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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맥켈란 Aug 26. 2023

[단편소설] 화영의 배신-6

여의도 한강 뷰 5성급 M호텔 입주자


여의도 한강 뷰 5성급 M호텔 입주자


화영은 아웃사이더다.


외부인으로서 주류 집단의 일원이 아니거나 굳이 어울리지 않는다. 은둔형 외톨이 ‘히키코모리’ 화영의 시간은  대부분 집에서 흐른다.


백주로 흥청망청 엉망진창 취한 하룻밤을 보내고 하루 쉬고 다음 날 화영과 단 둘이 낮술 하기로 했다. (우리 왜 이제야 만난 거야?)


한 여름 오후 3시.


여의도 한강 공원에서 만나기로 했다. 나무에 매달린 매미 떼가 너도 나도 서럽다고 맴맴 맴맴맴. 그늘에 앉아 무더위에 허공을 맴돌고 있었는데, 깜짝 백허그를 당했다.


“언니!”


새하얀 화영이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내밀었다. 흰색 나시에 짧은 청바지. 가벼운 옷차림이지만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매달려 있다.


애주가 두 사람은 빈속에 생맥주로 더위와 갈증을 날리고 본격적으로 마시기로 했다. (우리 왜 이제야 만난 거야?)


시곗바늘이 ㄴ을 살짝 넘긴 대낮이었지만 ‘여의도 토박이’ 화영은 낮술 가능한 술집들을 꾀고 있었다.


인디아 페일아일(IPA)을 마실 수 있는 수제맥주 전문점을 찾았다. 지하 1층에 300평 커다랗게 자리를 잡은 호프집은 텅 비어있었다.


바캉스가 따로 없었다. 입장하자마자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반겼고 친근한 제이슨 므라즈 ‘Lucky’가 어깨춤을 들썩일 거야! 했다.


I'm lucky I'm in love

with my best friend

Lucky to have been where

I have been

Lucky to be coming home again


입구에서 이미 주문한 IPA 두 잔이 빠르게 나왔고 우리 둘은 단 번에 싹 비었다. 살짝 ‘핑’ 돌았다. 더위는 먹었고 속은 비어 있고 알코올 도수는 꽤 높았다. 9도.


“이제 시작이야! 와인 마시러 가자!”


아이처럼 들뜬 화영은 내 손을 거머쥐고 일어났다. ‘벌써?’ 눈을 동그랗게 뜨자 두 손을 잡아끌었다. 아이처럼.


“그래. 가자. 가. 너 하고 싶은 거 다 해”


약간 돌고 있는 취기를 달래며 두 번째로 방문한 곳은 붉은 벽돌 건물 2층에 위치한 이탈리안 레스토랑이었다.


팔레토는 낭만이었다.


즐비한 증권가 도심 속 탁 트인 루프탑 테라스를 보자마자 재작년에 다녀온 나폴리가 스쳤다. 낭만은 더위를 이길 수 없었다.  판타지는 몽상일 뿐. 현실적인 우리는 시원한 실내 창가자리에 앉았다.


화영은 와인을 사랑했고 진심이었다. 반면 내겐 와인은 빨간색이나 투명색이냐였다. (로제도 있다며?)


“언니는 입문자니까 미국부터 시작해. 나파밸리 까베르네 쇼비뇽 마셔봐. 좋아할 거야”


“화영 이즈 뭔들~”


와인 입문이라니. 주당에게는 신이 나는 놀이다.


주문한 레드와인 한 병과 브라타치즈 샐러드와 시그니처 메뉴라는 라구 파스타와 해산물 세비체가 나왔다.


붉은 앞치마를 허리에 두른 소믈리에가 와인을 살짝 따라주며 친절하게 테이스팅을 권했다.


한 모금. 오?

두 모금. 오.


“더 주세요”


해맑은 ‘와알못’이 마시던 와인 잔을 슬며시 내밀자 화영이 호탕하게도 소리 내어 웃었다. 민망했는데 달콤했다.


아웃사이더 화영은 내 앞에서는 아낌없이 헤펐다. 한 마디 한 마디에 함박만큼 웃어줬던 사랑스러운 미소를 잊을 수 없다.


티키타카도 잘 통했다. 정서적 교감.


“인생 짧다. 오늘이 제일 젊어!”


“맞아. 주름이 다 뺏아가”


“정들었어. 벌써 정들었다고”


“고백할 생각 없어?”


“더우니까 평양냉면 생각나네”


“평냉에는 소주지”


“서운하니까 제육 반 수육 반도 시켜야 해”


“이런 진심 어린 친구 같으니라고. 좋은 생각!”


“언닌 자꾸 웃게 해”


“넌 사람 자꾸 착해지게 만들어”


달콤하게 취했다. 더 달다간 탈 나기 마련. 막바지다. 가자고 했다.


“이렇게 놀았다 헤어지면 허망하지 않아?”


“난 헤어지면 설레던데. 끝이 아니라 다시 시작할 수 있잖아”


“그게 뭔 소리야?”


“사랑 안 해봤어?”


“아니다. 우리 집 가자”


“응?”


“이렇게 못 보내. 더 마시다가 자고 가”


싫지 않았다. 안 그래도 달달한 와인 향에 느슨해진 마음인데 ‘이렇게 못 보내’라니. 뭉클했다.


화영은 여의도 5성급 M 호텔에 살았다. 입구에 우둑하니 서있는 보안 경호원과 눈인사를 나눈 화영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12층을 눌렀다.


‘디링~12층입니다. 올라갑니다’


현관 앞에는 크고 작은 택배 박스들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와아~화영아! 나 매일 와도 돼?”


가로로 널따란 거실 창에는 한강이 흘렀다. 기다란 대교 위에는 붉은빛 라이트를 발하는 자동차들이 슝~ 지나갔다.


셀러브리티 하우스 같았다.


베이지톤 대리석 바닥은 와인 쏟아도 되겠다 싶었다. 동그란 테이블에는 이름 모를 꽃들이 XO 레미 코냑 병에 예쁘게도 꽂혀있었다.


욕실도 특별했다.


난방이 들어와 온기가 돌았고 역시나 창문에는 한강이 흘렀다. 세면대 옆 테이블 위에는 샤넬부터 디올, 시슬리까지. 분내가 났고 화려했다.


드레스룸에는 이 세상 옷들이 다 있는 듯했다. 다만 명품들이 안타깝게도 여기저기 뒹굴고 있었다. 문을 열자마자 바로 닫았다. 정리 벽이 있다.


“거긴 난리야. 도우미 아주머니도 포기했어”


진심 이해됐다. 도우미 아주머니도 감당 못 할 방이다.


다름 한 방에는 와인들이 박스 채로 가득 찼다. 진정한 은둔형 외톨이 애주가. 목이 길고 널따란 입을 가진 리델 와인 잔을 가져온 화영. 셀러에서 아낀다는 바롤로를 꺼냈다.


이탈리아에서 태어난 고급 포도 품종인 바롤로는 부드럽고 실키한데 아로마가 풍부했다. 최애 와인이 됐다. 지금까지는.


“언니~지금 피곤한데 행복해”


“피곤해도 행복하자. 마셔”


“카사블랑카!”


“지금처럼 평생 옆에 있어줘”


“그래. 그러자”


“앞으로 뭐든지 함께 야”


“응. 그러자”


서로를 도닥이는. 아니. 조금은 더 외로운 화영을 토닥이는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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