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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절에 31명이 31km를 뛰었습니다

by 존버헨리 Mar 03.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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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금요일에 문자가 왔다.


<2025 3.1런 31km 러너 선발에 지원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31km 러너에 선발되셨음을 알려드립니다.>


아, 나에게도 이런 일이??


사실 해비타트에서 기부천사 션님과 3.1절에 31km를 달리는 행사가 있다는 인스타 피드를 한 한 달 전쯤에 봤다. 일반인 3명을 선발한다는 글을 보고 무심결에 지원을 했던 터였다. 그 당시, 여기저기서 2월에 있었던 대구마라톤, 3월에 있을 동아마라톤 관련 글들을  블로그와 인스타에서 보고 아, 나도 대회 참가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참가신청은 이미 작년에 끝난 터... 그러던 와중에 이거라도 한번 신청해볼까 해서 신청한 게, 해비타트에서 주최한 독립유공자 후손 집짓기 기부러닝 행사인 3.1절 31km 러닝이었다. 자격 조건은 풀코스 완주를 해본 사람이었는데, 나도 풀코스 완주 경험이 있으니 지원 자격은 충분했다. 기록으로 뽑는 건 아니었다.


일반인 3명을 뽑는 이벤트였고, 연락이 없어서 나는 역시 안 뽑혔는 줄 알았는데, 행사 일주일 전에, 연락이 왔고, 추가로 몇 명 더 뽑아서 다행히 나도 포함이 되었던 것이었다.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작년 10월 춘천마라톤 이후 20km 이상 뛰어본 적도 없고 보통 10km 내외만 달리고 있었는데 내가 뛸 수 있을까? 민폐를 끼치면 안 될 텐데...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리고, 또 다른 걱정은 옷이었다. 새벽 5시에 뛰어야 했고, 예상 기온은 2-4도 정도였다. 드레스코드가 블랙인데 나는 블랙 패딩재킷과 레깅스만 있고, 블랙 색상은 반바지도 없을뿐더러, 바람막이나 패딩조끼도 없다. 아 뭐 입고 뛰지? 와이프에게 이 사실을 얘기하며 반바지는 생략하고 레깅스만 입어도 될 거 같고 위에는 그냥 추워도 블랙 긴팔 드라이핏 상의에 반팔 티셔츠 레이어드로 입고 뛰어야겠다고 했다. 좀 춥겠지만... 그랬더니 와이프는 급하게 ㅋㅍ에서 가성비 좋은 블랙 색상 반바지를 하나 주문해 줬다. 그리고 와이프의 블랙 패딩조끼와 바람막이를 나에게 입어보라고 줬는데 이게 나한테 딱 맞네?? ㅎㅎ 내가 살이 많이 빠지긴 한 모양이다. 패딩조끼는 내가 몇 년 전 와이프 생일선물로 사준 건데 이게 이렇게 쓰일 줄이야...


안개가 자욱했던 3월 1일 새벽 5시. 집결지인 상암동 평화의 광장에 도착했다. 역시 생각한 대로 날씨는 쌀쌀했고 어둠 속에 블랙 색상의 러닝복 차림의 러너들이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했다. 공지사항에 의하면 션님과 페이서들 그리고 나처럼 뽑힌 일반인 10명의 러너까지 총 31명이 6분 페이스로 31km를 뛰는 것이었다. 션님도 알겠고 일반인 10명도 알겠는데 나머지 페이서 그룹은 누군지 감이 잘 오질 않았다. 사실 지금도 잘 모르겠다. 어쨌든 많은 사람들은 서로 인사도 주거니 받거니 다들 안면이 있어 보였다. 나는 역시 아는 사람도 하나 없고 혼자서 뻘쭘하게 쭈뼛쭈뼛 준비운동을 하고 드디어 출발을 했다.


전날 인스타그램에 보니 션님이 3.1 다음 날 도쿄 마라톤 대회에 참석한다고 피드를 올렸던데, <와 31k를 뛰고 다음 날 도쿄 마라톤 풀코스를 뛴다고??>라고 생각했었는데 알고 보니 도쿄마라톤 준비 때문에 션님은 이날 마지막 3.1km만 함께 뛰기로 했다고 한다. 그래도 출발 시간에 맞춰 오셔서 응원을 해주셨다. 30명의 러너가 안개 자욱한 새벽녘, 평화의 광장을 뒤로하고 한강변으로 나갔다. 약 4km 정도 되는 구간을 왕복으로 계속 뛰는 코스였으며 그 중간에 급수대가 설치되었다. 중간에 더우면 옷을 벗어서 급수대 쪽에 맡길 수도 있었다. 나도 처음에 바람막이에 패딩조끼까지 입었다가 5km쯤 뛰고 너무 더워서 벗었다. 옷만 벗었어야 하는데 장갑까지 야무지게 같이 벗어서 던졌더니, 나중에 손이 시려서 혼났다.


안면이 있는 러너들은 서로 대화도 하고 재미있게 뛰는데, 나는 진짜 좀 뻘쭘했다. 31km를 뛰는 동안 말 한마디하지 않았고, 중간중간 파이팅을 외치거나 할 때만 입만 뻥끗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애국가 1절도 다 함께 부르기는 했다. 처음엔 좀 뻘쭘하고 나만 좀 이 그룹에서 외톨이인가 하는 느낌이 있었는데, 그래도 같이 뛰면서 나름 내적 친밀감도 생겼고, 귓동냥으로 그들의 대화를 듣는 일도 재미있고 편하게 느껴졌다.


역시 러너들의 대화란 무슨 무슨 대회 이야기, 요즘 월 마일리지 이야기 등등... 듣고 보면 뻔한 얘기지만 얘기가 끊이질 않았다. 해외 대회이야기들, 트레일 러닝 이야기들도 귓동냥으로 재미있게 들었다. 어떤 분은 요즘 러닝을 많이 못해서 오늘 잘 뛸 수 있을지 걱정이라고... 이번 달에 100km밖에 못 뛰었다고 했다. 아, 나는 많이 뛰어야 100km인데 나도 31km 잘 뛸 수 있을까 속으로 생각을 했다. 맨 앞에 선두에서 뛰시는 운영진(?) 두 분은 서브 3 주자였다. 와 대단하다 대단해.


같은 구간을 반복해서 뛰는 일이 나에게는 무척이나 지루하고 힘든 일인데, 생각보다 지루하지는 않았다. 같은 코스여도 어두운 새벽에서 해가 뜨는 시점이라 시시각각 다른 느낌을 주어서 오히려 좋았다. 뛰면서 보니, 연예인 분들도 몇 분 계셨고, 인스타에서 유명하신 한 여성 러닝 인플루언서분도 보였다. >와, 나도 이 분 팔로잉하는데 여기서 이렇게 같이 뛰어 보네>하는 생각도 들고 너무 신기했다. 뛰는 폼을 보니 진짜 가볍게 잘 뛰신다. 정말 발꿈치가 바닥에 닿지 않는 미드풋으로 너무나도 가볍게 뛰신다. 게다가 비주얼이 너무 단단해 보이시고 힘 안 들이고 뛰는 그런 느낌이랄까?


뛰는 그룹을 둘러보니 인스타그램에서 러닝 하는 모습을 자주 보여주시던 J배우님도 계셨고, 그 옆에 어떤 여배우님과 남배우님이 보였다. 여배우님은 대화 내용으로는 배우님이 맞는 것 같은데 뒷모습만 보여 누군지 몰랐고(나중에 보니 얼굴 봐도 나는 모르는 분이었다), 또 다른 남자 배우님은 정말 배우 같이 잘 생긴 분이라 배우가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이 분도 얼굴을 봤는데도 누군지 몰랐었다. 나중에 러닝 끝나고 이 행사 관련 뉴스를 검색해 보고 두 분이 누군지 알게 되었다. 그 외에도 내가 눈치채지 못했지만 많은 유명하신 분들이 있었던 듯하다. 페이서 그룹이 어떤 연유로 뽑힌 분들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마지막 3.1km는 션님이 합류해서 애국가도 부르고 태극기를 흔들며 마무리를 했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과 31km를 같은 페이스로 달리다니, 참 새로운 경험이었다. 보통 대회 때는 내 페이스대로 뛰면 되는데, 31명의 러너가 모두 같은 페이스로 뛰는 것도 신기했고, 31명이 사람들이 뛰는 것도 재미있었다. 군대 이후로 같은 페이스로 이렇게 그룹으로 뛰는 경험은 처음이었으니까.. 나는 크루도 없고 매 번 혼자 뛰는 러너니까 말이다.


작년 춘천 마라톤 대회 이후 러닝에 대한 의욕도 조금은 사그라들었고, 내가 다시 풀코스를 뛸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항상 내 머릿속에 남아 있었는데, 이번에 31km를 뛰고 나서 다시 풀코스를 꼭 뛰고 싶다는 욕망이 생겼다. 특히 맨 앞에서 인솔하시던 분의 말씀이 생각이 났다. SUB3를 해야겠다고 생각해서 SUB3가 되는 게 아니라 50번 정도 완주하니까 그렇게 되었다고....


물론 SUB3가 나의 달리기 목표도 아니고 해보고 싶은 욕심도 없다. 하지만, 걱정이 많이 되었던 31km를 무리 없이 다 뛰고 나니, 나도 다시 풀코스를 뛸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달릴 수 있는 마라톤 대회에도 나가고 싶어졌다. 같이 뛰면 더 멀리 뛸 수 있다는 말이 정말 사실이었다. 아마 혼자서 31k를 뛰었다면 더 힘들었을 것이고 분명히 후반으로 갈수록 페이스도 쳐졌을 것이다.


달리기에 대한 열정이 식어가던 이 시점에, 적절한 동기부여가 되었던 그런 31km 러닝이었다.

기회를 주신 해비타트에 너무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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