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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부드러워지듯

이스탄불 국제학교 홈룸맘의 3년의 정리, 4년의 마지막 순간들

by 미네

요즘 나는, 작은 등을 켜지 않는다.


이부자리를 펼치고 아들과 짧은 책을 읽는다. 아들이 태어나곤 지금의 그의 나이까지 내가 지키는 약속이다. 이런 나를 보고, 남편은 안쓰러운 마음에 대신 읽어주기도 하는데 사실 아들은 아빠가 읽어주는 것보다 내가 책을 읽어주는 것을 더 좋아한다. 내가 그 시간을 참 좋아하는 것을 아마 녀석이 아는 것 같다.


목 끝까지 이불을 올리곤 얼굴만 빼꼼히 내민 아들을 보며 방의 불을 끌 때, 나는 오늘 하루 아들과 투닥거리고 말 안 듣는다고 화냈던 그 모든 순간들을 잊는다.

아무래도 나는 한국 드라마 속 여주인공처럼 기억상실증임이 틀림없다.


불을 끄고서도 잠잘 시간도 잊고, 책 이야기를 하느라 우리는 재잘재잘 떠든다.


"안 자냐?!"

남편은 우리 집 호랑이 선생님처럼, 수다가 길어진 둘을 혼낸다. 그리곤 나 또한 휴대폰의 시간을 보곤 깜짝 놀라 이제 자자고 말을 한다.


깜깜했던 방은, 사실 아이와 이야기 나누는 그 시간 동안 아주 천천히 밝아진다. 커튼을 들어 창 밖의 불빛을 집으로 들인 것도 아니건만 아주 천천히 그 어두웠던 방은 제법 아들의 이목구비가 보일 만큼 밝아졌다.


사실, 주변이 밝아진 것이 아니라 어느새 나의 눈이 그 공간의 어둠에 천천히 적응한 것이었다.




지난 투표 독려 글 이후, 나는 학교에 다시 무수한 편지를 학교에 썼다. 마치 엄마가 아주 긴 여행을 몇 년만에 떠나기 전, 엄마가 남편과 아들에게 남기는 편지처럼, 잔소리를 쏟아냈다.


1. 문단속 잘하기

2. 음식은 상하니까 안 먹더라도 매일 끓여놓기


줄줄 이어지는 잔소리가 편지 한가득이다. 떠날 사람은 말없이 가야 하건만, 이제 이별을 앞둔 마지막 PTA모임에 지난 활동을 감사하다며 건네는 학교의 선생님의 선물을 받아 들고 감사의 말을 다시 전했다.

예쁜 커피잔 두 개가 아들의 학교 마크가 찍힌 상자에 담겨 주어졌다. 오늘의 모습은 마치 내가 오랜 시간 근무했던 학교를 떠나던 그날의 내 모습과 똑같았다.

나 또한 건미역을 예쁘게 포장해 그녀들에게 건넨다. 한국에서는 여자가 아이를 출산하거나 생일일 때 꼭 먹는 것이라며 '아이의 학교'로 이어진 인연에게 감사와 사랑의 뜻을 전했다.


사실, 여자로서 엄마로서 일을 병행하며 가정을 가꾸는 일을 쉽지 않다. 특히 타국에서 모두가 외국인 노동자인 국제 학교의 현실에서 모국어가 아닌 다른 나라 말로 다른 사회 문화적 배경의 서로가 서로의 감정을 공유하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오해도 있었고, 미움도, 기쁨도 그리고 때론 슬픔도 있었다.


하지만 지나고 보니 정말 아름다웠고, 진심으로 그들에게서 나는 많은 것들을 배웠다. 엄마로서 자식을 대하는 법, 교사로서 학부모를 대하는 법, 행정가로서, 그리고 같은 엄마로서 다른 엄마를 대하는 법, 다른 문화권의 사람의 생각과 그 차이 그리고 참으로 다르지만 또 같은 삶을 살아가는 엄마의 모습. 매 순간 자신의 최선을 다하고 그것에 대해 후회하지 않고 행복해할 수 있는 방법까지 배웠다.


한국에 있었다면 하나도 알 수 없었을, 그 수많은 감정들을 차곡차곡 잘 기록해야 한다는 생각이 다시금 든다.

외국인 엄마 킴, 엄마로서 만난 첫 외국인 친구의 첫 미역국

이스탄불을 떠나기 전, 모두에게 주기 위해 주문한 한국산 기념품은 이란과 이스라엘의 전쟁으로 원래 배송루트를 벗어나, 이집트 어느 항구에 갇혀있다. 아무래도 아들의 방학 시작 전에 그 물건들이 이스탄불에 도착하긴 어려울 듯하다.


한국에 살았다면 이 전쟁에 대해 내가 관심이나 가졌을까.

이스탄불이라는 곳에 살고 있어, 이 세상은 나 혼자만이 사는 곳이 아니며 세상의 누군가와 끊임없이 연결되어 있음을, 어쩌면 나의 아주 평범한 일상이 세상 어느 누군가와 아주 촘촘히 연결되어 있음을 다시 한번 더 느낀다.


그 멀리 있는 누군가의 전쟁으로 인해 계획과 달리 손수 미역을 정리하여 사람들 몫을 나누어본다. 다행히 나의 오랜 친구가 된 킴은 기쁘게 미역국을 끓여, 내게 사진을 보내줬다. 그녀의 막내아들은 처음 본 미역을 시금치라 여기며, 이것으로 얼른 맛있는 것을 만들어 달라고 말했단다.


이 여름, 이스탄불 물 배달부 수주 아저씨 땀 덕분에 커다란 물통은 그녀의 집에 온전히 도착했다. 그리고 큰 생수병에 담겨있던 시원한 물은 다시 작은 냄비로 옮겨진다. 미역은 물을 온전히 받아낸다. 물에 담겨 어느새 제법 흐물흐물 부풀어진 그 녀석은 다시 그녀의 따뜻한 사랑 덕분에 제법 미끈미끈 부드러워졌다. 어느새 뽀얀 김이 냄비 가득 올라오는 듯 하다.


그렇게 건미역처럼 그저 딱딱했던 나는, 이제 제법 유들유들 능글거리며 부드러워진 말투로 말한다.


"고마워요. 이 선물이 '컴플레인 위너'에게 주시는 상으로 여기고, 새로운 시작에서 더 열심히 살겠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마지막까지 서로에게 사랑 가득한 잔소리를 늘어놓고, '떠날 때는 말없이'라는 진리를 어기고 그렇게 차를 나누고 손수 구워왔다는 또 다른 엄마인 폴란드인 그녀의 파이를 나누며 학교 뒤뜰에 다정히 앉았다.


그날은 학교가 참으로 조용했다. 정말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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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반대말은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 마지막까지 해야 할 이야기를 PTA 멤버들과 선생님들과 함께 나누었습니다. 아이의 학교는 지난 CIS 평가에 인증을 통과했고, 하지만 현재 새로운 문제에 봉착해 있습니다. 말없이 떠나야 하는데 어렵네요. 아하하.


그래도 저는 늘 생각합니다. 무언가 때문에 내가 지금 힘들다면, 그건 내가 뭘 하긴 하고 있는 거다. 아하하. 스스로 부끄럽지 않게 최선을 다했으면 괜찮다. 다른 누군가의 평가가 아닌 사실은 자기 잘못은, 내 얼굴의 잡티는 본인 자신이 제일 잘 알잖아요. 아하하. 자신을 사랑합시다. 그리고 사랑의 잔소리를 보냅니다. 힘내시고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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