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돌이와 보내는 겨울
온돌이는 썰매개로 사모예드(Samoyed) 견종이며 겨울개다.
온돌이와 9번째 겨울이 다가오고 있다.
한밤중에 겨울이 얼마나 춥고 고요한지, 나는 온돌이를 키우면서 알게 되었다.
3개월 들어서던 온돌이가 우리 집에 왔던 날은, 추운 겨울 12월이었다.
당시에 나는 반려견 훈련책에서 읽고 배운 대로, 매일매일 산책을 해야만 했다.
하지만, 온돌이는 보통의 작은 강아지들보다 큰 강아지이다 보니 어떤 일이 생길지 몰라 완전히 훈련이 될 때까지는 낮에 산책을 피하기로 했다. 추운 겨울밤에는 산책 나온 사람이나 작은 강아지들이 없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우리 세 식구였다. 너무 추웠다.
털모자와 털장갑을 챙기고 털부츠를 신고 단단히 무장을 하고 나가도, 얼굴이 찢어지게 추운 날은 왜 이러고 살아야 하는지 서글픔마저 들었다.
동네 한 바퀴 산책을 마치면, 약속을 한 것도 아닌데 작은 공원에 온돌이 친구들이 옹기종기 모여든다.
견주들의 차림새는 모두 비슷하다.
털모자와 털장갑에 발목까지 내려오는 검은색 패딩을 입고, 손에는 핫팩들이 들려있다.
'안녕하세요!" 인간 부모들은 서로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있으면, "친구야, 아픈 데는 없어?" 강아지들도 안부를 묻듯이 서로의 냄새로 안녕을 확인한다.
추운 겨울, 밤 12시가 되어가는 시간에 나와있는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을 만나면서, 나는 위로받았다.
집에 안 들어가겠다고 버티는 래미 아빠는 산책 나온 지 3시간이 넘어간다고 했다. 그거에 비하면, 나는 힘든 게 아니었다.(온돌이와 동갑이던 래미는 작년 겨울에 암으로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인간 엄마아빠들의 추위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강아지들의 표정은 행복하기만 했다.
친구들이 토르 아빠를 빙 둘러싸고 앉아서 기다린다. 왜냐하면 오늘도 아저씨의 주머니에서 나올 돼지귀 간식 때문이었다. 어떤 순서로 주시는지 모르면서, 친구들은 앞발을 동동거리며 자신의 차례를 기다린다.
토르는 자기의 간식을 나눠주는데도, 친구들에게 화를 내지 않고 똑같이 기다려서 먹는다.
그 모양새들이 너무 귀여워서 견주들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추운데 내가 왜 고생을 하지'하던 불평은 어느새 잊어버리고, 온돌이와 친구들 덕분에 하루를 또 웃으며 마무리한다.
"엄마, 밤새 눈이 왔어. 얼른 사람들 나오기 전에 나가야 해. 온돌아!! 눈 밟으러 가자"
이른 아침시간에 아이가 큰소리로 나를 부른다.
아이는 눈이 와서 신난 것인지, 온돌이를 보여 줄 생각에 신난 것인지 알 수 없다. 기온이 내려가고 흐린 날씨가 되면, 날씨앱을 챙겨보며 눈을 기다리는 습관이 생겼다. 첫눈을 밟게 해주고 싶은 아이의 마음은, 어떤 의미의 울림일까?
사실 온돌이가 눈을 좋아하는지, 눈이 내린 하얀 세상이 온돌이의 눈에는 어떻게 보이는지 모른다.
눈이 많이 내린 날은, 지나가는 사람들의 마음도 포근해지는 것 같다.
"너 기분이 좋겠다"
"어머, 눈이 온 풍경에 너 진짜 어울린다"
"멋있네"
"너무 이뻐요."
지나가는 사람들이 온돌이에게 아름다운 말들을 전해준다. 온돌이 덕분에 내가 모르는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세상과 통하는 길을 걷는 것이다.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눈이 온 뒤,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면 땅이 빙판길이 된다.
안나푸르나 트래킹이라도 할만한 신발을 찾아 신고, 긴장하며 산책을 나선다.
온돌이는 달리고 싶은 '직진본능'이 있는 썰매개다.
그런데, 아마도 차가운 눈을 밟는 순간이면 밑바닥에 있는 본능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 같다.
온돌이가 갑자기 달리는 바람에, 몇 번 빙판길에서 넘어져봤다.
정말 아찔한 순간들이었다. 워킹훈련은 여러 번 반복해도 9년째 개선되지 않는 부분이다.
유명하신 훈련사분께 기회가 되어, 온돌이에 대해서 이것저것 여쭤본 적이 있다.
"그냥 관상용 개예요. 털관리나 하세요. 훈련이 되지 않아요. 그다지 쓸모 있는 개는 아니죠"
물론, 이 훈련사분은 어질리티나 프리스비 같은 개를 훈련시켜서 챔피언을 만드는 분이었다.
*어질리티(dog agility) : 개와 사람이 한 팀이 되어 장애물을 통과하는 경기
*프리스비(frisbee) : 사람이 원반을 던져서 땅에 떨어지기 전에 개가 물어오는 경기
그분의 관점에서 보면, '쓸모없는 개'가 맞기는 하다. 마음이 살짝 상했던 순간이었지만, 사실이기는 하다.
온돌이가 가능한 3 종목은 '앉아, 기다려, 빵' 이기는 하지만, 이것만 해내는 것도 우리에게는 챔피언이다.
그래도 쓸.모.없.는.개라니....
겨울이 되면, 온돌이는 그동안 갖고 있던 털을 다 뿜어낸다.
추워지는 날씨에 대비하려고, 여름동안 갖고 있었던 얇은 털들을 밀어내고 굵고 풍성한 털들이 올라온다.
외국에서는 사모예드 털을 이용해서, 스웨터를 짜거나 쿠션, 담요 등을 만들기도 한다.
그 정도의 양이 가능하다는 거다.
집안은 구석구석 온돌이의 털들로 가득하다.
하루종일 '찍찍이'라고 하는 끈끈이가 묻어있는 돌돌이로 여기저기 문지르고 다녀도 소용이 없다.
온돌이가 뿜어내는 털의 양과 속도를 내가 따라갈 수가 없다.
우리가 온돌이와 함께 살면서 양보하고 감수해야 하는 점이다.
검은색의 옷을 자제해야 하고, 돌돌이를 몇 박스씩 구비해야 하고, 청소기를 일 년에 두 번은 바꿔야 하는 것과 온돌이의 털이 토핑된 밥을 먹는 것.... 처음에는 인내가 필요했지만, 지금은 그냥 당연한 것이 되었다.
이제 나는 온돌이가 없는 겨울을 상상할 수가 없다.
온돌이 친구들과 보내는 크리스마스의 따듯함,
꼬득꼬득 눈을 밟을 때 들리는 발자국 소리,
깜깜한 밤에 구름이 되는 우리의 입김,
산책을 마치고 들어온 온기 가득한 '나의 집'에 대한 감사함.
모두 온돌이가 내게 준 겨울의 선물이다.
온돌이가 없었다면,
크리스마스는 차만 막히는 귀찮은 빨간 날이고,
깜깜한 밤이 주는 고요함은 모르고 지나쳤을 것이며,
눈이 많이 내린 날은, 운전을 걱정하며 관리사무소나 구청에 전화를 걸었을 거다.
오늘도 산책을 나가면서, 온돌이에게 속삭거렸다.
'금방 추워질 거야. 온돌아, 너도 느껴지지?'
온돌이는 허공에다 코를 올리고 킁킁거린다.
'엄마, 내가 겨울이 어디쯤 와있는지 느껴볼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