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하지 않은 시력이요?어떤 시력이면 평범하지 않단 말을 들을까요? 몽골인처럼 9.0 정도 되는 엄청난 시력을 소유한 사람일까요?
그보다 동체시력이라고 하죠. 날아가는 화살을 손가락으로 잡아 낼 수 있는 시력이라는데, 배우 차태현 씨가 ‘장부’라는 이름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면서, 누군가가 던지는 숟가락을 정확히 한 손으로 잡거나, 무수히 떨어지는 낙엽, 노랑 은행잎을 쏙쏙 여유롭게 잡는 장면을 보시게 될 거예요.
영화 <슬로우 비디오> 스틸컷 _ 이미지 출처: 네이버
동체시력. 그렇게 일반적이지 못한 시력으로는 생활이 다소 평범하지는 못할 것 같네요?
그렇죠. 장부는 시력 때문에 어릴 적부터 집안에만 틀어박혀서 자랍니다. 장부의 시력으로 주변을 둘러보면 모든 것이 보통사람들이 보는 것보다 훨씬 느리게 움직이고 있거든요.
한 마디로 장부가 일상에서 보는 모든 장면들은 슬로 모션이라는 말씀이군요.
네. 처음에는 영화 속 장부의 능력이 부러웠죠. 똑같이 주어진 시간 동안 보통 사람에 비해서 장부가 볼 수 있는 건 훨씬 많고 구체적이니까요. 그런데 영화가 중반으로 흐르면서 알게 된 사실이, 장부의 시력으로는 달리기를 할 수 없다는 거였죠. 가만히 있어도 보통 사람보다 순식간에 많은 것을 보게 되는데, 뛰기까지 하면 찰나에 너무 많은 것을 보게 되니, 어지러워 쓰러지게 되고, 심하면 실명에 이르기도 한답니다.
영화 <슬로우 비디오> 스틸컷 _ 이미지 출처: 네이버
위험한 순간들도 있겠지만 시력의 장점을 잘 살리면, 생각하지도 못했던 일을 해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외부와 단절하고 항상 집에만 있어서 소극적이던 장부가, 처음으로 집 밖에 나와 일을 하게 된 곳이 있죠. 정말 시력의 장점을 잘 살릴 수 있는 장소였는데, 바로 ‘CCTV 관제소’입니다. 동네의 모든 상황을 CCTV로 지켜보며 위험한 상황은 없는지, 교통상황은 원활한지 모든 상황을 모니터링해요.
영화 <슬로우 비디오> 스틸컷 _ 이미지 출처: 네이버
장부가 제대로 능력 발휘를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네요. CCTV 관제소면 적어도 설치된 모니터가 200대 이상은 될 텐데, 장부의 시력이라면 200대쯤은?식은 죽 먹기 아닌가요?
식은 죽 먹기죠. 다른 직원들은 신경을 곤두세우고 지켜보는데, 장부만 아주 여유롭게 모니터링하고 있어요. 곧 회사에서는 없어선 안 될 능력자로 불리죠. 모니터링하면서도 여유가 넘치다 보니, 마치 한 편의 드라마를 보듯, 이 시각엔 어떤 사람이 어디를 통과해 어디로 간다, 까지 장부는 알게 돼요. 그러다가 항상 같은 시각에 골목을 지나는 한 여성이, 언젠가부터 장부 눈에 자꾸 들어옵니다.
영화 <슬로우 비디오> 스틸컷 _ 이미지 출처: 네이버
역시장부는 달콤한 에피소드도 평범하지 않네요. 그녀 몰래 그녀의 동선을 줄줄 꿰고, 모니터를 보며 일종의 보디가드를 해주고 있는 격이지 않습니까?
장부는 항상 같은 시각에 같은 골목을 보며 그녀를 기다립니다. CCTV는 특성상 거리와 각도가 제한적이라 사각지대가 생기는데요, 그녀가 사각지대로 들어서면 잠시 모니터에서 사라지고, 몇 초 후 다음 모니터에 정확히 등장합니다. 장부는 그녀가 사각지대에서 몇 초 소요되는지까지 체크하며, 매일 그녀를 눈으로 지키며 집까지 바래다주죠.
누군가가 시선으로 지켜준다니 그녀는 참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각지대라는 설정이 어쩐지 조금 불안한 복선 같다는 생각 떨칠 수가 없네요?
그렇죠? 결국 사각지대에서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날도 장부가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는데요, 항상 지나가는 사각지대로 그녀가 들어선 이후, 소요되던 일정한 시간이 지나도 다음 모니터에 나타나지 않는 겁니다. 무언가 불길해진 장부는 그녀를 구하기 위해 실제 장소로 마구 달려 나가죠.
동체 시력 때문에 뛸 수 없다고 하셨잖아요. 그렇게 뛰다가 장부에게 더 큰 문제가 생기는 것은 아닐지 걱정입니다.
장부도 자신이 뛰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요. 달리면서 무척 어지러움을 느끼며 괴로워하기도 해요. 그러나 어쨌든 사랑의 힘은 그 순간 장부를 뛸 수 있게 해 주었던 거죠.
CCTV가 실제상황이든, 범죄영화 속에서든 중요한 증거 자료로 사용되는 매개체가 되는 것은 분명한데, 이 영화에서는 독특하게 낭만적인 소재로 사용되고 있네요?
네. 아름다움을 엮어가는 통로로 CCTV를 사용하고 있는데요, 특히 이 영화는 여운을 남기고픈 씬이나, 주인공의 감성이 무르익는 장면에서, 영상이 서서히 그림으로 바뀌거나, 흑백이던 그림이 생명을 입은 듯 영상으로 바뀌는 독특한 기법을 사용하고 있어요. 현장을 생생히 담은 영상이 서서히 예쁘게 바뀌는 것처럼, 범죄 분석용으로만 사용되던 매개체 CCTV가 낭만으로 재탄생되는 것이 감동적이었던 작품입니다.
영화 <슬로우 비디오> 스틸컷 _ 이미지 출처: 네이버
다들 너무 빠르고 바쁘게 산다. 내가 보듯이 가끔은 느리게 흐르면 좋을 텐데
장부의 멋진 대사들이 일상을 위로해주었던, 마음이 보송보송해지는 예쁜 영화입니다.
CCTV 관제센터에서 보고 있으면 사람 사는 게 드라마와 비슷하다. 모두가 주인공인 200편의 드라마
모두가 주인공이라는 말. 참 힘이 되는 말입니다.
빨리빨리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 잠시 멈추고 차분하라고.
느긋한 생각, 느긋한 마음으로지금보다는 조금 느리게 걸어보라고.
슬로 모션으로 마치 주인공다운 품위를 누려보라고 예쁜 타이름을 주는 작품이군요.
CCTV 관제센터에서 보고 있으면, 사람 사는 게 드라마와 비슷하다. 모두가 주인공인 200편의 드라마.
대사가 우리를 다독여 줍니다.
느려도 된다고, 다만 우리 좀 아름답게 살아가자고 용기를 주는 영화 <슬로우 비디오> 소개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