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랜딩은 소비자를 살아가는 존재로 바라보는 일
주 소 : 京都市中京区二条柳馬場東入ル晴明町650
전화번호 : 075-231-8625
영업시간 : 11:30 - 23:00(Last Order)
정기휴일 : 없음
홈페이지 : https://cafe-hello.jp/
한 도시를 반복해 찾는다는 건 어떤 일일까.
여행이라는 말로는 다 닿지 않는다. 그건 어느 순간부터 삶의 일정한 리듬이 되었고, 한 해의 온도를 조율하는 방식이 되었다. 나는 2008년부터 지금까지 마흔 번째 교토를 걷고 있다. 누군가는 도시와 사랑에 빠지는 계기를 영화처럼 말하곤 한다. 하지만 내겐 그런 장면이 없다. 매년 한두 번씩 들렀고, 그저 다녀온 것이다.
특별한 사연은 없지만 돌이켜보면 분명한 감각이 하나 있다. 처음 교토를 걷고 난 후, 나는 그 길을 계속 걷고 싶어졌다. 말없이, 그러나 분명히 이끌렸다. 그저 걷고, 앉고, 바라보고, 사진을 찍으며 얻는 지속의 감각. 그 감각은, 세상의 속도와는 무관하게 나를 천천히 진정시키는 일이었다.
교토는 확실히 이상한 도시다. 오래된 것이 오래된 채로 살아 있고, 새로운 것이 새롭다고 내세우지 않는다. 경계가 없다. 사찰 옆에 골목이 있고, 골목 안에 가게가 있고, 그 가게는 때로 누군가의 집 같고, 그 집은 다시 도시의 일부가 된다.
겉으로는 조용하지만 속에는 많은 것들이 흐른다. 천 년의 시간이 눌러앉은 마을이면서도, 일본 최초의 전차, 최초의 영화관, 최초의 초등학교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고도(古都)’라는 이름 아래 숨 쉬지만, 한편으로는 ‘최초(最初)’가 가득한 도시, 전통이라는 단어로는 포착되지 않는 ‘어떤 기세와 질감이 공존’하는 도시다.
그런 기세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교토에는 닌텐도, 교세라, 오므론, 니치콘처럼 전 세계를 상대로 기술을 선도하는 강소기업들이 뿌리내려 있다. 오랫동안 일본의 수도로 지정되어온 탓에, 이 도시는 ‘규제’와 ‘보존’이라는 강력한 제약 속에 놓여 있다. 그럼에도 그 기업들은 「교토식 경영」이라는 이름으로 자기 방식대로 성장했고, 살아남았다. 그것은 단지 경영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 이면엔 도시를 떠받치는 강한 정체성과 자기 방식대로 나아가려는 태도가 있었다.
나는 교토가 단지 과거를 지키는 도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곳은 시간을 보존하는 대신, 시간을 다루는 방식이 독특한 도시다. 과거도, 미래도 모두 지금 한 자리에 스며있고, 그 어떤 시간도 서두르지 않는다. 그 느슨한 시간 속에서, 교토는 걸을 때마다 다르게 느껴진다.
공간은 그대로인데, 계절의 결, 빛의 각도, 바람의 냄새가 달라지는 것 같다. 그 안을 걷는 나도, 매번 다른 느낌이다. 달라지는 것은 온도와 속도 그리고 무엇보다 나 자신이다.
그 변화는 단순히 감정의 흐름이 아니라, 내가 교토라는 도시의 ‘결’을 몸으로 받아들인 결과다. 이 도시는 나를 바꾸지 않지만, 나를 다르게 감싸주는 것만 같다. 그래서 나는 이 도시의 진짜 매력을 ‘형태’가 아니라 ‘질감’에서 느낀다. 겉은 단단하게 정제되어 있지만, 안은 무수한 결로 이루어져 있다. 골목의 벽돌, 카페의 창살, 마루 아래의 그늘, 심지어 관광객의 발걸음 사이로 흐트러지는 무수한 볕들 속에서도, 나는 교토가 품고 있는 결을 느낀다. 그러다 문득, 이 도시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도 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토는 사물을 명확히 분류하려 하지 않는다. 사찰과 주택, 상점과 정원, 예술과 생활 등 이 도시를 둘러싼 모든 것의 경계는 흐릿하고, 오히려 그 흐릿함이 더 깊은 결을 만든다. 이곳에서는 모든 것이 정체성보다 관계와 결로 존재한다. 목적보다 맥락이 먼저이고, 의미보다 결이 오래 남는다. 나는 교토에서 질감이란 것이 단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삶의 태도이자 살아가는 방식 그 자체라는 걸 새삼스레 한 번 더 느낀다.
그런 생각을 품고 걷던 어느 날이었다. 교토시청에서 옛 왕실의 어소가 있는 교토교쇼(京都御所) 방면으로 천천히 걷다가, 어느 순간 나는 발걸음을 멈췄다. 모퉁이를 돌아 한적한 골목으로 접어든 길 끝, 130년 된 마치야 건물 앞에 서 있었다, 유리창은 어둡고 깊었고, 창 앞에는 바나나 나무 잎이 드리워져 있어 안쪽을 쉽게 들여다볼 수 없었다. 그러니까, 그 불투명함이 오히려 묘한 안도감을 줬던 것 같다. 마치 교토라는 도시가 언제나 그래왔듯 겉으로는 조용하고 단정하지만, 안쪽에서는 천천히 무언가가 흐르고 있다는 듯한 기척이 내 발걸음을 조용히, 그러나 자연스레 안으로 옮기고 있었다. 카페 비블리오틱 헬로. 이름을 아는 사람보다 그냥 지나치다 멈춰서는 사람이 더 많은 법한 곳에 나는 조용히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서자,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천장을 향해 쭉 뻗은 책장이었다. 벽면을 따라 2층까지 이어진 나무 선반에는 사진집, 예술서적, 디자인 북, 여행 에세이들이 층층이 꽂혀 있었다. 책이 쌓여 있다는 말보다, 이 공간이 책에 의해 지탱되고 있는 말이 더 어울릴 법 했다.
실내는 어두운 나무와 식물의 녹색이 어우러져 묘한 온기를 만들어냈다. 무디한 재즈가 낮게 흐르고, 오래된 티크 가구들과 낮은 소파, 묵직한 테이블은 곳곳에 놓여 있다. 공간은 구획되어 있지 않았지만 사람마다 각자의 시간이 따로 흐르는 것처럼 보였다.
누군가는 책을 읽고, 누군가는 필름 카메라를 만지작거리고, 누군가는 창가를 바라보며 묵묵히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한쪽 테이블에는 막 구워낸 스콘과 계절 한정 디저트인 과일 타르트가 놓여 있었고, 키친 쪽에서는 따뜻한 치킨 커리와 천연 발효된 포카치아를 주문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픈 키친에서는 바쁘게 음식을 준비하는 손길이 분주했지만, 그마저도 서두르지 않는 느낌이었다.
여기서는 책과 커피뿐 아니라, 사유와 사소한 식탁이 나란히 놓인다. 그날 내가 먹은 건 바게트와 머핀이었지만, 지금까지도 그 맛은 공간의 온도처럼 기억된다. 안쪽에는 작은 베이커리 공간이, 위층에는 다락처럼 꾸며진 조용한 테이블들이 숨어 있었고, 햇빛은 높은 창으로부터 조용히 실내를 따라 흘러들고 있었다.
그곳은 단순한 카페가 아니었다. 오히려 책장과 식물, 빵과 커피, 가구와 음악이 ‘하나의 감각적 생활’로 어우러진, 작지만 정제된 「시간의 거실」 같았다. 이곳에서 나는 커피를 구입하여 마시는 ‘소비자’가 아닌 시간을 감각하고 공간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생활자’가 되는 기분이었다.
문득 몇 해 전 읽은 하쿠호도의 『생활자 발상학원』 속 문장이 이 조용한 마치야 안에서 또렷이 떠올랐다. 일본의 광고대행사 하쿠호도는 인간을 소비자가 아닌 생활자(生活者)라 부르자고 제안했다. 소비란 하나의 행위지만, 생활은 하나의 태도다. 하쿠호도는 시장의 관점에서 인간을 해석하는 대신, 인간의 삶의 결로부터 시장을 관찰하자고 말한다.
“물건은 나누면 줄어들지만 감동은 나누면 증가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구절. “관점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견해와 발견을
사람들과 나누는 것만으로도 증가합니다.”
지금 이 고요한 공간에 앉아, 나는 무언가를 소비하는 대신, 관점과 시간을 나누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여기는, 시간을 구매하는 곳이 아니라, 시간을 감각하는 곳이었다.
한국에도 수많은 카페가 있다. 좋은 원두, 정교한 인테리어, 빠르고 정확한 서비스까지 모든 것이 효율적으로 설계되어 있다. 그런데 왜 나는, 이 느린 공간을 이렇게 자주 떠올리게 되는 걸까. 왜 이곳에서는 ‘앉아 있음’만으로도 충만하다고 느끼는 걸까.
아마도 우리가 놓치고 있는 건 커피 맛도, 테이블 간격도 아닌, 생활자가 스며들 수 있는 ‘태도와 여백’일지 모른다. 목적 없는 체류를 허락하는, 시간의 결을 살려는 공간 말이다. 결국 공간은 사람의 태도를 닮는다. 빠르게 마시고, 빠르게 떠나기를 전제로 설계된 구조에서는 머무름의 깊이가 생기기 어렵다. 반대로 누군가의 앉음, 기다림, 혼잣말까지도 ‘허용’하고 ‘수용’하려는 의도가 깃든 공간은 시간 자체를 느리게 만드는 힘을 갖는다.
내가 떠올린 그 질문은, 하쿠호도의 생활자 발상학원에서도 마찬가지로 던져졌다.
"소비자가 아닌 생활자로 본다면,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가?"
이 물음은 단순한 마케팅 프레임을 넘어서, 인간에 대한 사유와 그들이 살아가는 공간에 대한 책임으로 확장된다.
카페 비블리오틱 헬로는 그 질문에 대한 교토의 한 가지 대답처럼 보인다. 이곳은 가게이되 집 같고, 카페이되 도서관 같으며, 베이커리이되 갤러리 같고, 때로는 거실이자 공공의 거점이기도 하다. 뚜렷한 기능 하나로 설명할 수 없는, 복합적이면서도 단정한 생활의 결이 이 공간을 구성한다. 둥근 것을 보는 사람과 붉은 것을 보는 사람이 서로의 관점을 나눌 때, ‘따뜻한 시대’라는 온도의 새로운 해석이 태어나듯, 비블리오틱 헬로는 바로 그런 관점들이 교차하는 장소다. 책을 읽는 이의 사유와, 빵을 고르는 이의 취향, 음악을 고르는 이의 분위기가 서로 눈치 보지 않고 공존한다. 그 차이들이 자연스레 쌓일 때, 이곳은 단순히 좋은 공간(空間)을 넘어 공간(共間)으로 진화한다. 서로 다른 존재들이, 다르다는 이유로 소외되지 않고 함께 머무를 수 있는 장소. 그것이 교토가 지닌 결이고, 카페 비블리오틱 헬로가 조용히 제안하는 살아가는 한 가지 방식이다.
나는 그런 장소를 오랫동안 만나고 싶다. 누군가의 목적이 아닌, 맥락으로서 존재하는 공간. 소비자가 아니라 생활자가 앉을 수 있는 자리. 그것은 가구를 고르는 일이기도 하고, 빛이 머무는 방향을 상상하는 일이기도 하며, 공간과 시간 사이의 적정한 여백을 남기는 일이기도 하다.
나는 그런 공간이 브랜드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머물고 싶은 마음이 브랜드가 되는 순간이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교토를 마흔 번 걸어 다니며 마침내 알게 된 한 가지였다. 눈에 보이던 사물(事物)은 어느새 죽은 사물(死物)이 아니라, 생각을 품은 사물(思物)이 되어 내 안에 남았다. 사물을 보는 눈보다, 사물과 함께 생각할 수 있는 마음.
나는 그것을, 교토라는 도시에게 배웠다.
『생활자 발상학원』(生活者発想塾)은 일본의 대표 광고회사 하쿠호도(博報堂) 산하 생활종합연구소에서 출간한 책으로, “소비자가 아닌 생활자로 보자”는 관점을 바탕으로 사람과 사회를 새롭게 이해하려는 시도를 담고 있습니다.
하쿠호도는 시장을 중심으로 인간을 해석하기보다, 인간의 삶의 결에서 시장을 다시 관찰하자고 제안합니다. 그들은 “소비는 단발적인 행위이지만, 생활은 지속적인 태도”라고 말하며, 인간을 단순한 구매자가 아닌, 감각하고 감정하며 관계를 맺는 ‘생활자’로 바라봅니다.
『생활자 발상학원』은 단지 소비자를 관찰하는 기술서가 아니라, 인간과 공간을 바라보는 사유의 전환을 제안하는 책입니다. 하쿠호도는 인간을 시장의 중심이 아닌, 일상의 중심으로 다시 세우려 합니다. 그들이 말하는 생활자는 ‘사는 사람’이며, 동시에 ‘감각하고, 해석하고, 연결하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공간 역시 소비의 장이 아니라, 감각과 관점이 축적되는 삶의 무대로 재해석되어야 합니다. 브랜드는 그런 공간을 어떻게 설계하고, 어떤 태도로 열어두는가에 대해 답해야 합니다. 단순한 서비스나 상품을 넘어, 태도와 맥락이 살아 있는 구조를 제안하는 것. 그것이 오늘날 ‘브랜딩’이라는 말이 다시 질문받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결국 『생활자 발상학원』이 우리에게 건네는 메시지는 단순한 정의의 전환이 아닙니다. 그것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근원적 질문에 대한 실천적 사유입니다. 우리는 이제 소비자를 설득하는 방식이 아니라, 생활자와 함께 살아가는 구조를 고민해야 합니다. 브랜드란 무엇인가. 그것은 단순한 심볼이나 슬로건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리듬을 감각하는 태도이며, 사람들이 머무르고 싶은 방식에 대한 깊은 이해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비블리오틱 헬로는 조용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습니다. 브랜드란, 소비자를 생활자로 바라보는 힘을 기르는 일. 그리고, 그들의 삶에 맞는 공간을 함께 짓는 일입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책은 품절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