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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동토 생활의 기록
03화
PART1-② 행정 지옥의 굴레
문서, 서류, 증명서를 가져오라! 그럼 널 살게 할 것이니..
by
모험소녀
Feb 23. 2021
이곳이 러시아인데, 학교에서 아무 대가 없이 그냥 살도록 둘 리 만무했다.
첫 날은 첫 날이라 임시 허가를 받은 것일 뿐.
다행히 현지 학생들 도움을 받아 기숙사나 학교, 건물 안 출입을 위한 학생증과 통행증(пропуск) 발급은 마쳤다. 반년짜리지만 거주지등록(регистрация)도 무사히 받아냈다.
순조롭게 다 끝났겠거니 싶었다. 주변의 도움을 받은 덕분에 이제 지내는데 별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러시아의 행정 지옥은 그 때부터 출국 전까지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어느 날,
수위 아저씨(дежурный '지주르니')가 찾아왔다.
완벽하게 알아듣진 못했지만, 기숙사 날짜가 오늘까지라 출입허가서(направление)가 필요하다는 것 같다.
뭔가 싶어 어리둥절하고 있는데 마침 무서운 관리인 아줌마(администратор '아드미니스뜨라떠르')가 오더니 다른 사무동에 가서 출입허가서를 받아와야 한단다.
하지만 사무동에 갔더니 학교의 '통지서(приказ)'가 없으면 안 해준다고 할 뿐. 퉁명스럽기만 해서 더 물어보지도 못했다.
그때부터 우리 일행은 종이 쪼가리를 받으려 이곳저곳을 찾아다녔다.
"
여긴 행정 처리니 뭐니 모두 다 복잡하다.
느리기까지하고, 사람에 따라 또 불친절하고
!"
- 2004.3.1 나의 모스크바 교환학생 일기
하지만 금방 끝날 일은 아니었다.
워낙 분업화가 되어 있어 한 곳에서 업무가 일사천리로 처리되지도 않는데다,
우리 모두 러시아어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은 초기라서 매일이 우여곡절의 연속이었다.
뭘 물어봐야 하는지, 상대방이 뭐라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으니 통역을 대동해야 했는데,
서로 시간 맞춰 다시 오면 또 다른 곳에 가서 업무를 처리해와야 했고,
처리하고 오면 행정실 아줌마는 내일 다시 오라는... 그런 식이었다.
내일 다시 오세요
문제가 단순히 풀리지 않는 이유를 알아내는데도 시간이 걸렸다.
사무동에서 얘기하는 '통지서'는 우리를 초청한 기관에서 받아와야 하는 것이었는데,
우리의 초청기관은 수업을 제공하고 있는 인문대가 아니라 시내에 있는 아시아 아프리카 대학이었다.
거기까지 왔다갔다하려면 시간이 꽤 걸린다. 이 사실을 알아내는데만 반나절이 걸렸고 부리나케
해당 대학에
다녀왔지만, 정작 기숙사비 입금 확인이 안 된다며 당일 발급은 어려웠다.
급하게 한다고 될 일도 아니었던 거다.
'러시아니까'
잘 해결했다 해도 거주지등록이 반년짜리였기 때문에 몇 달 후에 같은 절차를 또 밟아야 했다.
행정 처리를 위해, 사인 하나, 도장 하나 받아내기 위해 1년에 여러 번 기나긴 줄을 서서 기다리는 건 기본.
사무동 사람들은 불친절한데다 일도 느리고. 또 왔다갔다를 몇 번을 해야 하는지 모른다.
도대체 그 종이 쪼가리가 뭐라고!!!!
"
처음 갔던 7번방에서는 내 이름이 목록에서 70번째.
중간 점심시간까지 있어서 떠돌다가 겨우 차례가 되어 들어갔는데 사인 하나 띡 해주고, 그거 갖고선 이젠 10번방. 여기서 내 차례는 26번.
근데 이놈의 아줌마가 워낙 일을 느리게 해서 한참 기다려 들어갔다. 갔다가 다시 16번방. 거기서 기숙사비 용지와 문서를 받아 다시 10번방.
기숙사비 용지에 사인 받으러 이방, 저방, 사람들 들뜷는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다 받아내어 결국 거의 6시간 만에 출입 허가서, 통행증, 기숙사비 영수증까지 모두 받아냈다. 징하다. 기다리는데 완전 지쳐버렸다
!"
- 2004.6.29 나의 모스크바 교환학생 일기
통행증과 학생증
한 번은 학생증을 분실해서 통행증을 재발급하러 또 사무동 지옥으로 행차해야 했는데,
솔직히 몇 시간씩 기다릴 엄두가 안 났고 냉랭한 그들의 응대에 내 멘탈이 무사할까 싶어 쉽게 발길이 떨
어
지지 않았다.
그런데 현지에 오래 거주하신 분들의 조언을 듣고, 나도 한 번 시도해 보기로 했다.
초콜릿을 사들고 가면 처리를 좀 빨리 해줄 거라는 거다!
그래서 대놓고 큰 초콜릿을 들고 갔었다.
좀 웃긴 상황이었지만, 결론적으로는 효과가 있긴 했다. 행정원 대부분이 여성이라 내가 남자였으면 더 잘 먹혔을지도 모르겠지만.
"
통행증 재발급도 조마조마하며 혹시 몰라 초콜릿을 하나 사들고 갔다.
근데 내가 처음에 들어가면서 다짜고짜 줄 땐 안 받더니, 신청서 써주고 나중에 내가 7번방에 갔다가 다시 왔을 땐,
"초콜릿 어딨나요?(Где ваш шоколад?)" 라고 묻는 게 아닌가.
안 받길래 가방에 넣었구먼, 오히려 그걸 찾다니. 설마설마 했는데 참 웃긴다.
그래도 근무시간 끝나고 계속 일하는 거여서 봐준다.
근데 웃기잖아, 마치 노렸던 것처럼!!
!"
- 2004.7.6 나의 모스크바 교환학생 일기
또 당시에는 학생 비자가 단수로 나와서 해외로 가려면 미리 출국비자 신청이 필요했다. 모든 것이 행정의 연속인 셈. 특히 방학 시즌이 다가오면 수많은 중국인이 비자 신청을 위해 사무실 앞이 인산인해를 이루는지라,
나는 거기에 끼기 싫어 애초에 유럽 여행은 접었다.
아무튼
행정은 지옥이었다
.
기다리고, 헛걸음치고, 서류 잘못 썼다고 반려당하고...
잊을만 할 때면 이런 날들이 불시에 찾아왔다.
러시아어가 트이지 않던 시절, 행정 사무원 언니와 아주머니들로부터 당한 수모는 수만 트럭도 더 될 거다.
그런데, 유일하게 일사천리로 행정이 해결된 일이 있었다.
한국 돌아갈 즈음 하루만에 어학인증서를 받아낸 당시 상황은 진짜 지금 생각해도 미스테리다.
"
처음엔 러시아 와서 되던 일도 안 되더니, 막판 되니까 안 되던 일도 된다
."
- 2004.12.29 나의 모스크바 교환학생 일기
그렇다. 이것이 바로 러시아다!
Это Россия! 에따 라씨야
대가 없이는 직인도 없다?!
★ 게재한 모든 사진들의 저작권은 저자에게 있습니다:) Copyright by 모험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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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
러시아
교환학생
Brunch Book
러시아. 동토 생활의 기록
01
러시아는 이겨야 할 대상이 아니다
02
PART1-① 첫 러시아 입성, 모스크바
03
PART1-② 행정 지옥의 굴레
04
PART1-③ 손님놀이와 쥐의 상관관계
05
PART1-④ 생쥐 소탕작전
러시아. 동토 생활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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