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길을 거쳐 지금은 새로운 일을 맡게 되었고 러시아를 알리기 위한 정보성 콘텐츠를 하나씩 쌓아가고는 있지만,
언제부턴가 삶의 피로 때문에 온전한 나의 글은 쓰지 못했다. 이제는 내가 겪었던 러시아 이야기를 하고 싶어졌다.
러시아 생활을 해본 사람이면 누구나 모험담 하나씩은 있는 법.
나 또한 그곳에서 지낸 짧지도 길지도 않았던 시간 동안 온갖 일들을 겪었고,
그런 경험들이 쌓여 인생을 살아갈 힘이 되었다.
지난 날을 기록하며 '내가 이런 일도 겪었는데 지금은 아무 것도 아니야'하며 지금의 삶에 용기를 얻고자,
동토의 땅에서 있었던 주요 에피소드를 끄집어내고 싶은 마음이 문득 들었다.
책상 속 오랜 일기장이 있다. 글자들로 빼곡하다.
러시아에서 지내며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썼던 일기다.
마치 지하생활자의 수기처럼 극도의 절박함이 느껴지는 문구들. 한 번 펼치면 멈출 수가 없다.
암울했던 시기에 썼던 일기에는 주옥같은 명언들로 가득하다. 한창 싸이월드를 하던 시절 타지에서 남긴 다이어리도 애틋하거나 뼈 때리는 말들이다.
왜 러시아에서 유명한 작가가 많이 탄생하는지, 왜 사람들이 위기의 때 작품을 쓰게 되는지 알게 해주는 대목이다.
삶의 끄적임들 in 모스크바
삶의 끄적임들 in 블라디보스토크
길지 않은 나의 러시아 생활은 크게 둘로 나뉜다.
교환학생 신분으로 모스크바 대학교에 공부하러(놀러) 간 호시절 PART 1,
그리고 회사에서 파견되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멋모르고 근무한 청춘의 덫 시절 PART 2이다.
한 번은 배고픈 학생 신분으로, 다른 한 번은 젊은 주재원 신분으로 갔던 러시아에서의 생활은 사회적 지위나 경제적 사정이 절대적으로 달랐다. 거주 지역도 수도와 변방, 극과 극이었으니 환경도 천지 차이였다. 그렇다고 풍족했던 주재원 때가 더 행복했다고 이야기하지는 못하겠다.
한국에서는 잘 쓰지도 않는 일기를 두 번의 러시아 생활 중에는 매일 썼던 걸 보면,
잘 살아봐야겠다는 삶에 대한 의지가 강했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라는 공간에서 벌어지는 일들, 순간의 기록들을 매우 가치있게 여겼나보다. 나중에 언제라도 보면서 '러시아는 나에게 이런 곳이었지' 되새길 수 있도록 말이다.
나는 학생시절 러시아에 대한 첫 기록이 나쁘지 않아서 러시아 일기를 한 번 더 쓸 수 있었던게 아닐까.
유학 생활의 기억이 별로 좋지 않거나, 그곳에 애정이 별로 없는 이들은 당시 대학 졸업 후 러시아와 멀어지는 게 대부분이었다. 전공을 살려 입사해 러시아에 다시 간 사람은 주변 사람들 통틀어 나는 손에 꼽힐 정도였다.
그 당시 우리 세대가 경험한 러시아는 지금처럼 좋은 곳은 아니었으니, 그들의 선택이 그때는 당연했던 것 같다. 그냥 내가 좀 유별나고 특별했던 걸로 생각한다.
물론 러시아에서 지내며 좋은 기억만 있는 건 아니다.
미운정 고운정 다 쌓였지만, 지금까지도 기억이 생생한 미운정이 그렇게도 무섭더라.
러시아에서 좀 제대로 살아보겠다고,
내 앞에 벌어진 상황들을 어떻게든 이겨먹으려 했던 적이 참 많다.
그냥 두 눈 질끈 감고 빨리 지나갔으면 하는 순간들도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적응하면서 나는 서서히 깨닫게 되었다.
러시아는 내가 이겨야 할 대상이 아니라, 내가 스며들어야 할 바탕이라는 사실을!
그렇다. 러시아에서 나는 외국인 신분이다.
어느 때고 이상하거나 어려운 상황을 맞닥뜨리게 되는 건 당연한 일인 것이다.
러시아는 내가 앞으로 계속 함께 해야 할 동반자인데, 왜 굳이 내 방식대로 고치려고 했던 것일까.
그냥 내려놓고 그들의 방식대로 기다리고 따르면 되는데 말이다. 모두 한국식으로 해결하려 하니 힘든 것이었다. 살아가려 애쓰기보다 그냥 살아지도록 두는 것.이 사실을 알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물론 막상 닥치면 똑같이 반응하게 되긴 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