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쓸한 건 빈집이 아니라 나일 수도
한가람 아파트, 용피리 족발
어려서부터 정이 많은 아이였던 것 같습니다. 7살 때 아파트 경비원 아저씨께 수고하신다며 자판기에서 200원짜리 율무차, 코코아를 뽑아다 드리면서 기뻐했던 게 또렸합니다. 그 어린아이가 뭘 안다고 경비아저씨게 '수고한다'는 마음을 가졌을까요. 그럴 때면 아저씨는 고맙다며 잘 먹겠다고 말했습니다. 아저씨의 그런 대답이 좋았던 것 같습니다. 거기다 경비아저씨가 엄마한테 “아들이 참 속이 깊다”라고 말해주시면 더할 나위 없었죠. 그렇다고 실제로 생각이 깊고 착한 아이였냐고 하면 그건 확실히 아니었습니다. 정이 많은 것과 반대로 정말로 자주 삐졌습니다. 정이 많으면서 삐지기도 하는 이 성격은 도대체 뭘까. 나는 왜 극단적으로 정이 많으면서 극단적으로 삐졌을까 생각해봅니다.
엄마는 제가 족발을 엄청 좋아하는 줄 알고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게 아파트 5일장에 서는 족발을 매번 사달라고 했으니까요. 초등학교 2~3학년짜리 아이가 5천 원짜리 미니족발을 혼자 해치우는 걸 보면 당연히 ‘얘가 족발을 엄청 좋아하는구나’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엄청나게 족발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물론 싫어하는 것도 아니지만 ‘어떤 음식을 좋아하냐’는 질문에 단 한 번도 족발이 먼저 나오지 않은 걸 보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10살의 내가 매번 족발을 사달라고 한 이유는 따로 있었습니다. 바로 족발을 파는 아저씨 때문이었습니다.
10살 무렵이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 살던 한가람 아파트에는 매주 목요일이면 장이 들어섰습니다. 생선, 채소, 분식 같이 먹을거리가 즐비했습니다. 오전 일찍부터 시작해 5시면 닫는 주부들을 위한 장이었습니다. 그곳에 족발도 있었습니다. 족발 가게는 다른 곳보다 훨씬 늦게까지 있다가 장사를 끝냈습니다. 7시에 태권도를 갔다 오면 모든 곳은 정리를 하고 떠났고 족발을 파는 천막만 홀로 서있었습니다. 족발 아저씨는 족발을 삶고 썰고 있었습니다. 태권도가 끝나고 집에 가며 족발 가판대를 봤습니다. 아직 팔리지 않은 족발들이 많았습니다. 특대, 대, 중, 소, 미니족발, 모든 사이즈의 족발들이 수북했습니다. 아저씨는 남은 족발들을 들고 퇴근을 하곤 했습니다. 모두가 떠난 그 휑한 곳에서 남은 족발을 챙겨가는 그 아저씨가 안쓰러웠습니다. 그럴 때면 엄마한테 말했습니다. “엄마 족발 사줘”
‘용피리 족발’ 아직도 이름이 기억납니다. 작은 키의 안경을 쓴 선한 인상의 아저씨가 족발을 썰어줬습니다. 엄마와 함께 족발을 사러 나가면 엄마는 항상 말했습니다. “우리 성우가 여기 족발을 그렇게 좋아해요. 얘가 혼자 족발을 다 먹어요.” 그러면 아저씨는 고맙다면서 지긋이 웃었습니다. 5천 원짜리 미니족발인데도 그 위에 살코기를 수북이 얹어줬습니다. 물론 족발이 맛있는 것도 있었지만 평소 뭘 사달라고 보채지 않는 성격이었는데 족발만은 자주 사달라고 했습니다. 그게 엄마한테 부담이라는 생각을 그 순간에는 잠시 잊었습니다. 늦은 시간 식어있는 족발과 그걸 지켜보는 아저씨의 표정을 보는 게 마음이 불편했던 것 같습니다. 누군가 족발을 사가는 모습을 볼 때면 뿌듯했고 족발이 많이 남아있을 때는 사드릴 수 없다는 미안한 마음에 괜히 그곳을 피해 가기도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겨우 10살짜리 꼬맹이가 뭘 안다고 그 아저씨의 마음을 생각했을까 싶습니다. 족발 아저씨는 남은 족발을 다시 팔 수도 있었을 거고 어떻게든 처리했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내가 태권도를 하는 동안 이미 많이 팔고 남은 것들을 올려놨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냥 그 아저씨의 표정과 남은 족발이 주는 모습이 쓸쓸했습니다. 그저 나의 시선으로 아저씨를 바라봤습니다.
그건 아마 ‘투사’였던 것 같습니다. 외롭고 쓸쓸해 보이는 건 어쩌면 아저씨가 아니라 나였을지도 모릅니다. 10살짜리 아이가 뭐가 쓸쓸하고 외로웠던 걸까. 그건 태어나길 소심하고 삐지는 성격으로 태어난 것도 한몫을 할 겁니다. 오죽하면 별명이 삐돌이였으니까요. 나를 쓸쓸하게 만드는 건 나였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삐지면 스스로 고립되길 자처했기 때문입니다.
어려서부터 형은 끼가 많았습니다. 망우리 스타라고 할 정도로 아이 때부터 낯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을 잘 따랐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얼마나 이뻐했을까요. 반면에 3년 뒤에 태어난 저는 완전히 반대의 사람이었습니다. 엄마 손만 떠나면 동네가 무너져라 울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자연스레 사람들은 형에게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겠죠. 관심이 필요 없는 아이는 없을 겁니다. 낯을 가렸지만 누군가 알아봐 주기를, 관심 가져 주기를, 어린 나는 바랐을 겁니다. 그러니까 귀여운 능력은 없으니 삐져서라도 내 존재감을 알리려 했던 것 같습니다. 삐지면 먹을 거라도 하나 더 주면서 풀어주려고 하니까요. 그런데 삐질수록 오히려 고립됐던 것 같습니다. 아무리 어린아이라도 풀어주는 데는 한계가 있을 테니까요. 어렸던 나는 그래서 외로웠고 쓸쓸했나 봅니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서른 한 살이 됐지만 여전히 저는 어느 정도의 쓸쓸함을 간직하며 살아갑니다. 이제는 이 감정이 무조건 나쁜 거라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예전처럼 삐지는 행동으로 관심을 바라지 않을 정도로 성숙한 사람이 됐고 사회에서 적당히 어울릴 줄 아는 사람으로 지내고 있습니다. 그래도 쓸쓸함이라는 감정은 저를 이루는 하나의 특징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할머니의 빈집을 바라보는 감정이 남은 족발을 챙기는 아저씨를 보는 감정과 다르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오랜만에 할머니 집을 봤을 때 외롭고 쓸쓸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집을 더 나은 상태로 돌보고 싶었습니다. 이것 역시 저의 마음을 투사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세상의 모든 외로운 존재에 대해 마음이 가는 것이 곧 나의 외로움을 치유하는 일이기도 하니까요.
집을 고치며 생각합니다. 할머니 집을 고치는 건 다른 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결국 나를 향한 행동이라는 걸. 쓸쓸했던 나를 그래도 더 보살펴주고 싶다고. 나는 할머니의 빈집을 고치며 나를 더 알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