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쁘게 다니면서도 의미 있는 만남을 하고, 풍성한 역사를 경험한 날
퓌센 [ Fussen ]
독일과 오스트리아 국경지대 인근의 알게우알프스 산맥 동쪽 끝 레히강(江) 연안에 있다. 옛 로마제국의 국경초소가 있던 지역이며 628년에 세워진 베네딕투스회 성마그누스수도원을 중심으로 도시가 발달했다. 1294년 자치시가 되었다. 1745년 이곳에서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에서 바이에른군대를 철수시키는 조약이 체결되었다.
현재의 성마그누스수도원과 교회는 1701년에서부터 1917년까지 오랜 기간에 걸쳐 지은 것인데, 교회의 지하실은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되어 있다. 도시에서 4km 떨어진 곳에는 슈반가우 숲이 펼쳐지는데, 그 숲 한자락에 월트디즈니가 디즈니랜드의 성을 지을 때 모델로 삼았다는 노이슈반슈타인성이 있다. 이 성은 중세 기사 전설에 매료된 바이에른 국왕 루드비히 2세가 지었다. 관광 휴양지이며 겨울 스포츠의 중심지이다. 주요 생산품은 의류와 밧줄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퓌센 (두산백과)
호엔슈반가우성 [ Hohenschwangau ]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노이슈반슈타인성(城)과 마주보고 있다. 루트비히 2세의 아버지이자 바이에른의 선제후인 막시밀리안 2세(Maximilian Ⅱ)가 지은 성이다. 성 안에는 동양의 미술품과 예술작품 등이 보관되어 있으며, 3층에는 왕이 작곡가 빌헬름 바그너(Wilhelm Richard Wagner)와 함께 연주한 피아노가 전시되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호엔슈반가우성 (두산백과)
노이슈반슈타인 성 [ Schloss Neuschwanstein ]
제작시기: 1880년
건축가: 크리스티안 얀크, 에두아르트 리델
위치: 독일 호엔슈반가우
양식: 고딕 복고
재료: 돌, 강철
노이슈반슈타인 성은 수많은 엽서, 퍼즐, 광고는 물론 저 유명한 디즈니랜드의 잠자는 숲 속의 미녀에 등장하는 성의 모델까지 된 덕분에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성 중의 하나로, 노이슈반슈타인이 세워지게 된 경위 또한 성 자체만큼이나 잊히지 않는다.
바이에른의 왕이었던 루트비히 2세(1864~1886년 재위)는 왕이 된 지 2년 만에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주권을 잃고 이름뿐인 왕으로 전락한다. 이러한 정세로 인한 압박감에 본래 심약한 성품이 더해져 그는 고결한 왕들과 강인한 게르만족 신화 속의 신들이 사는 바그너 풍의 몽상의 세계에 틀어박히고 말았다. 그는 산꼭대기의 어린 시절 고향에 틀어박혀 노이슈반슈타인 성을 비롯한 환상적인 중세의 성을 짓는 데에 여생의 대부분과 재산의 전부를 쏟아부었다. 1886년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완성되지 못했지만, 노이슈반슈타인의 방들은 웅장하기 그지없다.
외관은 중세지만, 중앙난방, 수도, 수세식 화장실, 심지어 전화에 이르기까지 근대 문명의 이기들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루트비히의 몽상을 현실로 만들어준 크리스티안 얀크(1833~1888년)의 원래 직업은 무대 감독이었으며, 노이슈반슈타인은 이러한 사실을 잘 반영하고 있다. 단순히 중세의 성을 충실히 재건한 것이 아니라, 로마네스크, 비잔틴, 고딕 양식이 한데 어우러져 생동감이 넘치는 것이다. 모든 방에서 트리스탄과 이졸데, 그리고 그 밖의 바그너 테마를 묘사한 조각과 프레스코를 볼 수 있으며, 성 전체로 보았을 때에는 중세의 성배 전설을 표현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노이슈반슈타인 성 [Schloss Neuschwanstein]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세계 건축 1001, 2009. 1. 20., 마크 어빙, 피터 ST. 존, 박누리, 정상희, 김희진, 위키미디어 커먼즈)
뉘른베르크 [ Nuremberg ]
독일 바이에른(바바리아)주(州) 제2의 도시
마인강(江)의 지류 페그니츠강(江) 우안(右岸)의 해발고도 300m 지점에 위치하는 독일 유수의 상공업도시이다. 오랜 제국도시로서 옛 형태를 잘 유지하고 있으며, 환상성벽(環狀城壁)과 역사적인 탑, 재건된 성이나 교회가 중세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고딕이나 르네상스의 유명한 건축물로는 화가 A.뒤러의 집과 제바르도스교회·로렌츠교회·프라우엔교회 등이 있다. 그 밖에 시청사·독일자연사박물관·교통박물관·천문대, 그리고 경제·사회과학 학부가 있는 종합대학·사범대학, 조형미술 아카데미, 응용미술 아카데미 등이 있다.
1219년 제국도시가 되어 제국의회가 열렸으며, 1424∼1796년 제국의 보물이 간직되어 있었으나, 성주에 대한 독립투쟁이 일어나 1427년 시(市)에 성을 매도하였다. 15∼16세기는 예술과 과학의 최성기로서 A.뒤러, 조각가 A.크라프트, V.슈토스, 황동 주조공 P.비셔, 시인 H.작스 등이 활약하였으며, 1525년 종교개혁 때에는 프로테스탄트 쪽에 섰으며, 1532년에는 ‘뉘른베르크의 종교회의’를 체결하는 등 지도적 역할을 하였다. 1806년 바이에른령(領)이 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연합군에 의한 독일전범의 나치(Nazi) 군사재판이 열렸다.
현재는 근대공업의 중심도시이며, 교외에는 금속·전기·기계·자동차·광학기계·완구·문방구 등의 공장이 많다. 또 마인강과의 사이에는 운하가 통하여, 그 연안을 따라 새로운 공장지대가 형성되었으며, 특히 완구박람회가 열리는 도시로 널리 알려졌다.
[네이버 지식백과] 뉘른베르크 [Nuremberg] (두산백과)
알브레히트 뒤러 [ ALBRECHT DÜRER ]
요약: 독일의 가장 중요한 미술가.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을 경험한 선구적인 북유럽 미술가였으며 장인이기보다는 지식인이기를 원했던 최초의 미술가로서 '르네상스인'이라는 수식어를 얻었다. 회화와 판화로 당대에 높은 명성을 얻었으며 많은 자화상을 그렸다.
[네이버 지식백과] 알브레히트 뒤러 [ALBRECHT DÜRER] (501 위대한 화가, 2009. 8. 20., 스티븐 파딩, 위키미디어 커먼즈, 프랑스 국립박물관 연합(RMN))
[양기화의 인문학기행] 독일, 스물 세 번째 이야기; 뉘른베르크
알브레히트 뒤러 광장의 지하에는 그 유명한 바위굴(Felsengängen)이 있다. 바위굴의 입구는 뒤러의 동상 뒤편에 있다. 뉘른베르크의 지하 바위굴은 지하수를 끌어들이기 위한 목적으로 뚫거나, 맥주를 발효시키거나 저장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었다. 1303년의 뉘른베르크 맥주 순수령에서는 밀과 호밀은 제빵에만 사용하고 맥주 제조에는 보리 맥아만을 사용하도록 했다.
1380년 뉘른베르크 시의회는 맥주를 상업적으로 양조하려면 지하저장시설을 갖추도록 법률로 정했다. 바위 동굴은 섭씨 8~12도의 온도를 일정하게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중세 초기에서 근세에 이르기까지 뉘른베르크에는 많게는 42개의 양조장이 있었다. 따라서 각 양조장들은 집 아래 사암을 뚫어 지하 동굴을 건설하게 됐다. 4층 깊이로 바위를 파고 이웃의 허락을 얻어 옆으로 확장시켰다.
지하통로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2만5000㎢ 면적의 사암 지형에 미로 형태의 굴을 팠다. 그리고 환기체계를 개발해 신선한 공기가 유입되도록 했다. 오늘날 알려진 지하 바위동굴은 주로 뉘른베르크 구시가의 북쪽에 몰려있지만, 구시가의 남쪽에도 많은 양조장들이 있었기 때문에 공개되지 않은 지하 동굴이나 저장소가 있을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 뉘른베르크의 지하 동굴은 공습 대피소로 활용됐다. 1945년 1월 2일 저녁의 대대적인 공습은 구시가의 90%를 파괴하는 가공할 수준이었지만, 비슷한 규모의 공습이 이뤄진 드레스덴, 쾰른, 카셀, 도르트문트, 함부르크 등의 도시에 비해 뉘른베르크의 주민들의 사망자수는 월등이 낮았다. 뿐만 아니라 지하통로와 저장시설은 교회와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수많은 예술작품을 대피시키는 장소로 활용할 수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 연합군의 폭격으로 독일 국민들이 많이 죽었다고 한다. 특히 1945년 2월 13일부터 17일까지 미국과 영국의 항공기 800대가 출격해 무려 3900톤의 폭탄을 퍼부은 드레스덴에서는 무려 13만 명이 죽고 아름다운 도시가 초토화됐다. 미국의 풍자소설가 커트 보네거트는 21살이 되던 해 벌지 전투에서 포로가 돼 드레스덴 인근에 있는 ‘제5 도살장’이라는 포로수용소에 갇혀있는 동안 이 폭격을 겪었다. 다행히 지하에 있는 고기 저장고에 들어갈 수 있어 죽음을 면했다고 한다. 그 경험이 소설 ‘제5 도살장’에 담겨있다.
© 양기화; KUKINEW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