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병원에 가고 입원을 하고, 부모님과 가족들을 만나고, 수술 후 내가 먹고 싶다던 찹쌀떡을 검은 봉지 가득 사들고 오는 친구를 만나고 웃었던, 그 모든 순간은마치 꿈처럼 지나갔다. 그 모든 것이 가짜인 것처럼, 나는 다시 이스탄불에 살고 있다. 한국에 있을 땐, 누가 튀르키예어 좀 해보라고 하면 한참만에 떠오르던 말이 신기하게도 비행기에 내리자마자 다시 생각나고 짐을 옮겨주시는'포트'분에게 바로 내가 어디로 가고 싶다며 하고 싶은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렇다. 난 다시 살아가고 있다. 한국에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난 다시 살아가고 있다. 아이를 낳고 나서 내게 변화된 것이 있다면 내 감정에 집중할 여유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예전엔 나에 관한 슬픈 일이 있으면 그것을 몇 날 며칠동안 고민했는데, 아이에 관한 일이 아니라면 신경 쓸 겨를이 없다.
가끔 시떼의 다른 엄마가 내 이야기를 전해 듣고, 지훈이 엄마가 정말 괜찮냐고 물을 때가 되어서야 아팠구나하고 건강도 생각하자고 느끼지만, 삶은 너무나 바쁘다. 하지만 이런 바쁨이 때론 좋은 일이 된다. 내 아픔에 집중할 수 없는 그 바쁨이, 때론 삶에 도움이 된다.
멀리 돌아와서, 다시방학이다. 나한테 집중할 수 없다. 튀르키예도 코로나 확진자가 늘어나지만 집에만 있을 순 없는 일이다. 사실 이스탄불에서 마스크를 혼자만 쓰고 거리에 서 있을 때겪는 어색함은 내가 여기서 아이랑 집에만 있는 게 오히려 더 이상하다고 말해준다.
방학이니 아이와 함께 어디든 가야 한다. 너와 함께하는 박물관은 천천히 돌아보기보다 빠르게 걷기에 가깝지만, 그래도 아들과 이 더운 여름 그와 함께 걸어서 보기 위해선 박물관(müze;뮤제)만 한 곳이 없다.
흔히 튀르키예를 구경하면 '뮤지엄 패스'를 쓴다. 그러나 '뮤지엄 패스'가 되는 곳은 관광객이 많이 가고, 온 가족이 코로나 확진자이지만 그런 곳엔 당연히 사람이 몰리고 위험하며 줄을 서야 하고 아이와 함께 가기에는 이 더운 여름날,힘들다. 아이가 무슨 감흥이 있어서 땡볕에 줄까지 서면서 박물관, 미술관에 입장하려고 하겠는가.
우리 아들도 그렇다. 애들은 다 재미없다고 한다. 그건 당연하다. 서서 기다리는 거 정말 싫어한다. 박물관을 어차피 정말 빠르게 볼 텐데 광활하고 넓은 곳 한 번 가는 것보다 작고 깨끗한 박물관을 여러 번 함께 가보는 것도 아이에게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아들은 아직 무료니까.
예전, 혼자일 때 유명하지 않은 해외 미술관을 갔을 때 느꼈던 생경함이 있었다. 내가 막 달리기 하듯 오디오 설명에, 가이드북에 시험 대비 숙제하듯 달리는 미술관에서 아이들 무리가 하나 둘 종이를 들고, 엎드리거나 바닥에 앉아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 그림의 설명을 오래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각자 자기 스타일대로 그 그림을 보고 유심히 다시 그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나만 달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한 번도 미술관에서 좋아하는 그림을 보며 그려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는 것을, 뭐가 그렇게 바빴던 것인지, 지나고 나면 그 그림 제목이나 내가 기억할까. 그 순간 내가다르게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그때부터 나는 조금 별나긴 했나보다.
지금 이스탄불 살이의 장점은, 그 생경함을 기억하고 아이가 달리더라도 그 달리던 그곳에 다시 가는 일이다. 한국 속도가 아닌 그리고 내 속도도 아닌, 아이의 속도로 같이 걷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오고 싶다고 하면 또다시 가는 것이다. 때론 박물관 입장료가 아깝게 대충 보는 것 같아도 아이에게 오늘은 뭐가 제일 좋았는지 묻고, 거기에 다시 가보는 것이다. 아이의 속도에 따라 다시 걷는 것이다. 입장료 어른 25리라(한화 1,825원;2022년 7월 말 기준), 한국과 비교하면 아까울 것 없는 너무 저렴한 가격이니 이는 더욱 기쁜 일이다.
오늘 아들과 세 번째로 데니즈 뮤제시에 갔다 왔다. 보스포루스 해협이 보이는 베식타쉬 선착장이 옆에 있는, 이번엔 같은 시떼에 사는 언니의 아이와 함께 택시를 타고 갔다. 엄청난 역사적 가치를 지우면 그저 이슬람 제국 시절 화려하고 거대한 배들과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작은 배 모형들, 그리고 모형 잠수정, 과거 잠수부들의 복장, 튀르키예의 해군복장 등이 있을 뿐이다. 늘 생각하지만 무엇을 보든 그건 어떻게 보냐의 문제일 뿐, 때론 30-40분이면 그곳을 다 봤다며 나올 수 있는 게 모든 관람의 한계다. 영어 설명을 읽어도 역사적 배경지식 없이는 그저 화려하게 장식된 거대한 배일 뿐이니 말이다. 하지만 아이의 관람이 어떤 때는 거대한 배를 따라 그리는 아이의 손짓이 될 수도 있고, 때론 박물관 안에 있는 식당에서 마시는 시원한 오렌지 주스만으로도 충분할 수 있다.
다른 튀르키예의 유명 관광지의 박물관보다 좋은 점은 이곳은 한적하고 조용하며, 아이와의 걸음으로 다시 입구까지 돌아오기가 너무 멀지 않고 적당해서는 아닐까. 아이와 단둘이 택시 타고 하는 여름 여행은 편안하고 안전한 것보다 중요한 건 없다. 아이와 달리다가 멈추어도 다시 오면 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