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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소하고 사사로운 Sep 17. 2024

전직 힐링캠프 요원의 꿈과 착각

매년 꽃 피는 봄이 오거나, 낙엽이 물드는 가을이 오면 사람들을 예닐곱 버스에 태우고 평창으로 2박 3일 힐링캠프를 떠났다.




출처 : 현덕경영연구소(https://blog.naver.com/hyundukmgt)


1일차

산과 계곡을 굽이굽이 지나 돌뫼농원에 도착하면 요가 매트를 깔고 사람들이 세미나 룸에 모여든다. 각자 세상에서 제일 편한 자세로 앉아서 임소장님의 40분 남짓 되는 강의를 듣는다.


힐링캠프, 정식 명칭으로 SLT(Self Leadership Training) 프로그램 담당자이면서, 임소장님의 비서 역할도 했던 나는 "우리 소장님. 계룡산 도사님 같은 느낌이시지만, 이래뵈도 서울대를 졸업하시고 롯데인재개발원 최우수 사원 출신이시고, 우리 회사 인사상무 출신으로 현덕경영연구소 소장을 맡고 계십니다. 믿으셔도 됩니다."를 소개에 덧붙인다.


2박 3일 되는 프로그램의 주제는 몸과 마음의 건강, 그리고 행복이었는데, 강의 시작 전에 빅터플랭클의 죽음의 수용소를 담은 5분짜리 영상을 보고 시작했었다.




압도적 현실과 변화에 충격과 경악을 느끼고 분노를 느끼게 된 사람들. 그러다가 점점 정서적으로 무기력해지고 무반응으로 변한 사람들. 그들은 죽음의 수용소에서 데리고 온 사람들이었다. 그저 보통의 사람들이었다. 회사에서 열심히 일하고 가정을 일구고 그렇게 사는 보통의 사람들.  


40분의 짧은 강의가 끝나면 사람들을 모시고 맛있는 점심을 먹으러 갔었다. 평창에서 제일 잘하는 막국수와 수육 혹은 매운탕, 송어회 등등.


우리는 2박 3일 동안 사람들이 마음껏 쉬고 먹고 대접받기를 원했다. 매번 가는 평창이었지만 그 날의 날씨와 인원, 사람들의 연령대 등에 따라서 어떤 메뉴와 코스를 짜면 좋을 지 미리 치열하게 고민했다. 현장에서도 사람들의 반응과 컨디션을 예의주시했고, 이번 일정이 선물이 되기를 기대하며 마음을 다했다.


출처 : 현덕경영연구소(https://blog.naver.com/hyundukmgt)


맛있는 음식을 먹고 좋은 풍경을 보면 사람들의 마음이 조금씩 풀어지기 시작하는데, 충분히 쉬고 난 후에는 평창의 아양정이나 남산 길을 걸었다. 특히, 내가 좋아했던 길은 아양정이었는데 숲길을 조금 따라가다 보면 그저 하염없이 걷고 싶은 강둑길이 나온다. 왼쪽에는 깎아 빚은 듯한 절벽과 강이 있고 오른 쪽에는 한적하고 아담한 마을이 있는 곳.


절벽 앞에서 물수제비를 던지고 같이 돌담을 쌓으며 충분히 햇빛을 맞았고, 날씨가 좋은 날이면 그대로 돌에 누워서 명상을 했다. 그대로 누워서 햇빛을 맞으며 하늘을 올려다 보는 일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출처 : 현덕경영연구소(https://blog.naver.com/hyundukmgt)


그러고 나면 다시 숲길까지 걷는데, 그때부터는 한 명씩 줄을 지어 걷기로 한다. 규칙은 간단한데 핸드폰을 보지 않기 그리고 앞 사람의 발자국 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의 거리를 두고 걷기. 그렇게 20여분 남짓 혼자서 숲길을 걸으며 오롯이 혼자의 기분을 느낀다. 하루 중 정말 짧은 시간인데 생각해보면 그렇게 오롯이 혼자일 수 있는 시간, 모든 자극에 차단되어 오롯이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되었는지 생각해 본다.


짧지도 길지도 않은 딱 그만큼의 시간동안 걷고 나면 어느새 버스 앞. 사람들과 버스를 타고 평창 시장으로 가서 간단히 구경을 한 뒤, 메밀 전병 등의 주전부리를 먹는다. 이 정도 시간이 지나면 대부분 사람들의 마음이 풀어지는데, 풀어진 마음을 가지고 다시 돌뫼농원에 도착한다.


도착해서는 낮잠자는 시간. 우리 프로그램에 제일 중요한 건 약간 지겹다고 느낄 만큼의 여유 시간이었다. 강요하지 않을 것. 그냥 흐르듯이 지나갈 것. 그렇게 사람들이 한 숨 자고 오면 다시 요가 매트를 깔고 소장님과 스트레칭을 하고 명상을 한다. 그렇게 20분 남짓하고 나면 2시간은 넘게 푹 고아서 만든 닭백숙을 먹는다. 그리고 또 쉬다가 행복의 비밀코드 영상이나 어디가세요 봉삼씨 영상을 보고 별을 좀 보다가 취침.




2일차

다음 날에는 일찍 일어난 사람들은 강아지와 함께 산책을, 조금 늦은 사람들과 아침을 먹고 오전 시간을 시작한다. 오전에는 토크 시간. 사람들의 마음이 이제 많이 열렸기 때문에, 서로가 겪은 변화에 대해 그리고 각자의 불안에 대해 조금씩 이야기를 나눠본다. 여러 컨셉으로 진행했지만 가장 많이 진행했던 프로그램은 40대를 앞둔 이들을 한 프로그램이었다.


이 때도 규칙은 어렵지만 간단한데 그저 듣는 것. 듣는 것이다. 그렇게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각자의 사연을 알고 역사를 알고 나면 더 이상 김과장님, 이차장님, 박대리님이 회사의 과장, 차장, 대리가 아니라 그저 형, 삼촌, 아저씨로 느껴지는 순간이 왔었다. 각자의 상황과 불안을 가지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사람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임소장님은 그저 듣는 것에 온 신경을 집중하셨는데, 듣는 것이 그렇게 체력소모가 심하고 진이 빠지는 일이라는 것은 그때 알았던 것 같다. 그렇게 소장님은 온 몸과 마음을 다해서 들음으로써 사람들의 마음을 달래 주셨다.


그저 소장님이 마지막에 얘기해주신 해결책은 극심한 변화나 충격의 상황에서 우선 중요한 것은 생각하지 않는 것, 그저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어느새 너무 AS-IS(현황)을 분석하고 TO-BE(목표)를 설정하고, 그 사이의 GAP(차이)를 메우는 것에 너무 집중하는데 TO-BE 이미지가 너무 명확하면 늘 괴로울 수 밖에 없다고 했다.


3일차

우리가 이 사람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그저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성찰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제공하는 것, 그리고 들어주는 것 뿐이었지만 3일째가 되고 자기에게 편지를 쓰고 버스를 탈 때가 되었을 때, 사람들의 표정이 얼마나 평온했었는지, 그리고 서로가 서로에게 얼마나 감사했었는지.


프로그램이 끝나고 5년 뒤, 10년 뒤에 만난 사람들도 그때 그 시간들을 잊지 못한다며 말해주었었다. 그렇게 나는 1년에 10번도 넘게, 5년 간을 임소장님과 함께 평창에 갔었다.




나는 임소장님처럼 되고 싶었다. 사람들은 그게 개인적인 일이든 회사의 일이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면, 임소장님의 상담실을 찾아와서 이야기를 나눴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퇴사의 고민을 했을 때도 가장 먼저 찾은 것은 임소장님의 방이었다.


임소장님은 나를 그 회사에 인사팀으로 뽑아주신 분이기도 했었는데. HR임원이기도 하셨던 임소장님의 방을 우리는 내 방처럼 들락날락 거렸고, 어떤 날은 너무 힘이 들면 그냥 불이 꺼진 임소장님 방에 들어가 있다가 나오기도 했었다. 이상하게 그것 만으로 힘을 받는 느낌이 들곤 했었다.


인사담당자에 대한 회의가 들 때마다 임소장님을 생각했다. 소장님은 나의 롤모델이었다. 그렇지만 소장님의 인품이나 역량에 비하면 당연히 나는 한참 모지리였고 나는 늘 소장님을 동경하면서도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했었다.




그리고 나는 이직을 했고 자발적으로 임소장님 곁을 떠났다. 아직 배울 게 너무나도 많은데. 5년 정도 되는 시간만 함께 할 줄 알았더라면 더 많이 더 적극적으로 배우는 건데. 정말 열심히 해서 더 열심히 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던 전 직장 생활에서 남은 후회였다.


5년 뒤 헤이그라운드(스타트업 공유 오피스)의 임소장님이 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언젠가 우리 회사에 SLT같은 프로그램도 꼭 만들어야지 생각했었다. 그렇게 나는 작은 스타트업의 유일한 인사 담당자, 컬처디자인 팀장이 되었고, 이런 저런 일을 했다. 그리고 아마도 유일한 인사 담당자이었기 때문에 조직이 작을 때는 가끔 사람들이 이런 저런 상담을 하러 오는 경우도 있었다.


임소장님이었다면 무슨 말을 해줬을까를 늘 생각했다. 그러다 다시 임소장님은 그것보다는 듣는 것을 더 잘하시는 분이었지라는 걸 떠올렸었다. 그저 온 마음을 다해서 듣는 것. 그리고 그 사람의 마음을 생각해보는 것. 파트장님께서 해주셨던 경청은 감정을 듣는 것이라는 말을 다시금 새겨보며 듣기보다는 그냥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너무 하지는 않았나 반성을 해보기도 했다.


소장님도 그런 생각을 하셨으려나. 한참 모지리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이제 내가 임소장님과 같은 역할을 해야 할지도 몰라. 가끔 그런 생각을 하며 스스로의 모자람에 너무 부끄러워하곤 했었다. 내가 임소장님의 나이 정도가 되었을 땐, 비슷하게라도 될 수 있을까.


같이 밥 한끼하고 싶은 인사담당자가 될 수 있을까. 내가 이런 고민을 한다고 하면 소장님은 뭐라고 하실까. “그래, 그래” 라며 허허 웃어주실까. 늘 그랬듯 너는 늘 잘 할거라고 차나 한잔 하자고 불러 주실까. 늘 소장님과 팀장님, 파트장님, 마음을 나누던 인사팀 동료들이 보고싶었지만 자주 연락은 드리지 못했었다.




갑갑한 일이나 힘든 일이 있을 때는 회사 뒤의 남산에 올랐다. 임소장님은 평창이 아니라도 네가 발걸음이 닫는 어느 곳에서나 SLT를 할 수 있을 것이라 말씀하셨다. 임소장님의 유튜브(현덕마음공부 : https://www.youtube.com/@user-xd8rn5lv8b)를 라디오처럼 들으며, 혼자서도 남산에 오르며 걷고 명상했다. 내려오는 길에는 어느덧 마음이 풀릴 때가 많았다. 그렇게 매일매일을 훈련하듯 다녀오면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다가 회사 사람들과도 조금씩 같이 남산을 함께 갔던 것도 SLT 프로그램의 기억 때문이었다. 걷고, 생각을 비우고, 좋은 대화를 나누고, 건강한 음식을 먹는 것. 1시간 30분 짧은 시간이지만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사람들의 마음 근육을 키우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랐다.


그렇게 이십대 때부터 힐링캠프 요원으로 프로그램을 주관했던 나는 삼십대 후반이 되었다. 임소장님과 삼십대 후반이 된 사람들을 모시면서 배우는 기회를 얻은 덕분에 내가 그 나이 때가 되면 훨씬 더 건강하고 잘 대처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관리 방법을 알고 있으니, 열심히 관리하면 괜찮을 것이라고 건강을 과신했던 나의 착각과 오만 때문이었을까. 임소장님처럼 서른 여덟 즈음에 병에 걸리고 말았다. 임소장님도 그 즈음에 쓰러지셔서, 평생 관리 해야 하는 몸이 되셨는데 내가 이렇게 되어 버리다니.


우리는 늘 소장님과 소장님의 건강을 체크했다. 소장님은 하루에 이동할 수 있는 거리도, 집중하실 수 있는 시간도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늘 절제하고 조심하셔야 했다. 주무실 때도 양압기를 하고 주무셨어야 했는데, 늘 보면서 마음 아팠던 기억이 난다.


건강과 휴식의 중요성을 소장님을 따라다니면서 그렇게 배웠는데, 내가 이렇게 될 거라고는 전혀 생각을 못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평창에서 만났고, 무엇보다 소장님을 곁에 모시면서 그렇게 배웠고, 얼마나 힘들어하셨는 지를 봤으면서 스스로를 그렇게 만들어버린 나의 어리석음을 한동안  견뎌내기 어려웠다. 그때는 평창에서의  귀한 시간들 마저 스스로 물거품으로 만들어버린 것 같았다.







병을 알게 되고 소장님이 신입사원 때, 직접 쓰시고 '네 꿈을 펼쳐라'라고 싸인까지 해주셨던 '직장인 울랄라' 책을 10년 만에 다시 꺼내어 읽었다. 한장 씩 펼쳐갈 때마다 너무 속이 상했다. 소장님이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셨었는지가 이제 너무 선명하게 보였고, 얼마나 힘드셨을 지 이제 온몸으로 공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 모든 것이 나를 향한 메시지처럼 같았는데, 그렇게 경고해주셨음에도 신호들을 무시한채 제대로 지키지 못한 것이 후회되었다. 처음 읽었을 때는 비교적 깨끗했던 책에 사정 없이 밑줄이 그어졌다.


"일어섰고, 견뎠고, 배웠고 이전보다 더 행복해졌다고,
내게 일어난 재난에 진정으로 감사한다""


소장님의 책 첫 장에는 이런 문구가 작성되어 있었다. 소장님이라면 지금의 내 상황에서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실까, 그 동안 배웠던 걸 생각해보면 알 거 같기도 한데 그래도 소장님을 뵈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이 들었다. 그냥 소장님을 뵈는 것 만으로도 큰 용기와 힘이 될 거 같았다.


그 후로 몇 십년이 지난 후, 소장님이 우리에게 어떤 존재가 되셨는지 너무 잘 알았기 때문이다. 소장님은 나에게 꿈이었고 지금은 큰 희망이었다. 소장님을 담고 싶어서 경상도 출신에 이름은 다르지만 s대 출신에 상경계이고, 둘 다 대학시절 만난 선배를 대표로 모시고 있으며, 대기업에서 스타트업으로 이직한 전례를 보니 평행이론이라고 주장하던 나였다.


늘 소장님처럼 되고 싶었는데, 병에 걸린 시기와 증상까지 비슷하게 닮아버리다니. 이렇게 아픈 계기가 있으면 조금이라도 나도 소장님의 모습에 다가갈 수 있을까 싶으면서도, 이런 생각을 하는 게 잠깐 웃기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소장님이 너무 뵙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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