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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과 별과 등대 Sep 08. 2020

겨울

2.#겨울



 바람이 제법 쌀쌀해지고 어둠이 빨리 찾아오는 걸 보니 겨울이 찾아왔다고 신호를 주는 게 틀림없다. 옷장에 차곡차곡 정리해두었던 두꺼운 옷들을 꺼낼 때다. 기온이 따뜻한 지역에 살다 보니 이번에는 눈이 오려나? 하는 희망을 매년 가지게 된다.

 초등학생 때 살았던 집 계단에는 겨울이면 항상 얼음이 얼었다. 집이 오래된 탓도 있겠지만 옥상에 있는 물탱크가 제 기능을 못 한 점이 원인이었다. 물이 차면 멈추어야 할 물탱크 안에 있는 볼 탑이 고장이 나 물이 밖으로 흘러넘쳤다. 여름에는 그냥 계단을 타고 흐르는데 겨울이면 낮아진 기온에 밤사이 얼어버려 빙판 계단으로 변했다. 등교를 하려면 손에 힘을 불끈 쥐고 난간을 잡아야 했다. 한 발 한 발 천천히 내려가도 똑같은 위치에서 꼭 미끄러졌다. ‘이번에는 절대로 넘어지지 않겠어!’ 마음속으로 다짐을 하고 혼자만의 싸움을 해보지만 위험 구간에 발을 올리자마자 아니나 다를까 미끄러지고 말았다. 너무 크게 넘어져 엉덩방아를 찧기도 하고 어떤 날은 손을 먼저 짚어 상처가 나기도 했다. 겨우내 엉덩이에 몽고점만 한 커다란 멍이 생겼다. 엄마에게 이사를 하자 말하고 싶었지만 갈 수 없는 형편을 알기에 투정을 부리지 못했다.

 매번 아픈 엉덩이를 부여잡고 학교를 갔다. 하굣길은 그나마 오후의 기온으로 얼음이 녹아 다리에 힘을 주면 안 미끄러지고 계단을 올라 집에 무사히 도착했다. 친구들과 놀고 싶어도 데리고 올 수가 없었다. 잘못해서 넘어지거나 다치기라도 하면 수습이 불가능하니 나에게 겨울은 엄마를 기다리는 외로움의 시간이었다. 차가운 바람이 불수록 얼음의 두께는 더 두꺼워졌고 빨리 겨울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마음은 조급했다.

 주인집을 찾아 몇 번을 고쳐달라 부탁했지만, 알아서 하라는 매몰찬 답을 듣고 돌아서던 엄마의 얼굴은 하얗고 창백한 겨울 밤하늘의 차가운 달처럼 보였다. 이상하게 눈물이 났었다. 지금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엄마, 내가 빨리 커서 돈 많이 벌어 큰 집 사줄게. 걱정하지 마.”

아무 말 없이 머리를 쓰다듬던 손길이 기억이 난다. 가슴에 안아주던 품에서 좋은 향이 나서 한참을 안겨 있었던 그 날이 뭉클하다.

 얼마 후 우리는 그 집을 떠나 이사를 했다. 얼음이 녹아 한 방울씩 마당으로 떨어지던 봄날이었다. 냉랭했던 겨울은 다시 봄 속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었고 아픈 기억은 서서히 잊혀갔다. 멍으로 힘들었던 엉덩이는 다시 깨끗해졌고 시간을 따라 몇 번의 겨울이 흐르고 흘렀다.

지금은 둘러앉아 그때를 추억하며 웃을 수 있고 한번 찾아가 볼까 하는 생각도 한다. 아직 엄마에게 약속한 집을 못 사주었다. 사주고 싶은데…… 아직 시간이 있으니.     





(부제: 흥보가 기가 막혀 _ 어느 곳으로 가오리까? 이 엄동설한에)     


 몇 년 만에 찾아온 한파는 온화한 동네의 정적을 깼다. 겨울이 와도 눈 구경하기 힘든 지역에 갑자기 찾아든 눈바람과 거리를 얼어붙게 하는 추위는 말 그대로 비상이었다.

 딸이 태어난 해 겨울. 번화가 상가주택에 살았다. 주변이 시끄럽긴 해도 아래 두 집이 상가라 아이가 크게 울어도 뭐라 하거나 눈치 주는 사람이 없어 마음이 훨씬 편했다. 며칠 전부터 심상치 않은 바람이 괴물 소리를 내며 울부짖더니 기어이 우리가 사는 편한 집을 꽁꽁 얼려 버렸다.

 겨울은 이런 것이다. 존재감을 앞세우며 기세 등등한 바람이 동네의 상수도를 전부 마비시켰다. 한 집 두 집 피해가 생기더니 우리가 사는 건물도 속수무책으로 피해를 보았다. 보일러가 제 기능을 못 하니 뜨거운 물은 다른 나라 이야기고 밤에는 이불을 몇 겹으로 깔아도 발이 시렸다.

아이는 추위에 자가 깨다를 반복하며 울어 밤새도록 초조하게 지켜봐야 했다. 그런다고 건물 밖에 있는 수도관을 녹일 방법도 없고 또 녹인다고 해도 추운 날씨에 다시 얼 것이 분명하여 조물주 위에 있다는 건물주님도 겨울의 심술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 다급함에 야간 근무를 하는 신랑에게 상황을 알리고 5개월 된 딸을 안고 일단 피난 짐을 쌌다. 기저귀에 분유, 여분 옷과 물티슈 등 챙길 것이 너무 많아 여행 때도 안 쓴 여행용 가방을 꺼내 동분서주했다. 아무것도 모르고 품속에서 머리를 들고 엄마의 바쁜 움직임에 그저 해맑게 웃는 모습에 기가 막혔다. ‘아 이 어린 자식과 나는 어디로 가오리까!’ 귓가에 ‘흥보가 기가 막혀’의 가사가 자동 재생됐다.

 친정집은 커다란 반려견을 키우고 있어 갓난아기와 지내기 어려웠다. 숙박업소를 가자니 행여 큰 울음소리에 쫓겨날까 걱정스러웠다. 고민 끝에 독립 중인 동생에게 상황설명을 하고 도움을 청했다. 빨리 오라며 집 앞까지 마중을 나와 주어 고마웠다. 겨울밤은 집을 버리고 나온 모녀를 다시 다른 집에서 보내게 했다. 지쳤는지 품에서 내린 아이는 이불에 눕히기 무섭게 잠이 들었다. 긴장이 풀렸는지 그냥 주저앉아 긴 한숨을 쉬었다. 처제가 사는 집이라 신랑은 못 오고 물도 안 나오고 보일러도 안 되는 차가운 집에서 전기장판과 두꺼운 이불로 수도가 녹기를 기다렸다. 불편함보다 불청객으로 감기가 찾아와 기침으로 고생을 했다. 나와 아이 역시도 불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동생은 동생대로 자신만의 공간에서 잘 살던 일상에 5개월짜리 객식구는 처음에는 반가웠지만, 시간이 갈수록 보통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었다. 두세 시간 간격으로 목 놓아 울고 분유 타기에 기저귀 갈기며 돌보는 일이 평범한 일상을 송두리째 흔들었다. 잠투정을 소프라노로 할 때는 엄마보다 더 신경을 썼고 며칠 사이 다크서클은 턱 밑까지 내려왔다. 원룸 사람들의 투덜거림이 복도를 따라 들렸다. 더 폐를 끼치는 게 미안해 수도가 고쳐졌다고 대충 둘러대고 짐을 싸서 나왔다. 가족이라도 결혼을 하고 나니 마음이 예전 같지 않음을 그때 알았다. 괜히 짐이 된다는 생각에 미안하고 신랑은 신랑대로 고생한다는 마음에 편치 않았다.

 그 후 신랑과 함께 숙박업소에서 불안한 하루를 지냈고 또 하루는 시댁에서 새우잠을 잤다. 그렇게 일주일을 떠돌이 방랑자로 보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야속한 겨울은 미안하다는 말도 없이 바람과 함께 사라지고 없었다. 거리는 언제 추웠냐는 듯이 연인들이 서로 손을 잡고 걸었고 골목마다 붕어빵과 어묵은 바쁘게 팔렸다.

 일주일을 주인 없이 추위와 싸웠던 집은 다시 보일러의 도움으로 온기가 돌았고 건물주의 과감한 결단으로 수도관을 감싸서 동파를 예방하는 공사를 했다. 부모가 되어 맞은 첫겨울은 생존이었다. 혼자라면 못했을 일을 가족이었기에 아니 엄마이기에 무사히 해냈다.  자식을 위하는 엄마의 마음을 조금 알아가며 당신이 우리에게 주었던 사랑을 깨닫는다. 겨울이 깊어 갈수록 더 그립다.





(부제: 노래방과 홍길동의 후예)     


  손등에 내려앉은 겨울이 매서웠다. 서둘러 장갑을 끼고 약속 장소로 향했다. ‘오래 안 만나서 얼굴 잊어버리겠다며 역전의 용사들아 모이자.’를 외친 친구의 제안으로 급히 마련된 자리였다. 술을 먹을 것이 분명했기에 택시를 탔다. 밖과 안의 기온 차로 안경에 희뿌옇게 김이 앉았다. 습관처럼 안경을 벗어 윗옷을 뒤집어 뿌연 안경알을 닦았다. 알을 닦는 몇십 초의 시간은 온통 흐린 세상이었다. 초점이 맞지 않는 거리에 흔들리는 네온사인 간판들이 불안했다. 추위에 움츠러든 사람들이 옷깃을 여미는 소리가 낙엽을 태우는 소리처럼 타닥타닥 들렸다. 종종걸음에 갈 길이 바쁜 뒷모습에 내려앉은 계절은 시린 바람처럼 차가웠다. 안경을 다시 쓰니 돌아온 저녁 풍경은 포장마차에서 퍼지는 뜨끈한 연기였다. 옹기종기 모인 손마다 들고 있는 어묵은 일종의 여유였다. 하루를 마감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출출함을 잠시 달래어 줄 따뜻한 어묵 국물이 주는 보상은 나를 위한 위로였기에 자꾸 눈길이 갔다.

 약속 장소에 도착하니 먼저 와서 기다리던 분들이 고기를 굽고 있었다. 자리에 앉으면 바로 먹을 수 있게 배려하는 마음이 전해왔다. 미뤄 왔던 이야기들이 안부 인사로 스쳐 가고 한 잔씩 술잔이 비워졌다. 흔한 사연들이 만나면 소식이 되고 친구의 일은 내 일이 되어 직장 상사 욕도 함께하고 집안일도 털어놓으며 알코올 기운에 목소리도 점점 커졌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노래방 가자. 콜!”

옆에서 아이 교육 문제로 고민을 하던 나이보다 늙어 보이는 친구의 제안에 전부 용기 있게 ‘고’를 외쳤다. 근처 노래방을 찾아 걷는데 바람이 얼마나 부는지 귀가 떨어져 나갈 정도였다. 콧물이 줄줄 흐르고 빨개진 코는 감각을 모르겠고 딸꾹질까지 나오는 통에 정신이 없었다. 아무 곳이나 가자고 누군가가 먼저 소리를 쳤고 우리는 우르르 몰려 올라갔다. 노래방은 이층이었는데 늦은 시간이라 손님이 우리뿐이었다.

 춥다가 약간 온기가 있는 장소에 들어오니 얼어 있던 알코올이 녹았는지 술이 약한 친구 몇은 앉기 무섭게 졸기 시작했다. 한 명은 돋보기를 꺼내 노래방 책을 열심히 뒤져 예약 버튼을 잽싸게 눌렀다. 어디나 술자리에 가면 항상 앙숙이 있는 법. 올 때부터 티격태격하던 둘은 목에 핏대를 올리며 들어보면 아무것도 아닌 일로 싸우기 시작했다.

 “야, 아까 내가 1층에 있는 노래방 가자 했잖아.”

 “1층이면 어떻고 2층이면 어떠노. 노래방이면 되지.”

마이크 사이로 둘의 싸움이 들리니 노래도 엉망이고 싸우지 말라고 말리니 더 잘났다고 지랄을 해서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놔두었다. 그러자 화를 못 참은 한 친구가 갑자기 노래방을 박차고 뛰쳐나갔다. 전광석화와 같은 몸놀림에 놀라 따라갔더니 무협 영화 한 장면이 눈앞에 펼쳐졌다. 밤하늘을 가르는 날렵한 무공이 바람을 갈랐다.

 대나무 숲을 나르는 절대 신공인 듯 아니면 건물과 벽 사이를 뛰어다니는 파쿠르인지 친구는 홍길동이 되어 집을 넘고 있었다. 다닥다닥 붙은 집 담을 넘더니 마당을 달려 또 다른 집 담을 넘고 벽을 짚더니 또 담을 넘었다. 생전 처음 보는 신기한 광경에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서로 얼굴만 쳐다보고 시간이 정지되었다. 그 순간 무슨 일인지 모르고 잠들었던 마당의 개들이 깨어 짖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한 마리였는데 점점 숫자가 늘어나 온 동네 개들이 난리를 쳤다. 아니 발악을 했다. 집마다 불이 켜지고 사람들이 나오고 웅성거리고 한바탕 난리가 났다. 전설의 바람 같은 자취를 남기고 사라진 친구의 모습에 우리는 우리가 본 것이 실화냐를 외쳤고 신출귀몰한 홍길동이 되어 구름 속으로 사라진 그는 율도국으로 갔는지 행방이 묘연했다.

 얼마 후 연락이 닿아 그날의 진실을 물어보니 기억이 안 난다는 허무한 대답만이 돌아왔고 겨울 달빛을 뚫고 사라진 홍길동은 지금까지 미스터리로 남았다. 가끔 추위가 길어지는 밤이면 술 한 잔을 기울이며 겨울의 전설을 기억하는 훌륭한 안주가 되기도 했다. 머쓱하게 웃으며 술잔을 기울이는 친구의 얼굴을 보며 아직도 풀지 못한 궁금증을 주워 담기도 했다.

 불청객의 담치기로 놀란 개들이며 잠자다 나와 불 밝힌 집주인은 방금 뭐가 지나갔냐? 정신이 없었을 거라며 지금이라면 당치도 않은 행동이라 이야기한다. 시간이 나면 한 번 찾아가 볼까. 그 겨울처럼 혹시 율도국을 찾는 홍길동의 후예가 있을지 누가 아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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