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시간을 채워야 안심이 됐던 나에게

by 알깨는 아줌마

아침에 눈을 뜨고 프렌치토스트를 해 먹고 도서관에 왔어. Al safa art & design library라는 곳인데 규모가 크지 않고 아이들이 앉아서 책 읽고 글 쓰고 할 만한 공간은 많이 않아.


응, 우리는 여행을 와서 글을 쓰고 있어. 지난겨울부터 시작한 일인데 그 방학 동안 둘째, 셋째는 10,000 단어 짜리 소설로 완성해서 아마존에서 셀프 출간을 해봤어.

첫째가 쓰는 소설은 40,000 단어 정도 되는 장편이라 여전히 쓰고 있어. 그 사이 둘째도 새로운 책을 시작해서 같이 쓰고 있어. 첫 책이랑 다른 새로운 시리즈의 책을 구상했는데 1권을 끝내는 중이야. 이번 여행은 아이들이 쓰던 책을 끝내러 온 거야.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거든. 이곳에서 2주 정도 머무르면서 집중적으로 집필해서 끝내보려는 계획이야.


웃긴 건 나도 옆에서 이렇게 덩달아 쓰고 있어. 쓸 게 딱히 떠오르지 않는데도 매일 꾸역꾸역 쓸 수 있는 건 애들이 옆에서 쓰고 있기 때문이야. 도서관에서 나만 혼자 가만있지 못하고 돌아다닐 수도 없고 핸드폰만 쳐다보고 있을 수 없으니까 나도 쓰고 있는 거야.


그런데 사실 막내가 8살이야. 갈피를 못 잡고 있지. 언니들 옆에 앉아서 뭔가를 쓰려고 애쓰기는 하지만 갈팡질팡해. 그녀는 매일 수영도 하고 싶고, 언니들이랑 놀고 싶고, 집 나가면 바로 보이는 키즈카페도 가고 싶지.


어제는 문득 그런 막내가 너무 안쓰러워 보이는 거야. 스멀스멀 뭔가를 또 채워야 할 것 같다는 압박이 시작됐어. 스키두바이 레슨을 알아보고 아마존에서 스키 장갑을 장바구니에 넣어놨어. 1박 2일 갈만한 호텔이 있는지, 데일리 서머캠프도 찾아봤어. 여기까지 왔는데, 뭔가 신나고 블링블링 한 걸로 막내의 시간을 채워줘야 내가 그녀를 방치하지 않는다는 안도감이 들 것 같았거든.


그러다 정신이 드네. 여기 오기 전에 시골 동네 우리 집에서 4주 동안 집콕을 하면서

“와.. 채워지지 않아도 되는 자유가 너무 좋다! ”

외치던 사람이 나야 나!


그랬던 내가 이 화려한 도시에 와서 어느새 채워져야만 할 것 같은 압박을 느끼고 있었네.


그녀를 방치한 건 나였어. 눈 맞추고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고 같이 춤춰 주지 않고 둘이서 식사 준비를 하기로 해놓고 언니들에게 맡기거나 혼자 후딱 해버린 나지.

막내가 하고 싶었던 건 산책하고, 버블티 사 먹고, 수영장 가고, UNO 하고, 음식 준비 같이 하는 거였지. 낯선 곳에 가고 새로운 경험을 하고 싶었던 게 아니야.

막내가 유난히 안쓰러워 보였던 건, 다시금 주위의 이 블링블링한 것들로 나를 채우고 싶은 욕망을 투사한 것인지도 몰라. 실은 여기까지 와서 이러고 있는 나를 안쓰러워했던 걸 수도 있어.


흔들리지 말고 우리가 하던 대로 가자.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 마감일까지,

열심히 쓰고, 눈을 맞추고, 웃고,

서로를 격려하며 뒹굴거리는 시간들.


그렇게, 함께하는 걸로 충분해, 조금도 부족하지 않아.

다 채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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