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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월의거북 Nov 11. 2018

내게 무슨 일인가 있나 봅니다

# 신호탄

꿈은 나에게 신호탄이다.

"지금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어, 그걸 왜 몰라 이 멍청아!"라고 외치는. 


27살에 남자 친구와 헤어지고 난 후 심리상담을 받으러 갔다.

지나치게 감정 표현을 자제했던 내 모습이,

남자 친구 입장에서는 힘들었다고 한다. 

"너는 내게 한 번도 좋아한다,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어"라고 말하는 남자 친구.

당신 앞에선 내 감정, 내 생각에 대한 말들이 목에 탁 걸려 

죽어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던 내 처지.

이해해 달라고 할 수도 없어서, "그래, 나라도 나 같은 사람 힘들겠다" 하며 헤어졌다.

그렇다면 난 왜 감정표현이 힘든 걸까? 

보고 싶다, 라는 말 한마디를 하는 데에도 왜 중력을 거스르는 듯한 엄청난 에너지와 용기가 필요한 걸까.

-라는 풀리지 않는 문제를 들고 상담실 문을 두드렸었다. 


상담을 통해 알게 된 것은, 내가 감정 절제를 넘은 '감정 억압'수준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예민하고 감정적인 편이라 항상 이런 나 자신을 불편해했었는데

그로 인해 지나치게 감정을 배척해 온 결과일까. 


그래서 나는 뭔가가 내 안에 쌓일 대로 쌓여서, 비이상적인 방법으로 폭발하거나 

와장창 무너져 버리기 전에는 잘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래서 종종

정신적 스트레스로 인해 몸의 일부가 제기능을 못하게 되거나

왜인지 이유를 알기 전에 뜬금없는 상황에서 눈물이 터져서 당황하는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위험' 상황에서는 

특정한 꿈을 꾸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좀비 꿈

그중 하나는 좀비 꿈이다.

예전에 방송일을 하면서 심리적 압박감도 심했는데

일을 하는 기간에는 심심찮게 좀비 꿈을 꿨다. 

좀비들이 몰려오고, 나는 도망가고. 살아남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단순한 내용인데

때마다 좀비가 업그레이드되거나, 내 무기가 업그레이드되거나 하여 꽤나 다양한 방법으로 

좀비들과 격투를 벌였다. (매번 악몽이었지만)

그렇게 몇 개월간 좀비 꿈을 꾸다가, 

신기하게도 프로그램을 마치고 몇 개월간 쉬는 동안은 좀비 꿈을 꾸지 않았다. 


그래서 알게 된 것은, 내가 심리적으로 큰 스트레스를 받고 있을 때 

좀비 꿈을 꾸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 후 직종을 바꾸면서 

이전보다 규칙적인 생활 패턴 속에서 편안한 마음으로 일을 하게 되니

자연스럽게 좀비 꿈도 잊혀갔다. 


그런데 며칠 전, 정말 오랜만에 좀비 꿈을 꿨다.

지금까지 꿨었던 좀비 꿈과의 차이점은, 좀비의 형상이 무척 자세히 보이고 

내가 대적하기엔 너무 빠르고 강했다는 것이다. 

공포였다. 

내가 일하는 학원 건물 4층까지 좀비들이 차 올라 5층에 갇힌 꼴이 되었다.

나와 함께 살아남은 생존자들이 5층에 머물고 있었다.

그리고 5층 문 열쇠를 가진 남자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바깥 상황을 보고 오겠다며 4층으로 내려갔다.

나는 안다. 저 남자는 돌아오지 못할 거라는 것을.

그렇다면 저 남자 손에 들린 열쇠는? 좀비들이 저 열쇠로 문을 열지는 못할 것이다.

아마도 저 남자는 열쇠를 쥔 채로 죽을 것이다. 착한 사람이었는데 안타깝다. 

아래층으로 내려갈 수 없다면 이곳에서의 비상구는 오직 창문뿐이다. 

좀비들이 들이닥친다면 나는 뛰어내릴 것이다. 그게 더 살 확률이 높다. 

이대로 있으면 죽는다.

나는 두려움을 느꼈다. 


꿈에서 깬 후에도 그 공포감이 내 온몸에서 한동안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한동안 안 꾸던 좀비 꿈을 왜 꿨을까. 

나는 지금 위태로운가.


# 사투

요즘 강박적으로 운동에 매달리고 있다.

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너무 피곤하지만, 그대로 무거운 몸을 이끌고 운동을 간다.

운동을 하는 동안은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을 수 있어서 좋다. 


여느 날처럼 오늘도 오전에 체육관에 들려서 운동을 하고 학원으로 출근했다.

그리고 작은 문제가 생겼는데, 한 학생이 실수로 연습실을 나오면서

잠금 스위치를 누른 상태로 문을 닫아버린 것이다.

연습실 안에 학생의 가방이 있는 상태로 문이 잠겨버렸다. 

학생이 나를 찾아와 도움을 청했다.

닫힌 문을 열기 위해 연장도 동원해보고, 

기술자(를 자칭하는 학생들)의 도움도 받아보았지만 잠긴 문은 열리지 않았다.

열쇠도 없고, 힘으로 열 수도 없어서 고심하고 있을 때

상담을 마친 원장님이 등장했다. 

"이건 뜯어내는 것 밖에 방법이 없겠는데?"

그렇게 원장님이 연습실 문 손잡이를 깔끔하게(?) 뜯어내면서 일이 마무리되었다.

그리곤 내게 나무라듯 말씀하셨다.

"왜 혼자 끙끙거리고 있었어, 나한테 말을 하지!" 


근데 무척 당황스럽게도,

원장님의 그 말에 나도 모르게 울컥. 눈물이 나올 뻔했다.

왜 혼자 끙끙거리고 있었냐며, 누군가 다그쳐 물어주는 것이 고마웠던 걸까.

여기서 눈물을 보이면 진짜 난감한 상황이 될까 봐

웃긴 생각 하면서 겨우 눈물을 참았다. 


# 이유

이 일이 있고 나니, 내가 좀비 꿈을 꾸게 된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나는 요즘 혼자 사투를 벌이고 있다. (라는 사실을 겨우 인정했다)


최근에 사명감을 갖고 해야 하는 무게감 있는 일이 맡겨졌고,

시간의 압박을 느끼면서 그 일을 해나가고 있었다.

잠드는 시간은 새벽 2~3시였고, 아침에 일어나면 그 조급함과 부담감을 해소하고자 

격한 운동으로 몸을 혹사시켰다. 그리고 급한 발걸음으로 출근하고, 

집에 돌아오면 또 새벽 2~3시까지 작업을 했다. 

거기에, 팀의 리더가 되면서 혼자 판단하고 해결해야 하는 일들이 생겼고,

이 모든 일을 내가 오롯이 혼자 해내야 하는 일이라 여기고 

그로 인한 피로감과 불안감을 무시했다.

"왜 혼자 끙끙대고 있어, 나한테 말을 하지!"

그 말에는, '너 지금 혼자 애쓰고 있는 거 내가 알아'라는 인정의 언어와

'그런데 그러지 않아도 돼'라는 위로의 언어가 함께 녹아있다.

그래서 그 순간 울컥했나 보다.


이번에도 좀비 꿈은 내게  무슨 일인가 일어나고 있음을 알리는 경고의 신호탄이었다.


스스로 자신의 마음을 알아채고 위로해 준다면,

그것만으로도 마음은 한결 가벼워지고, 딱딱하던 마음이 폭신해진다. 


그럼 이제 한동안은 좀비 꿈을 꾸지 않겠지?

굿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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