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위 사람들이 결국 아버지를 다 손절했어요. 그럴만 하니까요. 정말 나쁜 사람이였어요. 너무도 폭력적이고 이중적인 사람이였죠. 순수 악, 그 자체였어요.”
하나의 아버지는 안 좋은 모습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고 했다.
“야망인지 욕심인지, 자기가 원하는 것은 꼭 해야 하고 꼭 그렇게 되게 만드시려는 분이셨어요. 너무 자기 밖에 모르는 사람이었고 매정했었죠. 어머니에게 막대하고 막말하는 것을 보면서 자랐어요. 그런데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죠.”
폭력적인 사람이 있는 곳에서 마음이 여리고 착한 사람이 살아가려고 하면, 폭력적인 사람은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휘두르고, 마음 여리고 착한 사람은 그것에 맞춰주면서 최대한 관계가 유지될 수 있게 애쓰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된다. 그 여리고 착한 마음은 이런 반응을 갖게 해서 안타까워지곤 한다.
“그렇다고 저까지 아버지를 손절할 수는 없었어요. 그래도 제 아버지인 걸요.”
너무도 폭력적이었던 아버지, 사람들에게 외면 당하고 손절 당하는 아버지, 자기밖에 모르는 아버지이지만, 자신까지 아버지를 놓으면, 아버지가 너무 불쌍하는 것이었다. 자신의 안쓰러움보다 아버지의 안쓰러움이 더 크게 일어나는 모습을 누군가는 착하다고 말을 할 것이고, 누군가는 바보 같다고 말을 할 것이며, 누군가는 그 모습을 당연한 것으로 이용을 한다. 안타깝게 하나의 아버지는 세 번째였다. 그래서 하나에게는 더 막대하고 폭력적이었다.
“그럼 어떡해요. 맞춰주지 않으면 난리가 나는데요.”
사실 하나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관계에서의 교통정리를 해야 하는 사람이 그러지 못하고 있을 때 그 결과를 모두 함께 떠안게 됩다. 어쩌면 폭력적이고 무책임한 아버지의 모습에 무책임한 모습으로 대하고 있었던 어머니는 하나에게 폭력적인 말과 행동을 쏟고 있었던 것이었는지 모른다. 양쪽의 다른 형태의 무책임함과 폭력적인 모습을 하나는 모두 받아내고 있었는지 모른다.
“몇 년 전에, 불면증이 심해서 병원에 갔더니 우울증 진단을 내리더라고요. 그래서 그때 이후로 우울증 약을 먹으면서 생활하고 있었어요.”
하나가 자신의 기분이나 감정을 읽고 살피지 않고 당장 내가 접하고 있는 환경에서 살아갈 방법에 초점을 맞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어찌보면 너무도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 아닐까?
“저는 그냥 이렇게 살면 된다고 생각해 왔었요. 그런데 요즘은 좀 다른 생각을 하게 되요. 나는 왜 이렇게 살아야 하지? 라는 생각이요."
우리가 원치 않고 끌려가는 선택을 하고, 내가 한 선택에 묶여 끌려가듯 살지 않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있다. 그런 환경에서 벗어나오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있는 것이다. 그건 바로 자신의 마음을 읽고 살피는 것이다. 살피는 것까지는 지금 너무 버겁고 힘들다면, 자신의 마음을 읽어주는 것만이라도 해주는 것이 변화의 시작점이 되어주곤 한다. 내 마음의 상태를 알아야지 내 마음에 맞는 현실과 환경을 찾고 만들 필요성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그것이 욕심도 아니고 이기적인 것도 아니다. 그저 나의 삶을 사는 것이다. 주어졌다고 다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더라.
가라앉는 배에서 나오지 않고 함께 가라앉는 것은 타이타닉의 디카프리오만으로 충분한 일이다. 가라앉는 배에서는 탈출을 해야 하는 것이지 배와 나를 하나라고 생각하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너무도 미안해지는 생각이고 선택이며 판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