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주 일요일
최근 '판타레이'를 읽다 문득 "뉴튼은 왜 속도에서 미분을 생각해 냈을까?" 하는 생각에 읽던 책을 잠시 두고 미적분에 대한 책을 펼쳐 들었다. 우리가 보통 자동차를 타고 가다 "지금 속도가 몇이야?"고 물을 때 "50이야."라고 답한다면 좀 더 정확하게는 '속도'가 아니라 '속력'이다. 좀 더 정확하게는 '평균속력'을 묻는 질문이 된다. 다시 말해 "지금 평균속력이 얼마야?"가 된다. 그럼 '평균속력'과 '평균속도'는 어떻게 다를까? 속력+방향=속도다. 속도에는 -50mk/h가 있다는 말이다. 속력에서 '이동거리의 변화'가 속도에서는 '위치의 변화'로 바뀐다.
처음의 질문 "지금 속도가 몇이야?" 대해 좀 더 생각해 보면 '지금'이라는 단어에 좀 더 집중할 수 있다. 진짜 알고 싶었던 것은 "지금 이 순간의 속도가 얼마일까?"일 것이다. 즉 지금이라고 하는 순간의 속도를 구하고 싶다면 위치변화를 경과시간로 나누는 식에서 경과시간에 극한의 개념을 적용해야 한다. 그렇게 계산한 값은 '순간속도'가 된다. 그리고 기하학으로 표현하면 '접선의 기울기'로 표현 할 수 있다.
그렇게 미분에 대해 생각하다 점심을 먹고 소파에 누워 미분관련 책을 읽다 잠깐 눈을 감고 있다 잠이 들었나 보다. 초인종이 울리는 소리에 잠이 깼다.
오늘 같이 이야기할 책은 에드워드 핼릿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이다. 책이야기를 하기 전 내게 빌려 간 책에서 접힌 A4용지를 한 장 건네 주길래 펴 보았더니 이전 책에 대해 내가 정리한 메모지였다. 이번 책은 조카가 사지 않고 내 책을 빌려 가서 읽었기에 같이 책을 읽지는 못했다. 건네 받은 메모지를 보며 당시 어떻게 책을 이해하려 했는지 흔적을 잠시 쫓았다. 조카는 책에 대해 역사가 마치 양자와 비슷한 것 같다며 관측자에 의해 다르게 관측되는 양자와 같이 역사도 관찰자에 의해 그 해석이 바뀌는 것 같다며 자신이 읽으며 정리한 메모들을 보며 적힌 내용들을 설명했다. 조카의 이야기를 메모를 하며 이전에 내가 한 메모에 대해 알려 주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에 조카의 설명이 끝난 후 내가 어떻게 이 책을 이해하려 했었는지 설명했다.
오랜 시간 책을 읽다 보면 책을 읽는 방법이 바뀌는 순간들이 있다. 또 읽으며 메모하는 방법이 바뀌는 순간들도 있다. 조카가 건낸 메모지에는 책 제목을 중심으로 책의 각 장을 순서로 마인드 맵이 그려져 있었다. 저자의 생각 흐름을 쫓기 좋은 방법이라 즐겨 정리하는 방법 중 하나다.
이 책은 총 6장으로
1. 역사가나 그의 사실들
2. 사회와 개인
3. 역사, 과학 그리고 도덕
4. 역사에서의 인과관계
5. 진보로서의 역사
6. 지평선의 확대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의 사건이 있다. 단순히 시간순서에 따라 사건을 나열한다. 그러다 전달자가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먼저 시간 순서에 따라 나열 된 사건에 추가한다. 그렇게 누군가에게 전달하게 된다면 그 전달된 사건은 처음의 단순한 시간순으로 나열된 사건과는 전혀 다른 사건이 되어 있을 것이다. 이렇게 전달된 사건은 이제 이 사건을 전달 받은 이의 몫이 되었다. 누군가의 생각과 느낌은 해석이 필요하다. 그 해석은 그 사건을 전달 받은 이의 몫이다. 그렇게 역사는 사건(또는 사실)과 해석을 기본 요소로 구성 될 수 있다. 이제 남은 건 그 전달 받은 사건을 어떻게 해석 할 것인가이다.
설령 내가 그 사건을 직접 경험했다 하더라도 나는 내가 이전에 경험한 것들을 바탕으로 그 사건을 이해(해석)할 뿐이다. 순수하게 발생한 사건에 내 생각과 내 감정이 들어가면 '나만의 사건'으로 해석된다.
에드워드 핼릿 카는 1892년에 태어나 1982년 죽었다. 이 책은 저자가 1962년에 지은 책이다. 1960년대는 '구조주의'가 많은 이들의 생각에 자극을 주고 있었을 것이다. 이 책의 '1장. 역사가와 그의 사실들'과 '2장. 사회와 개인'을 보며 구조주의의 영향을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과 함께 다음의 질문을 해 본다.
"내가 서술하고 있는 사건은 (또는 내가 전달 받은 사건은) 객관적(보편적)인가?" 이 질문이 '3장 역사, 과학 그리고 도덕'으로 이끈 것은 아닐까? 왜 과학과 도덕에 대해 이야기 했어야 했을까? 과학은 누구라도 어떤 현상을 재생, 반복할 수 있어야 한다. 역사도 그러할 수 있을까? 역사에 보편성과 객관성을 부여 할 수 있을까? '가치'로서의 '도덕'이 해석의 기준이 된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과학과 멀어지는 것은 아닐까? 과학에서의 인과관계를 가지고 사건을 서술하면 역사는 과학이 될 수 있을까? '4장. 역사에서의 인과관계'에서 이런 고민들을 이야기하려 한 건 아닐까? '5장. 진보로서의 역사'에서 이야기 하려 하는 '진보'라는 개념은 여전히 내게는 쉬운 개념이 아니다. 일관된 연관성 그리고 당위성 역시 쉽지 않지만 '6장. 지평선의 확대'를 보며 저자가 진보라는 개념을 역사에서 어떻게 위치시키고 있는지를 짐작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질문들을 가지게 되었다.
한 때 난 저자들이 책을 쓰겠다고 생각하게 된 순간, 그 순간의 단어나 문장이 무엇이었을까 생각하며 그 단어나 문장을 찾기 위해 집중하며 책을 읽었다. 물론 지금도 그런 추적은 계속되고 있지만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책을 읽고 메모를 하고 있지 않나 싶다.
또 언제 바뀔지 모르지만 지금은 지금 나름의 해석을 하고 있어 좋다. 지금의 책읽기는 저자의 글 속에서 스쳐지나가는 저자의 생각을 찾아 가는 재미가 있어 좋다.
@isnobody_y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