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성우 Oct 23. 2021

시골 마을 잔칫날


어릴 적 기억 속 어딘가에는 할머니 집 마당에서 돼지 통구이를 굴렸던 모습이 숨어있다. 누군가 돌아가셨던 장례식이었는지 누군가 결혼하는 혼사 날이었는지, 무슨 일로 벌린 잔치였는지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 시절 잔칫날의 기분은 생생하다. 가깝게 지내던 동갑내기 친척과 함께 아직 핑크빛의 돼지가 새까맣게 그을릴 때까지 불 앞을 지켰다. 6~7살의 눈에 띄지 않는 꼬마 아이였던 우리는 통돼지 바비큐와 잔치 국수, 전을 마음껏 먹으며 잔치의 즐거움을 누렸다. 정말 많은 사람이 집에 드나들었고 그동안 보지 못했던 낯선 얼굴들이 많았다. 낯섦과 정겨움이 공존하는 묘한 설렘이 잔치 이벤트에 있었다. 단 한 번 있었던 마을 잔치의 기억이다.


시골집을 고치면 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 집을 완성한 날에 모든 친척들이 다 모여서 그 옛날처럼 마을 잔치를 벌여보는 것이다. 통돼지 바비큐를 가운데에 놓고 상을 펴서 모두가 막걸리에 전을 먹으면서 얼근하게 취하는 밤을 보내고 싶었다.


친척들이 모이면 최소 30명이었다. 할머니의 딸 3명, 그들의 자녀 6명, 작은할아버지의 딸1 아들3 자식8명. 다 모인다면 스무 명이 넘는다. 거기에 시골 마을은 씨족사회라서 대부분 피로 이어진 친척 관계인 분들이 살고 계셨다. 친척이 아니라도 반세기를 함께 지낸 마을 사람 모두를 당연히 초대해야 했다. 이렇게 사람들이 모두 오면 그야말로 성대한 마을 잔치를 벌이는 것이었다.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을 한 자리에 모으고 싶었다.



시골집에 가져갈 살림

7월 말 집이 완성됐다. 당연히 코로나 때문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한 곳에 모을 수 없었다. 코로나가 핑계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동안 연락을 하지 않았던 친척들에게 모이자는 말조차 하지 않았다. 매번 모이던 이모들만 오기로 했다.  엄마와 서울에 사는 작은 집 이모와 함께 논산으로 향했다. 논산 이모네 집에 도착해 둘째, 셋째 이모와 할머니를 모시고 새로 고친 집으로 갔다.


할머니는 복도에 걸터앉아 있었다.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자기를 다시 집에 두고 가려한다고 생각해서였다. 요를 펴드리고 눕게 했다. 원래 주무시던 그 자리였다. 70년 만에 집을 리모델링했는데 자식들 마음은 모르는지 심술을 부리셨다. 이게 치매 때문인지 아니면 할머니 성격인지 오락가락한다. 하지만 이럴 때는 치매에 조금 기대서 사람을 미워하지 않는 게 좋다.



골목을 따라 누군가 오는 소리가 들렸다. 매우 느리게 서서히 다가왔다. 근처 사시는 할머니였다. 하나 둘 모여 어느새 마루에는 동네 할머니들이 북적했다. 할머니는 오랜만에 만나는 할머니들을 보고 손을 잡으며 울먹였다. 뭐가 저리 서러우신지 눈물이 마를 새가 없었다. 그건 반가움에서 나오는 거라기보다는 치매가 심해지면서 자동으로 울먹거리는 무조건 반사 같은 것이었다. 할머니를 아이라고 생각하는 게 편하다. 기가 드센 아이다. 할머니들이 10명 정도 왔으니까 10명의 할머니들 모두에게 울먹거렸다. 이 좋은 날에 할머니의 눈물은 마르지 않았다.


엄마는 고기를 구웠다. 그때 엄마는 엄마라기보다 할머니의 딸 같았다. 마을 어르신들을 모시는 장녀의 모습이었다. 이럴 때는 괜히 나도 어른스러운 모습보다는 어리광을 부리고 싶어 진다. 마치 어렸을 때처럼 고기 굽는 엄마 옆에서 고기도 주워 먹으면서 혼나기도 했다.


아무럴 것도 없는 집들이가 끝났다. 마을 잔치를 꿈꿨던 것은 꿈과 같았다. 고기를 구워 먹고 술을 마셨다. 아무것도 일어나지도 변하지도 않았다. 당연히 집으로 변화가 생기진 않겠지만 너무나도 아무런 균열도 가지 않았다. 무진동의 상태였다.



술을 많이 마시고 잤다. 이모들은 이모집 강아지가 혼자 있어 15분 거리의 이모집으로 돌아갔다. 놓고 갈까 봐 불안해하는 할머니를 옆에 두고 엄마와 나란히 누웠다. 새벽에 잠시 깨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집에서 나는 무엇을 얻고 싶었을까’ 아무도 공감하지 못하는 일을 혼자 한 건 아닐까 싶었다.


과거의 정? 그런 게 처음부터 있었나 회의감이 들기도 했다. 과거는 언제나 미화되는 법이니까. 가족 간의 끈끈함? 오히려 집을 고치며 더 많은 것을 알게 됐다. 생각보다 가족은 서로에게 상처를 남긴 존재라는 것을. 집안의 이야기를 듣고 다니면서 알게 됐다. 우리 집안도 평탄한 집안은 아니었다. 싸우고 의절하고 돌아서는 흔한 이야기들이 우리 가족에게도 있었다. 집에 기대를 했기에 실망도 컸나 보다.


원망도 했다. 왜 그렇게 독하게 살아오셨냐고. 너무 독하게 살아서 본인에게도 독이 옳아갔을 정도로. 이렇게 즐거운 날에도 왜 즐기지를 못하시냐고. 모두가 즐기며 사는 세상에 어떤 것에도 즐기지 못하는 게 맞냐고. 이런 회의적인 감정들을 걷잡을 수 없었다.



집을 완성했다는 좋은 일에 이런 이야기를 쓰고 싶지 않았다. 집에 대한 이야기를 담백하게 하고 싶다. 하지만 집 그 자체로 놓고 이야기를 하기가 쉽지 않다. 집은 감정이 얽혀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집을 고치며 생각했던 무지갯빛 감정들은 모두 허상이었다고. 가족이라는 건 아름답게만 포장하기는 정말 어려운 존재이다. 평생을 함께 살며 사랑하고 상처 주며 살아왔다. 그러니 서로에 대한 감정은 끈적한 액체와 같다. 떼려야 뗼 수는 없는, 그렇다고 완전히 붙어있기도 썩 유쾌하지 않은 그런 것 말이다.


또 분명한 건 있다. 집을 고치면서 나는 그 어느 때보다 가족에 대해 많이 생각했다. 그것이 좋은 감정이든 나쁜 감정이든, 집을 고치는 내내 가족에 대해 생각했다. 할머니는 왜 저럴까 엄마는 왜 저럴까, 아빠는 또 왜 저럴까, 그리고 그 속에서 나고 자란 나는 왜 이런 걸까. 그런 생각들에 몰입할 수 있었던 기간이었다.


그럼에도 잘못 살아오지 않았다. 저렇게 살아오느라 누군가에겐 상처를 줬고 스스로에게도 상처를 냈지만 결국 잘못된 건 아니다. 이 집의 존재가 그걸 증명한다. 가난한 과거이지만 과거를 부정할 수는 없다. 겸허하게 끌어안고 현재를 사는 것, 그것이 좋지 않은 과거일지라도 말이다. 나 역시 수많은 결함과 단점을 끌어안고 사는 인간이기에 그런 나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노력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내가 난 곳과 자란 곳을 바라보는 것을 통해 가능한 것 같다. 항상 문제는 잘못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잘못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에서 시작한다.



할머니 집의 겉은 깨끗해졌지만 속은 아직은 낡은 것 그대로다. 할머니도, 엄마도 지난 가난의 때는 벗었지만 속까지 가난에서 벗어나진 못했다. 차라리 잘된 것 같다. 그들의 속까지 알 수 있게 돼서. 이렇게 서로를 더 잘 알게 되면 정말 가족이 더 가족 다워질 날이 언젠가 올 거라고 생각한다. 가끔은 공허한 웃음보다 꽉 찬 슬픔이 나을 때가 있다.

이전 09화 요강과 화장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