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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성우 Sep 06. 2021

코로나 시대의 건축 의뢰 법

제주의 주황 지붕

논산의 주황 지붕


아빠는 건축을 전공했습니다. 꽤나 이름 있는 대학의 건축학과라서 그 사실을 항상 자랑스럽게 여기셨습니다. 할머니 집을 새로 고쳐야 한다고 생각했을 때 아빠를 떠올린 건 당연할 겁니다.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수 십 년간 건축업계에서 일했으니까 아빠만큼 좋은 정보를 얻을 곳은 없었죠. “아빠 할머니 집 고치려고 하는데 뭐부터 해야 돼?” 들려오는 대답은 기대와 달랐습니다. “나도 모르지~나는 건축회사 2년 다니고 류마티스 관절염 때문에 2년 동안 아무것도 못했어. 그다음에 관광업체에서 가이드하고 그러다가 오래 다닌 회사가 다리 보수 업체라서 집 고치는 건 몰라.” 할머니 집을 고치면서 졸지에 아빠의 밑천을 까버렸습니다. 게다가 아빠는 현재 당구장 사장님입니다. 아빠의 직업 변천사를 보면서 가장으로 살기 참 힘들다 느낍니다.


둘째 이모부가 아는 사람이 있다는 말을 전해왔습니다. 논산에서 고등학교 영어 선생님으로 일하고 있는 이모부는 어딜 가든지 그룹을 지어서 노는 걸 좋아하는 핵인싸입니다. 논산에서도 배드민턴 그룹을 들어서 사람들과 활발하게 지내고 계셨습니다. 그곳에 집 공사를 맡아서 하는 회원이 있답니다. 잘 아는 사이니까 더 잘해줄 거라고도 말했고요.


이때부터 할머니 집수리는 제 생각과는 조금 다르게 흘러갔습니다. 어렴풋이 알고 있기로는 건축가를 대동해서 집을 둘러보고 내 생각을 이야기하는 그런 과정을 생각했습니다. 뭐 러브하우스 같은 프로그램을 보면 건축가가 심각한 얼굴로 집을 둘러보고 사람들과 얘기하는 그런 장면 말입니다. 하지만 건축가가 아니라 시골집을 전문으로 고치는 아저씨에게 건축의 심오한 의미를 전달할 수 있을까 싶었습니다. 할머니 집을 고치는 건 저에겐 나름 인생을 담은 일이니까요! 솔직히 기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딱히 아는 건축가도 없었도 건축사무소에 의뢰했다가는 비용을 감당할 수 없으니까 논산의 아저씨와 작업을 하기로 했습니다.


슬레이트 지붕 철거 공사가 빠르게 잡히고 지붕을 걷어내는 동시에 공사가 들어가야 했습니다. 지붕을 열어놓고 집을 방치할 수는 없으니까요. 제가 원하는 집의 디자인을 말씀을 드려야 하는데 아직 집을 어떻게 고쳐야 할지 준비가 되지 않았습니다. 책도 읽고 참고할 것도 많이 찾아보고 싶었습니다. 그때는 여수에서 생활을 정리하고 서울로 이직하는 기간과 맞물려서 시간도 정신도 없었습니다. 2주 동안 송별회를 하느라 저녁에 술 마시고 아침에 해장하는 생활을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차분하게 공사를 준비하고 싶었던 마음과는 다르게 상황이 그렇지 않았습니다. 집 리모델링 계획은 그냥 아저씨의 손에 맡겨졌습니다.



4년, 첫 회사의 마무리


여수에서 4년을 다닌 회사를 퇴사하고 선배와 제주도로 여행을 갔습니다. 제주도를 자전거로 한 바퀴 도는 일정이었는데 그 와중에도 카톡으로 할머니 집 이야기를 했습니다. 마침 슬레이트 지붕을 철거하고 어떤 지붕을 올릴지에 대한 얘기가 오갔습니다. 제주에는 아기자기한 주택들이 많습니다. 지붕의 색도 알록달록 이뻤고요. 자전거를 타고 가면서 제주의 지붕들은 하나하나 래퍼런스가 됐습니다. 그러다 따듯한 주황색 지붕을 만났습니다. 이거다! 빛바랜 주황색 지붕은 제주만큼이나 할머니 집에도 어울릴 것 같았습니다. 자전거를 타면서 빠르게 사진을 찍어 엄마에게 보냈습니다. “엄마 주황색 지붕으로 하자.”


자전거를 타며 찍은 제주 집의 지붕

그런데 이미 지붕 색이 정해져 있다는 카톡이 울렸습니다. 그것도 빨간색으로! 그건 아니  일이었습니다. 시골 업체다 보니 개인화된 맞춤식 리모델링보다는 정해진 공장형 업체에서 지붕을 가져와 그대로 얹었습니다. 할머니 집이 시골에 비슷한 생김새의 집이   그려졌습니다. 그래도 젊은 손주가 고치는 집인데 어른들이 고친 다른 집과 똑같은 시골집이 되지 않았으면 했습니다. 건축 담당하는 아저씨에게 다시 지붕 색을 바꿀  없냐고 물었습니다. 이미 공장에 주문이 들어갔는데 일단 확인해본다는 대답이 왔습니다. 주문을 취소할  있는데 요즘은 주황색 지붕이  안나와서 없을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주황 지붕이 안되면 후보로 파란색 지붕으로 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때부터 핀터레스트 인스타그램에 나오는 시골집, 인테리어, 집 사진은 몽땅 저장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진을 카톡방에 우다다 올렸습니다. 이렇게 해주세요! 이모부와 이모를 통해 건축 업체한테 전달하는 방법이었습니다. 솔직히 나도 내 방 하나 꾸미는 게 어려운 사람인데 집을 고친다는 건 여간 부담스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어쩌겠나요. 이미 일은 저질러버렸는데요. 지금 현재에서 최선을 찾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진을 올리면 이모들이 의견을 달았습니다. 나이 차이가 있다 보니 인테리어를 바라보는 눈이 달랐습니다. 나는 깔끔한 흰 벽지를 원했는데 이모들은 알록달록한 것을 원했습니다. 나는 심플한 흰 타일을 화장실에 하고자 했는데 이모들은 검정에 가까운 색을 원했습니다. 아마 살림을 오래 해 온 주부의 입장에서 생각해낸 지혜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할머니 집이 쉬는 공간이 되길 원했습니다. 희로애락이 얽힌 사는 공간보다는 언제든 도망갈 수 있는 공간이 되었으면 했습니다. 이모들은 대체로 내 의견을 따라줬습니다. 처음 시작을 하자고 한 것도, 돈을 내겠다고 한 것도 저였으니까요.



4월 20일, 카톡방이 만들어졌습니다. 나 이모부 엄마 이모 둘 총 5명의 사람이 할머니 집을 어떻게 고칠지 얘기하는 방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지붕부터 화장실 타일까지 모든 걸 결정하기로 했습니다. 집 리모델링의 최첨단식 리모트 건축 의뢰였습니다. 마치 코로나 시대의 리모트 워크처럼 원격으로 건축 의뢰 방법이었습니다. 그렇게 건축의 ‘기역’도 모르는 5명의 할머니 집 공사가 시작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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