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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쉘위 Apr 18. 2024

진짜 중요한 것은 뭘까?

세월호 10주년

2024. 4. 16일.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10주년이 되는 날이다.

전날 밤, 아침에 입고 갈 옷을 준비하는데 아이에게 노란색 카디건을 고르자 남편은 옆에서 조용히 말했다.

" 내일, 세월호 10주년이네.."

"아... 그렇구나.. "

.

.

.

짧은 탄식과 함께 지난 10년의 시간을 잠시 거슬러 보았다.

믿기지 않았다.

벌써 10년이 지났다니..





양치를 하는데 눈 깜짝하는 사이에 흘러버린 세월과 10년 전 세월호 참사를 생각하니 많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많은 것이 변했지만 변하지 않은 것도 있었다. 지금 내 옆에는 쫑알쫑알거리면서 깔깔거리면서 웃고 있는 아이가 생겼고 나는 엄마가 되었다. 세상은 빠르게 변화하고 있지만 정치는 여전히 한 보 진보하기는커녕 점점 후퇴하고 있는 듯하고 나는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은 걸쳐두면서도 여기저기 기웃거리면서 살아가고 있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점점 냉소적이고 회의적으로 변해가면서 나는 세월호 이후 뉴스 기사들을 보지 않게 되었고 출산과 육아와 노화로 지쳐가는 몸과 마음으로 체력은 점점 떨어지면서 나 이외에 것에 관심은 점점 멀어져 갔다. 여러 역할들이 생기면서 나의 세계는 확장되면서도 좁아져갔고 시골로 귀촌을 하고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정치가 우리 삶에 더 밀접하게 다가와 있다는 것을 느끼면서도 사람과의 밀접한 접촉이 점점 줄어들면서 세상과 점점 멀어지고 있는 듯했다. 결혼과 육아로 자주 고립 되어 있는 듯한 느낌 속에서 살아가면서 세상 속에서 부대끼던 나는 점점 잊혀 갔고 그렇게 5년이 흘렀다.


잊을 수 없을 만큼 강렬했던 2014년, 그날 이후 나는 많은 것이 바뀌었다.


박근혜가 당선된 후 한동안 심한 우울증으로 내가 하는 일에 의미를 찾지 못했었다. 세상에 기대를 하고 정치가에게 기대를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세상은 알면 알수록 이상하고 이해되지 않는 것 투성이었고 어느 것 하나 투명한 것이 없었고 희미하고 혼탁했다. 엉망진창 시궁창 세상에서 흔들거리고 비틀거리지 않기 위해 정신을 똑바로 차리기 위해서는 매일매일 많은 에너지가 소모되었다. 자주 지쳤고 자주 쓰러졌다. '잘 사는 건가, 잘 살고 있는 건가?' 하는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던 어느 날 나는 내가 가진  모든 소유물과 일을 정리하고 한국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무엇을 하고 어떤 것을 성취하지 않고 목표를 향해 달려가지 않으면 불안하고 결과물만 인정받는 사회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을 권리와 나 자신에게 게으름을 허락하고 싶었다.


그래야 행복할 것 같았다.

열심히 살지 않으면 뒤쳐지고 나이가 들수록 현실 감각을 키우라고 했지만

 뒤쳐지더라도 인간다운 모습으로, 가장 나다운 모습으로 잘 살고 싶었고

현실만 보면서 하고 싶은 것을 포기하거나 뒤로 미루고 싶지 않았다.


지금 당장 행복해지고 싶었으니까.


나이가 들더라도 순수함을 잃지 않고 싶었고

아이처럼  투명하게 세상을 보고 싶었다.


그래서 떠났다.


이 지구 어딘가에는 순수함을 잃지 않고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사는 사람들이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품고.


정말 힘들고 아팠을 때 나에게 또 다른 삶을 선물해 준 곳.

지난 몇 년간 내 머릿속의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던 곳.

하와이로 떠났다.


나를 붙잡는 사람도 있었지만 나를 끌어당기는 힘이 더 강한 곳으로 끌려갔다.

언제 돌아올지 기약도 없었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올 생각도 없었다.


소유물과 이별하고 편안함과 익숙함에 안녕을 고하고 내가 원하는 곳에서 내가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 용기를 내서 떠났지만 실패를 만났고 좌절을 경험했다.


하와이에 도착하자마자 ' 이런저런' 일들을 겪고

아무도 도와줄 곳 없는 타지에서  하룻밤을 구치소에서 보내고

범죄자 취급을 받으며 다음날 강제추방이 되었고

이별하고 떠난 지 하루 만에 다시 한국땅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하와이로 떠나기 전날, 박재동 화백님과 대화 중에 화백님이 그려주신 그림.  2014.3.14
나의 인생 멘토이자 어떤 주제의 대화도 편하게 나눌 수 있는 친구이기도 한 박재동화백님과



그리고 한국을 떠난 지 하루 만에 하와이에서 강제추방돼서 모든 연락이 두절된 채 구치소로 끌려갔다.

영화 집으로 가는 길의 전도연의 모습이 나와 같아서.
여권에 찍힌 강제추방 도장.

하와이 강제추방 이야기


수치스러운 일들을 구치소에서 겪으면서 억울하기도 했지만 놀랐던 마음이 진정이 안돼서

문득문득  트라우마들이 나를 괴롭혔고  무엇보다 다시 용기를 내는 것이 두려웠다.  


그리고  차가운 구치소 바닥에서 깨달았다.


어느 누구도 나를 지켜줄 수 없다는 것을.


오직 내 안의 믿음만이 나를 지키는 힘이자 이 두려움을 맞설 용기라는 것을.



하와이로 떠났던 3월, 그리고 하루 만에 돌아와서 2주간을 집에만 처박혀 지냈다. 수치스럽고 부끄럽고 화가 나고 억울한 감정들을 소화시키기 위해 매일매일 글을 써내려 갔다. 정리되지 않는 감정들과 생각들을 꺼내어보면서 엉켜있던 실타래는 조금씩 풀려가고 얼어붙었던 마음과 경직되어 있던 몸도 서서히 풀어져 갔다. 한국에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남자친구와는 헤어지고 친구들에게도 작별인사를 하고 난리 치면서 떠났는데 사람들을 만날 용기가 나지 않아서 다시 배낭을 메고 길을 나섰다. 한국 땅을 다시 천천히 밟고 싶어졌다. 얼어붙은 마음을 녹게 해 줄 따뜻한 제주도로 마음이 향했고 발걸음을 움직였다.



제주도 한 바퀴를 걸어 다녔다.


여행 내내 나와 함께 했던 분신 스카프.


하와이 구치소 트라우마를 극복하고자 제주도를 한 달간 혼자서 수행하는 마음으로 걷고 걷고 또 걸으면 가는 곳마다 내 흔적을 남겨놓았다.  다시 그곳을 찾았을 때 그때 그 마음가짐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다시 한번 나 자신을 들여다보기 위해.

제주도 여행이 거의 끝나가던 무렵. 2014.4.12



그리고 제주도에서 올라와서 오랜만에 집에서 편하게 일어난 아침.

세월호 참사소식을 뉴스에서 전해 들었다.

제주도로 수학여행 가던 아이들이 구조되지 못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하와이 구치소로 끌려가는데 아무 잘못도 없는 내가 겪어야 했던 일들과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던 상황과 차가운 구치소 바닥에서 누군가가 와주기를

기다리면서 아주 작은 희망이라도 붙잡고 싶었던

생각과 감정들이 얽혀서 한동안 멍한 상태로 뉴스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날 나는 진도 팽목항으로 갔다.

내 눈으로 보고 싶었고 알고 싶었다.

뭐라도 해야 했고 그때는 그래야만 했었다.

그게 내가 사는 길이였다.


내가 눈으로 직접 본 세월호 참사 현장과 방송을 타고 전해지는 세월호 참사 현장은 달랐다.

나의 목소리는 작았고 언론의 목소리는 컸다. 이상하고 이해되지 않는 것 투성이었지만 사람들의 생각과 말은 제 각각 이었고 다 같이 분노하고 소리 질렀지만 시간이 지나도 해결되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아이들은 구조되지 못했고 세월호는 그렇게 점점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갔다. 주말마다 광화문 광장으로 나갔지만 다시 일상을 회복하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또다시 나는 주저앉았다. 차가워진 심장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아이들을 더 이상 마주할 수가 없었다.


아이들은 세월호가 싫다고 했다.



10년 전 블로그



차가운 물속에서 세상을 떠난 아이들과

차가운 세상에서 세상을 등진 아이들

둘 다 마주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학교를 그만두고 배낭을 메고 길 위로 나갔다.


블로그에 몇 줄을 남기고-



단 한 번도 여행을 떠나기 전에 마음이 무거웠던 적이 없었는데 떠나기 전 이틀을 방안에 처박혀 잠만 자다가 지금 용기 내지 않으면 계속 무거운 마음으로 이 나라에 대한 분노를 지난 채 살아가야만 할 것 같아서 이불을 박차고 또다시 길 위로 가방을 울러 매고 나왔습니다.


이번 전국 여행은 설렘보다는 제 안의 두려움을 깨고 제가 가야 할 길을 다시 점검하고 자 떠난 여행이자 수행길이기도 합니다.


올해 일어난 개인적인, 그리고 사회적인 몇 가지 사건들로 인해 제 안에 해결되지 않은 정신적인 트라우마들이 저를 괴롭혔는데  여행 중에 좋은 분들과 함께한 대화와 그리고 산속에서 고요한 시간을 통해  첫날보다는 마음이 한결 많이 가벼워졌지만, 지금 이 마음으로 차가운 바닷속에서 건져지지 못한 아이들을 만나러 가기에는 너무 부끄럽고 미안해서 한 번에 갈 수 있는 방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 인생처럼 구불구불하고 울퉁 울퉁한 길을 선택해서 많은 것을 느끼고 경험하고 나누면서 가고 싶습니다.


매번 수능 시즌만 되면 심장이 조마조마 해집니다. 혹시나, 혹시나 섣부른 판단으로 잘못된 선택이라도 할까 봐 뉴스 보는 게 겁이 납니다. 작년 이 맘 때쯤 생명의 전화에서 상담 봉사를 하면서 전화 온 아이 목소리가 이 밤에 문득 생각났습니다. 진도에서  아이들 볼 명목이 조금이라도 있어야 마음 편하게 집으로 돌아올 수 있을 것 같아서 제가 여행길에 혹시라도 수능이 끝난 학생들에게 해줄 말이 꼭 있으니 강연이나 상담이 필요하신 학교나 교회 성당이 있다면 연결 부탁드립니다. 강연료는 받지 않겠습니다.


어디에 있든 저는 사람 살리는 일, 영혼에 생기를 불어넣어주는 일을 하면서 살아가겠습니다. 제 마음이 더 맑고 밝아져서 그 빛이 어둠을 비춰주기를 희망합니다.




내가 가야 할 길에 대한 혼란 속에 가슴속이 텅 빈 것 같은 느낌이 매일 반복되면서

누군가를 통해 채우고 싶은 욕심 또한 있었지만 결국 나 스스로 해결해야 될 일이다.

다시 나를 사랑하는 시간과 정면으로 나 자신과 마주하는 시간이 필요한 때인 것 같다.


다시 멈춰 서서, 내 인생 전체에 걸쳐 돌이켜볼 수 있는 질문을 던지고 그 답을 찾으러 다시 떠난다.

언제나 질문의 크기, 질문의 넓이, 질문의 깊이가 삶을 더 크게, 생활을 더 넓게, 인생을 더 깊게 만들거라 믿는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용기 내는 게 두렵기도 하고 겁이 나는 내가 싫다.

능력의 한계를 발휘하고 그 한계를 넓혀가는 삶을 살아가면서

죽음과 반대되는 '가장 삶다운삶', 최선의 삶을 살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먼 훗날 시간이 흘러 2014년을 회상할 때 걸으면서 느꼈던 수많은 감정들이 머리에서 사라지더라도

온몸의 세포와 근육들에 기억장치로 남겨지길 바란다.


** 토요일에 광화문에서 하루 머물고 일요일에 안산으로 출발합니다.

자신 있어서 떠나는 게 아니라 자신이 없어서 떠나는 여행이라 함께 하자고 말하기는 힘드나

가는 길목에 인연이 된다면 분명 큰 힘이 될 것입니다.



2014년의 기록들.

마음껏 울 곳이 없어서 광장에 가서 사람들 속에서 같이 울었다. 위로하러 가서 내가 더 많이 위로받았던 시간들이다.
노란 리본 같이 만들다가 갑자기 청와대 가고 싶다는 말에 같이 길을 나서준 분. 사진 오른쪽.



단식투쟁하던 유민아빠 김영오 님을 광장에서 처음 만난 날.



집시법 위반으로 종로 경찰서에 연행되던 날.

하와이 구치소에서 경험 덕분인지 두렵거나 무섭지 않았다. 잘못한 게 없었기에 당당했다. 감사하게도 내가 하루 만에 나올 수 있도록 인권변호사, 언론인등 많은 분들이 도움을 주셨다.


우연히 광장에서 만나서 잊지 못할 하루를 함께한 초등학교 000 선생님.



그날의 이야기

세월호’ 문구 새겨진 티셔츠 입고 있다가 청와대 앞에서 연행된 사건의 전말을 간략히 정리한 기사링크. 

 <민중의 소리> https://www.vop.co.kr/A00000786195.html



그리고 나는 다시 진도로 향했다.

혼자 여행길 위에서 찍은 나의 그림자
-진도 팽목항에서-
-광화문에서 진도까지 거의 한 달을 걸어서 도착한 후 마지막 여정이었던 해남 미황사에서-







10년이 흘렀다.


그때도 나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었고

지금도 나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다.

10년 후에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앞으로의 10년도 직업이나 역할로서 나를 설명하기보다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나 신념으로 활동하는 활동가에 더 가까운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다.


활동가는 자신이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 것들을 실천하고 이뤄내는 데 주력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단순히 직업이나 역할에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나 신념을 실천하고 사회나 커뮤니티에 기여하기 위해 노력하며 자원봉사, 정치 참여, 사회 운동, 문화 활동, 교육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 활동가는 종종 변화나 개선을 이루기 위해 행동하며, 그들의 활동은 종종 사회적인 변화를 이끌어내기도 하며 이는 자신의 가치와 신념을 실천함으로써 주변 환경을 변화시키려는 의지와 힘의 표현이기도 하다.


10년 전 오늘을 적극적으로 기억하며.

오늘 나는 아이들과 함께 세월호 참사에 대해 적극적으로 이야기를 나눴다.



어떤 생각과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세월호를 타기 전에는 어떤 감정이었을까?

세월호에서 배가 기울어지고 있다고 느꼈을 때는 어땠을까?

마지막 순간에 누가 생각날까? 무엇이 후회되고 아쉬울까?

누구에게 전화를 할까? 무슨 말을 할까?

10년 후에 너희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어떤 세상을 함께 만들어가야 할까?





구조되지 못한 세월호, 10년이 지난 2024년.

하루 하루 어디로 향하는지 알지 못한 채 무기력과 피곤함과 싸우며 교실에서 버티고 있는 아이들에게 나는 오늘 이 한마디를 전하고 싶었다.


“ 너희들의 본능적인 감각을 잃지마.

살아있다고 느끼는 것을 향해 걸어가.

순간 순간. 다른 사람들의 말보다 네 안에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나를 살게 하는 쪽으로

움직여. 가만히 있지마.

아무도 믿지마, 네 자신만 믿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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