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딩조카와 책읽기
푸코, 바르트, 레비스토로스, 라캉 쉽게 읽기/우치다타츠루
4월 3주 토요일
오후 6시 영어교육에 관한 부모교육이 있었다. 1시간 30분 정도 부모님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조금 서둘러 집으로 차를 몰았다. 오늘은 조카와 책이야기를 하기로 한 날이다. 이번주가 동원예비군 훈련주라고 들었는데 잘 다녀 왔는지 궁금하다.
이번 책은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이다. '하류지향'이라는 책을 읽고 저자에 관심이 생겨 저자의 다른 책들도 읽어 봐야겠다 생각하고 찾아 읽었던 책인데 구조주의에 대한 쉬운 설명으로 주변이들에게도 추천했던 책이다.
저녁은 김밥과 떡볶이로 간단히 먹고 책 이야기를 시작했다.
"모국어를 사용하는 것 만으로 나는 객관적인게 아니지 않나요?"라는 조카의 질문에 대해 생각해 본다. 나는 오래 전부터 '객관적'이라는 단어 사용을 어려워 한다. 내가 '객관적'일 수 있는 때가 있을까 싶기 때문이다. 조카의 질문 속 '모국어를 사용하는 것 만으로도'라는 문구를 '언어를 사용하는 것 만으로도'로 바꿀 수 있다면 "언어를 사용하는 것 만으로도 나는 객관적인게 아니지 않나요?"가 된다.
언어와 객관의 관계성. 언어를 사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난 그 이유에 맞게 언어를 잘 사용하고 있는걸까? 내가 언어를 사용하는 이유는 나의 생각과 감정을 다른 이에게 전달하기 위해서이다. 이런 언어의 사용은 서로 간의 합의를 전제로 한다. 같은 언어 사용에 같은 경험을 공유해야 한다. '같은 경험'. 서로 다른 인격체가 같은 경험을 공유하는 것이 가능한가? '같은 사건을 경험하는 것'은 '같은 사건을 경험하고 해석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감각되는 것' 그리고 '지각되는 것'은 개인마다 분명 다르기 때문이다. 나는 어떤 사건에 대해 다른 이들도 내가 경험한 것과 같은 경험을 할(했을) 것이라는 전제로 내 생각과 감정을 전달한다. 하지만 '같은' 경험을 서로가 공유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언어의 사용은 그 태생에 오류를 포함하고 있지 않을까? 같은 시간과 공간을 살아가는 이들과의 관계 속에서 사용되는 언어는 서로가 '비슷한' 경험들을 공유하며 서로가 생각과 느낌을 공유한다고 가정한다. 하지만 상대방이 내가 느끼는 것과 생각을 동일한 수준에서 느끼는지 나는 알길이 없다. 몸짓과 언어를 통해 서로가 상대방도 내가 생각하고 느끼는 것과 '비슷한' 생각과 느낌을 가질거라 상상하는 것 뿐이다. 이런 불안한 기초 위에서 언어는 사용된다.
그래서 일까? '안다' 것에 대해 옛 사람들은 '스스로 모른다는 것을 안다'에서 앎의 시작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언제라도 '나의 앎'에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할 때 '안다'라고 말을 할 수 있다는 거다. 무언가를 단정해 '무엇이다'로 말하는 것이 내게 어려운 이유이기도 하다 .나의 단정은 오류일 수 있다면 내 앎에 오류가 있다는 지적에 귀를 기울일 수 밖에 없다. 무엇이 옳다 또는 그르다를 말하는 것보다 그 결과를 얻기 위해 서로의 생각을 나누는 과정이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조카의 두번째 질문 "어떤 선택을 하던 옳은게 옳지 않게 될 수도, 옳지 않은게 옳은게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애초에 '정답'이라는 것은 존재하는가?"였다. 이 질문에 나는 에드워드 핼릿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를 추천해 주었다.
@isnobody_yo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