은 듯 보였다. 이현이 떠올랐다. 눈 앞에 있는 홍과 대비되어 다가왔다. 


이현과 비교하면 좋은 학벌에 비교할 수 없는 직업을 가진 홍. 홍에 비해 초라하지만, 누구보다 편안함을 주고 면면의 세심함을 가진 사람, 이현. 홍이 잘 다듬어진 고급 원목의자라면 이현은 빈백(bean bag) 소파였다. 홍은 여전히 낭만적이고 다정했고, '너'라는 호칭 대신 늘 나의 이름을 불러주는 자상함이 있었다. 그렇지만, 오랜 시간을 함께 한 이현에 비하면 어딘가 손님을 대할 때 같은 조심스러움있었고, 그 부분 때문에 나는, 그가 이현과의 세월을 넘어설 수는 없는 사람인가 생각했다.


평탄한 미래가 있지만 늘 한 옥타브 위 감정에 머물러 있는 그래서 그 감정을 좇다가 내 다리가 찢어져버릴 것 같은 사람과 미래가 불명확하지만 어디에 기대어도 나를 지탱해줄 수 있을 것 같은 사람 사이에 나는 정처 없이 떠돌고 있었다.


그 말을 듣더라도 오늘은 아니다.

 



나의 몸집만 한 커다란 곰 한 마리를 들고 이현이 나타났다. 혼자 지내기 외롭고 무서워서 커다란 인형이라도 안고 자고 싶다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경기도 어디쯤이라던가 그곳의 공장까지 가서 공수해왔다고 했다. 보드랍고 폭신한 인형을 벽에 세워두고 기대어본다. 오늘이 크리스마스였지.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산타할아버지의 선물을 기대하는 어린이들에게는 희망을, 사랑 고백을 작정한 이들에게는 절호의 기회를, 다툰 연인들에게는 화해할 수 있는 적당한 이유를 주는 크리스마스.


"고마워."


이현을 안고 말한다. 빈백 같은 사람.


"제발 연락 두절 좀 되지 말어. 화나서 그런가 보다 하고 기다리다가도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가 걱정된단 말이야."


고개를 끄덕인다. 지킬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나는 불편한 상황을 마주하기보다는 그저 회피하고 싶다. 쌈닭처럼 따지고 들기보다는 곰처럼 겨울잠을 자는 쪽이다. 적당한 이유를 찾아 마음이 누그러지거나 때 되면 풀리는 날씨처럼 '감정의 '이 올 때까지 굴 안에 박혀있는다. 상대가 속이 터지든 상관없이 오로지 내 감정만 돌본다. 나를 화나게 한 형벌의 의미도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열 받게 한 건 니 쪽이니까 이 정도 속이 타들어가는 건 감당해야지.'


부재중 전화 30건이 찍힌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회심의 미소를 짓기도 했으니. 아무튼 이번 대전은 크리스마스가 풀었다.


"근데 이건 뭐야?"


홍이 선물한 CD다. 크리스마스 카드와 함께 책상 위에 올려둔.


"어? 그거? 학생이, 학생이 준거야. 있잖아 맨날 나 좋다고 결혼하자고 하는 애."

"아! 그 녀석? 귀엽네, 짜식!"


당시에는 순정파 남학생들이 꽤 있었다. 내 이름을 건 팬클럽도 있었고, 주기적으로 책상 위에 꽃이나 편지나 마실 것 등을 가져다 놓는 아이들. 수줍어 볼이 발그레지고 몸을 배배 꼬으면서도 좋아 어쩔 줄 몰라하는 혈기왕성한 남학생들. 그 가운데는 졸업을 하고도 여전히 연락을 하고 찾아오는 녀석도 있었다. 은사님을 찾아뵙는 마음이라기보다는 밤늦게 전화를 해서 자기 마음이 어떻네 하며 고백과 애원의 중간 사이를 오갔던. 술 한잔 사달라 해서 나가면 어느새 내 어깨에 손을 얹고 감싸는 대범한 녀석의 스킬에 마음이 슬쩍 설렜던 적도 있는 그런.


아무튼 그렇게 둘러대자 이현은 더 이상 의문을 갖지 않았다. 크리스마스 카드야 홍에게서 받았다고 해도 큰 문제가 될 건 없다. 하지만 정성을 구운 CD는 의미가 다르다. 나는 이걸 착한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다. 굳이 솔직해서 그의 마음을 들쑤실 필요 없으니. 게다가 냉전 중 크리스마스이브에 다른 남자를 만났다는 건 더욱 설명할 길이 없다.


명동으로 향했다. 을 만났었다는 일말의 죄책감을 갖고 있으니 어쩐지 이현에게 더 잘해줘야 할 것 같았다. 바람피우는 남자들이 자기 본처에게 지극정성인 마음도 이해가 가는 순간이었다. 그에게 더 바짝 몸을 밀착시켰다.


일전에 그가 한 말이 기억이 났다. 여자가 자기 팔짱을 낄 때 남자들이 좋아하는 이유가 그녀의 가슴이 제 팔이 닿는 감촉의 짜릿함 때문이라고 했다.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에 아찔했던 것은 귀여운 남학생들에게 벽 없이 다가가겠다고 했던 무수한 나의 팔짱들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난 참 철없는 교사였구나 생각했다.


그도 싫지 않은 듯 그의 허리를 감은 나를 더 끌어당겼다. 그의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고 사타구니와 그 너머를 자극했다. 그가 키득키득 웃었다.


남산 케이블카를 타기 위해 늘어선 행렬은 정말 대단했다. 한 시간은 족히 기다려서 케이블카를 탔다. 아래의 수많은 불빛을 보며 우리의 미래도 저렇게 반짝이기를 바랐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잡았던 두 손은 서로를 안았고 부드럽게 입술을 나눴다.


연애 초반만 해도 그와의 키스에서는 담배냄새가 났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내가 원하자 금연을 시작했다. 어렵다는 것을 해낸 그가 고마웠고, 그 역시 나를 위해 변화하는 자신을 인정받고 싶어 했다. 내가 원하면 그는 변화할 수 있던 사람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내가 임용시험에 통과하지 않은 채 였다면, 금연을 위한 시간을 줬듯 변리사시험을 위해 내가 인내할 수 있는 시간을 명확히 제시해 줬다면, 한심스레 여기는 말투와 짜증 대신 열심히 공부해주면 좋겠다고 진심을 담아 말을 했다면 우리의 관계는 달라질 수 있었을까. 연락두절이 되는 부분만 빼면 나의 모든 것을 사랑했던 이현처럼 나도 재지 않고 그를 사랑했다면 우리는 지금 함께하고 있을까. 


나는 여전히 태오를 사랑한다. 그 사람과의 이별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마음이 사랑이 아니라면, 사랑이 대체 뭐란 말인가. 우리의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인지 나는 알고 있었다. 우리가 함께하는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 왜 태오와 평생을 함께 할 수 없을 거라 지레짐작해버린 걸까. 왜 우리에게 낙관적 미래가 없을 거라고 지레짐작하며 마음의 간격을 띄우려 동동거린 걸까.

현재의 사랑과 안정된 미래를 동시에 가질 수 없다면, 타협을 선택하는 건 어떨까. 다리가 길쭉길쭉한 망아지를, 준수한 명마로 만들면 어떨까. 실낱같은 희망의 힘에 간곡하게 의지하여 나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달콤한 나의 도시, 정이현>



오래 걸은 날이면, 어김없이 발이 아프다. 매끄러운 스타킹에 발이 앞으로 쏠려 얼얼하고 뻐근한 통증이 올라올 때면, 이현은 제 손으로 내 발을 주물러줬다. 구두 안에서 땀이 차 고린내가 났을 스타킹 발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조물락조물락 만져줄 때면 그는 전생에 내 엄마가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내 발을 마사지해주던 이현처럼 나도 그의 아픈 곳을 만져주었다면 그랬다면 그는 과연 준마가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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