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작스러운 유배

왜 제가 가야 하죠

by 모험소녀

수많은 업무로 고된 시간은 계속 됐다.


아무리 시끄러워도 귓가에 또렷하게 들리는 상사의 통화에서 '오늘은 빨리 퇴근하시겠군!' 쾌재를 불렀고,

정적을 깨고 울려퍼진 전화벨, 세 번 울리기 전 받으니 모든 팀원들이 내 목소리를 듣고 있을 것만 같아 부끄러워 경황 없이 둘러댔던, 그런 눈치의 시간들도 이어졌다.


시간이 갈수록 별 수는 없었다.

'원래 회사 생활이 그런 건가 보다' 수긍하다가도,

'다른 회사는 좀 다르지 않을까?' 궁금하기도 해서, 이직에 대한 마음도 조금씩 생겨났다.



그러던 어느 날, 입사 2년 접어들 무렵이었을까.

후배가 들어와 이제 숨통이 좀 트이겠구나 싶었는데, 그것도 오래 가지 못했다.

회사에서는 요 프로젝트 수행 준비가 한창이었다. 여기에 정 부서 사람들이 투입되는 전담반(TF) 개설을 두고 얘기가 한참 오가고 있었다. 우리 팀에서도 실무자를 발령내야 했던 상황.


성수기 비수기 없이 늘 업무가 많은 우리 팀는 실무자 직급 손꼽을 정도 몇 없었다.

과장급들은 업무를 해야 하니 결국, 딱히 실무자라 할 순 없지만 그렇다고 완전 막내도 아닌 내가 지목됐다.


제가요?


처음에는 몇 시간 가서 일하고 오면 되겠지 생각했고,

갈 사람이 나밖에 없다니 '왜 제가 가야 하죠' 물을 틈도 없이 받아들였다.

하지만 '전담반'은 말 그대로 그 일에만 전념한다는 의미. 기존 업무에서는 손을 떼고, 자리도 아예 사내 별도 공간으로 옮겨서 주어진 일만 수행해야 했다.


그렇게 나는 서무를 후배에게 넘기자마자 전적인 타의로 컴퓨터를 챙겨 들고 골방으로 유배를 떠나게 되었다.

사실상 팀을 떠나 언제 돌아올 수 있을지 기약이 없었다.


다행히 다른 팀 동기 몇 명도 함께 옮겨 와 조금 위로가 됐다.

그러나 그들과 나의 물리적인 업무량 차이는 상당했다. 그들이 1이면 나는 5 정도.


매일 수많은 회의를 참석했고,

하루하루 지날 때마다 나의 회의는 짙어졌다.

수많은 엑셀 파일(이때 엑셀의 끝이 1048576번째 줄인 걸 처음 알았고 거기까지 꽉찬 파일도 처음 보게 되었다)과의 사투, 처음 보는 외부인들과의 일방향적 업무 협의, 복잡한 업무 프로세스 파악까지!


이건 내가 하기에 너무 벅찼다.

적어도 과장급 이상은 되어야 이해도 빠르고, 적절한 개선 방안을 제시할 수 있는 일이었다.

나는 그게 안 되니 무식하게 시간을 더 많이 투자했다. 업무를 독학했고 자료도 직접 손봤다. 야근의 연속과 주말 근무가 몇 달 이어졌다. 일을 '함께 한다'는 생각보다 '혼자 고군분투'하는 느낌이 나를 매일 힘들게 했다.


몸도 마음도 점점 지쳐갔다.

팀에서는 바쁜 업무로 '나'라는 존재를 차츰 잊어간듯 했고, 나를 복귀시킬 생각도 없어 보였다. 회사 사람들보다 외부 업체 사람들이 더 인간적으로 느껴졌다. 사실 그게 더 서글펐다.


그리고는 곧, 독기와 분노가 잔뜩 올랐다.

한때 생각만 했던 이직에 대한 의지에 스파크가 터졌다.

다른 회사에 지원하려면 영어 점수가 필요하니 극심한 업무에 시간도 없는데 굳이 TOEIC 새벽반을 끊었다.

그때 처음 알았다. 시간은 역시 없을수록 더 만들기 쉽더라. 나도 참 독했다.


정신적 스트레스는 더했다.

은 일대로 잘 해놓고 그 책임과 비난은 다 나에게 돌아와, 매일 아침 출근이 두려웠다.

정말 그만두는 것이 맞겠다는 생각이 최고조에 달할 즈음,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팀에서 나를 불러들였다.


다행히 팀 원래 자리로 돌아왔지만 내 맘은 이미 예전과는 너무나라져 있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속만 앓던 나에게도

입을 열 수 있는 에너지가 충분히 채워져 있었다.


Point4. 업무에 대한 의사 표현을 명확히 하자!

회사에서 요구하는 일은 상식선에서 해결할 수 있는 것들이 많다. 그 선을 벗어난 일이 주어진다 해도 아직 직급이 낮은 위치라면 그 일을 완벽하게 수행해내지 못해도 괜찮다. 어려운 지시사항에 대해 상사에게 원하는 포인트를 구체적으로 물어보고, 중간중간 진행사항 점검을 받는 식으로 진행하면 된다. 그게 최선이다. 정말 내 역량으로 커버할 수 없는 일이라면 평가를 두려워 말고 차라리 못하겠다고 미리 의사를 전달하자. 단, 그 이유는 상사가 납득할 만한 것이어야 한다. 이유가 타당하다면 상사(물론 합리적 사고의 상사여야 가능한 일)는 그 이유를 불식시킬 만한 대안을 제시해 주거나, 나보다 더 적합한 직원에게 해당 업무를 지시할 수도 있다. 괜히 벅찬 업무를 아무 말 없이 받아와 쩔쩔 매고 시간만 끌다가 뒤늦게 팀원 모두가 투입되는 해프닝은 만들지 말자. 최대한 민폐가 되지 않으려면 사전에 못하겠다고 알려주거나 다른 팀원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이 좋다. 나는 전담반 일이 벅찼는데도 꾸역꾸역 업무를 받아 하며 물리적 거리와 심리적 어려움 때문에 중간중간 팀과의 커뮤니케이션을 거의 하지 못했다. 미리 나의 버거운 상황을 상사에게 알리고 인력이나 업무 지원을 받았더라면 그에 대한 책임과 비난의 무게는 조금이나마 분산됐을 텐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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