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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과 별과 등대 Aug 14. 2020

가을

5. 한 번도 입어보지 못 한 웨딩드레스


 여느 날과 다름없는 평범한 하루를 보내는데 고요를 깨는 핸드폰에 울리는 ‘카톡’ 알림 소리. 오랜만에 고등학교 동창에게서 연락이 왔다. 서로 바쁘다는 핑계로 연락이 멀어진 지 오래인데 ‘카톡’에 좋은 사람을 만나서 결혼을 한다는 청첩장이 들어있었다. 이제 20대에 들어 걸음마를 하는 청춘이 결혼을 선택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사람마다 생각의 차이는 있겠지만 보통의 결심으로는 젊은 나이에 가정을 꾸리는 일에는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책임을 질 준비도 어른이 될 준비도 아직은 서투르기 때문이다. 축하 메시지를 보내고 나니 괜히 마음이 이상하고 기분도 묘했다. 나도 어릴 때 결혼에 대한 약간의 환상이 있어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눴던 기억이 났다.
 중학교 운동장 구성에 놓인 벤치에서 친구들과 장난을 치다 결혼에 관한 물음에 당당하고 야무지게 답했던 가을 오후였다.
 “나는 마음이 정말 잘 통하는 사람을 만나 24살에 꼭 결혼할 거다.”
놀라서 쳐다보던 얼굴이 지금도 떠오른다. 빨리 가고 싶다는 말속에는 형편이 어려운 집이 싫기도 했고 나라도 없으면 지출이 적어지니 빚에서 조금이라도 헤어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물론 그 계획에는 대학 졸업 후라는 거창한 바람도 있었는데 23살이 된 지금의 나는 대학을 가지 못한 변변한 직장 없는 아르바이트생이다. 그나마 자리가 없으면 집에서 쉬는 일면 백수 겸 아르바이트생 일명‘백아’이다.
자의 든 타의든 현실은 절벽으로 앞을 가로막고 하루가 어려운데 결혼의 로망은 먼 나라의 다큐멘터리다. 먹기 위해 사는 건지 살기 위해 먹는 건지 헷갈리는 일상이 반복된다. 꿈을 잃어버린 날들이 청춘을 흔든다. 기꺼이 나는 흔들리는 갈대가 되기로 했다. 뽑히지만 않으면 그래도 살아갈 만하다고 스스로를 위안한다.
 언제가 될지 또 언제가 적당할지는 모르겠지만 사랑하는 사람과 차근차근 계획해서 모두의 축복을 받는 결혼식을 올리고 싶다. 이제는 나이 계산을 안 하는 걸로. 한 번도 입어보지 못한 웨딩드레스는 평생에 딱 한 번만 입고 싶다. 레이스가 길게 늘어진 드레스는 싫다. 무릎 약간 밑으로 내려오는 기장에 심플한 주름이 걸을 때 살랑거리면 좋겠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입장도 생각해 본다. 축가는 노래라면 자신 있는 언니가 해주기로 했다. 축가 선택을 잘해야 하는데 벌써 걱정이다.
 재미있다. 친구의 메시지 하나에 결혼식도 웨딩드레스도 축가도 완벽했다. 그럼 이제부터 사랑을 찾아야 하나. 아니면 백아를 벗어나야 하나. 아니지 24살이 되어야지. 아하!





 신은 공평하다. 완벽한 행복도 주지 않으며 완전한 슬픔도 주지 않는다. 그리고 행복 뒤에는 불행도 같이 주며 만남 뒤에는 이별도 함께 준다. 공평한 신의 법칙처럼 인간의 인생은 슬픔만 가득하고 행복만 전부인 삶이 없다.
 신랑과 짧은 연애를 하고 결혼을 약속했다. 짧았지만 듬직하고 우직한 모습과 열심히 일하는 성실함이 좋았다. 함께 살면 외로웠던 마음이 채워질 것 같은 강렬한 끌어당김이 있었다.
처음 신랑의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러 간 날은 바람이 불었다. 세찬 바람이 가로수 잎을 잡아당겨 아래위로 심하게 흔들렸다. 우리의 앞날처럼 허공에 가지를 펄럭거렸다. 두 분의 모습은 상상을 벗어난 충격이었다. 어머님은 장장 열네 시간에 걸친 암 수술 직후였고, 아버님은 얼굴에 나 아프다고 쓰여 있었다.  누군가 도와주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깡마른 몸이 며느리가 될지도 모르는 새로운 인연을 만나려고 위태롭게 버티고 인사를 받았다. 별다른 물음도 없이 결혼 승낙을 받았다. 그날부터 두 분의 간병을 도울 수밖에 없었다. 일을 쉬는 날이면 병원에 동행했고 입원하시고는 자주 뵈러 다니며 말동무 및 잔잔한 심부름을 맡아서 했다. 어머님은 수술 경과가 호전되어 좋아지고 있었지만 무시무시한 항암을 4차까지 견뎌야 했다. 참 다행이었다. 그런데 처음부터 말했지만 신은 공평했다.
 아버님이 어깨가 잠을 못 자도록 아파 찾아간 큰 병원에서 암 진단을 받았다. 의사의 말로는 급성 폐암이라 했다. 기가 막혔다.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데 살면서 처음 가까운 사람과의 이별을 마주하니 혼란이 왔다. 이제 막 잔정이 들어 며느리 사랑은 시아버지라고 동네에 손잡고 다니며 자랑했는데 짧은 만남 뒤에 긴 이별을 어찌해야 할까! 진단을 받기가 무섭게 급속도로 악화한 건강에 요양병원으로 옮겼다.
힘든 암과 싸움은 한 달이 안 되어 아버님이 백기를 들었고 하늘로 떠나는 여행자가 되었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오후. 신랑이 교대로 점심을 먹으러 간 사이 마지막 숨을 길게 토했다. 아무 말 못 하고 그윽이 바라보는 눈에서 나는 알았다. 생의 끝에서 내뱉는 유언이라고.
 “아버님, 사실은 뱃속에 손주가 생겼어요.”
가늘게 떨리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감겨가던 눈에서 떨어지던 두 줄기 눈물은 나에게 전한 감사의 말이었다. 밤새 비는 서럽게 쏟아졌다. 빗소리보다 크게 울었다. 비는 다음날도 그치지 않았다.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일이 가슴에 구멍이 생긴다는 걸 당신을 보내고야 알았다.
 시댁 식구들은 장례식에 오지 말라고 했다. 임신 중에 오는 거 아니니까 집에 있으라 했다. 하지만 말 안 듣기로는 전국에서 소문난 나는 중요하지 않았다. 배속 아이도 당연히 할아버지를 봐야 하고 나도 마지막 가는 길에 인사를 하는 것은 도리고 존경이고 며느리의 모습이라 생각했다. 인사를 올리고 잠시 앉아 있다가 돌아와야 했지만, 아버님의 영정사진과 새벽까지 눈을 마주치다 왔다.
 집에 돌아와 잠시 눈을 붙이는데 꿈에 아버님이 나왔다. 비가 오는 밤이었고 아버님과 어머님은 나란히 산책하러 다녀오신다고 나갔다. 한참 후 흠뻑 젖은 몸으로 아버님이 쓰러진 어머님을 안고 왔다. 비가 오니까 비 그치면 나오라며 먼저 나간다고 하고 대문을 나갔다. 나간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다 꿈을 깼다. 그 꿈을 마지막으로 아버님은 다시 꿈에 나오지 않았다. 신기하게 어머님의 몸은 눈에 띄게 많이 호전되었다. 아마도 아버님이 가면서 어머님의 병까지 가져간 것이 아닐까.
 큰일로 인해 결혼식을 잠시 미루기로 했다. 그 사이 아이가 태어났고 육아에 정신없이 집중하고 보니 아이는 네 살이 되었고 우리의 찬란한 웨딩은 풀어야 하는 숙제로 남았다. 이제는 미루었던 숙제를 할 때가 되었다. 지금 하지 않으면 시간은 기다림 없이 흐르고 그 속에서 우리는 늙어갈 것이다. 더 늙어 볼품없어지기 전에 꿈꿔오던 아름다운 순백의 신부가 되려 한다. 출산선물로 받은 무거운 살들과 가랑잎처럼 가벼운 지갑 사정에도 불구하고 식을 준비하려 한다. 일생에 한 번뿐인 눈부신 젊음을 사진으로 기억하고 신랑에게도 나에게도 멋지고 예쁘던 시절이 있었음을 증거로 남기고 싶다. 그리고 아버님의 따스한 온기가 남아 있는 사진 옆에 나란히 놓고 싶다. 듬직한 아들과 부족하지만 웃음이 많은 며느리 뱃속 생명의 울음소리조차 들어보지 못했던 손녀의 활짝 웃는 사진도 함께 두고 싶다. 아픈 이별 뒤에는 행복한 만남이 온다. 그리고 행복 뒤에는 또 다른 아픔이 있을 것을 안다. 알면서도 살아가고 있음은 그 아픔 뒤에 또 행복이 온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가을바람 선선히 불어오고 햇볕이 따스한 어느 날. 살찐 몸에 어울리지 않는 새하얀 웨딩드레스를 입고 나름 시월의 신부로 축하를 받으리라. 나만을 바라보는 턱시도를 입은 신랑이 손을 잡아주겠지. 흐르는 음악을 따라 꽃길을 걸어 앞으로 함께 걸어가면 화려한 레이스의 웨딩드레스가 나비의 날개처럼 날아오른다. 상상만 해도 기분이 참 좋다.





 딩동. 휴대전화 문자메시지의 알람이 울렸다. 누가 보냈는지 확인했더니 지인의 딸이 결혼식을 한다는 청첩장이었다. 세상이 워낙 좋아져 발품을 팔아 집마다 청첩장을 전달하거나 우편으로 결혼 소식을 알려야 했던 시절은 먼 나라 이야기가 되었다. 요즘은 휴대전화의 편리함과 신속함을 빌려 집안의 대소사를 사람들에게 전한다.
 결혼식. 가을이면 하얀 레이스가 반짝이는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가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잡고 세상에 행복한 웃음을 보낸다. 아무리 못생겨도 이날만큼은 동화 속 공주보다 아름답고 첫출발이라는 무대의 주인공이고 충분히 축하받아야 하는 눈부심이다. 가슴 설레는 가을의 신부는 상상만으로 기분이 좋아지고 심장이 쫄깃한 부러움이다.
 나는 결혼사진이 없다. 굳이 변명을 하자면 집안의 반대로 사랑 하나만을 쫓아 선택한 삶에 가난이 팔십 퍼센트 아이가 이십 퍼센트였다 하고 싶다. 그러나 진실은 내 선택이 자신이 없었기에 망설이고 흔들렸다.
처음 좋아했던 순수하고 거짓 없는 털털한 모습과 달리 그 사람은 까도 까도 계속 나오는 양파껍질처럼 숨긴 비밀이 많았다. 동전의 앞과 뒤처럼 판이한 사람의 얼굴이 보이니 사랑에 떨렸던 심장이 서서히 감각이 없어져 갔다. 모든 일에 철저하게 가면을 쓰고 웃는다는 걸 알고 나니 소름이 돋았다. 짜인 각본대로 사는 인생은 밖에서는 자상함과 애정이 누구보다 많은 아내 사랑꾼이었고 안에서는 숨 막히는 억압과 무소불위의 독재로 절대 권력을 과시하는 폭군이었다.
 보여주기 식 완전한 사랑은 아내를 제일 사랑하고 아껴주는 로맨티시스트로 존중의 의미라며 항상 존대했다. 동네 미용실이며 재래시장은 언제나 손을 잡고 함께였다. 외식 자리는 갈비를 구워 상추쌈을 싸서 입에 넣어주며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마라며 애정을 과시했다. 주변 사람들은 좋겠다는 부러움을 노골적으로 드러냈고 가끔은 부부싸움의 원인이 우리 부부가 되는 우스운 일도 생겼다. 그러나 모두는 속았다. 밖에서는 만화 주인공처럼 멋진 모습으로 포장하고 안에서는 검은 속내를 드러내며 혼자만의 공화국을 만들었다. 완벽한 이중생활은 가까운  부모 형제도 모르는 은밀한 비밀이었다.
 우리는 흔들렸고 같은 방향을 바라보던 시선은 다른 방향을 응시하는 일이 많았고 서로의 공간에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될 수 있으면 안 부딪히려 애썼다. 십 년의 결혼을 몇 장의 여백에 어찌 다 옮길까!
살아보니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데 서로 왜 잘못이 없었을까. 일방의 고통도 일방의 상처도 일방의 목소리도 아님이 우문현답이었다. 내 입장이 억울하면 상대도 아주 답답하고 화가 난다.
아침이면 사라지는 인어공주의 물거품처럼 끝나버린 한 사람과의 만남과 헤어짐은 지독한 경험도 남겼지만, 결혼식에 대한 아쉬움도 컸다.
 “엄마가 웨딩드레스 못 입으면 딸도 그렇게 된단다. 빨리 인연을 만나 한 번이라도 입어봐. 더 늦기 전에.”
주위에서 가끔 걱정 반 부추김 반으로 술자리에서 말을 한다.
 “오십에 미쳤나. 무슨 드레스는 드레스고. 술이나 묵으라.”
가슴 밑바닥이 아릿해 왔다. 큰 딸아이가 결혼식을 못 올리고 아이 먼저 낳아 가정을 꾸린 일이 목에 가시처럼 걸렸다.
 내년에는 어른들의 말처럼 ‘딸라 빚’을 내서라도 사람들의 축복 속에  결혼을 시켜야겠다. 가을 하늘이 맑아 눈이 부시는 오후에 어여쁜 신부는 노란 은행잎이 깔린 마당을 사뿐히 걸어가겠지. 이왕이면 살도 좀 빼고. 지켜보는 내 눈에는 빛나는 웨딩드레스보다 더 고마운 딸이 사랑스러워 하염없이 바라보며 지나온 시간을 감사하겠지.
한 번도 입어보지 못한 웨딩드레스는 딸이 대신 입는 거로 대리 만족한다. 벌써 내년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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