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한|예민해서 다행이야

파란 감정 속의 초보 프리랜서 02. 우울한(Depressed)

by 쏘스유


이번 글의 중심 감정 '우울한(Depressed)'



나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방법은 간단하다. "빨리 해." 세 글자면 충분하다. 무엇이든 '빨리 하는 것'을 잘하지 못하는 탓이다. 잘하지 못하니 빠르게 하는 것을 싫어한다. 고등학생 시절, 학원 선생님께서 "10분 줄 테니 암기하고 쪽지시험 보자."라고 말씀하시면, 나는 미리 포기하고 전부 틀린 적도 있다. 학교 체육 시간에도 순발력과 민첩성을 필요로 하는 운동은 모두 성적이 좋지 않았다.


그 대신 '꾸준히 하는 것'을 잘한다. 잘하다 보니 꾸준히 하는 것을 좋아한다. 맛있는 음식을 발견하면, 질릴 때까지 매일 그 음식을 먹는다. 좋아하는 음악에 꽂히면, 가사를 외울 때까지 그 곡만 반복해서 듣는다. 사람과 인연을 맺으면, 오랫동안 정을 이어가기 위해 노력하고 의리를 지킨다. 그래서 나는 새로 사귄 친구들보다 10년 이상 오랜 세월을 함께 보낸 친구들이 많다.


빨리하는 것을 싫어하고 느려도 꾸준히 하는 것을 좋아하는 이유는 내가 예민하기 때문이다. 나는 '시각, 후각, 청각, 촉각, 미각' 등의 다섯 가지 감각에 모두 예민하다. 다른 사람들은 보지 못한 바닥 위의 벌레를 혼자 발견하고 놀라는 경우가 많다. 멀리서 피어오르는 연기 냄새를 가장 먼저 맡는다. 소음이 심한 곳에 가면 귀가 아파서 오래 머무르기 힘들다. 잠옷과 침구가 부드럽지 않으면 잠을 설친다. 다 같이 요리를 먹을 때 종종 입맛에 맞지 않아서 일찍 수저를 내려놓기도 한다.


행동적인 측면도 마찬가지다. 주방에 그릇이 일렬로 정리되어 있지 않으면, 애써 무시하려고 노력해도 계속 신경이 쓰인다. 책장에 꽂힌 책들도 크기 순서대로 배열되어 있지 않으면 눈에 거슬린다. 아무리 바빠도 그릇을 정리하고 책을 가지런히 꽂아야 마음이 편안하다. 일기를 쓸 때에도 모든 글자를 예쁘게 적을 수 있도록 노력한다. 절반 이상 사용해도, 내 글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이어리를 아예 새롭게 구입하기도 한다. 그래서 내 책장에는 쓰다만 다이어리가 많다. 회사원 시절에도 마찬가지다. 내가 작성한 보고서에 오타가 있거나, 줄 간격이 맞지 않거나, 색상 배치가 잘 어우러지지 않으면 반드시 고쳐야 했다. 어릴 때부터 단련된 실력 덕분인지, 회사 동료들은 보고서를 작성한 뒤 꼭 나에게 가져와 사전 검토를 부탁했다.


삼성서울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홍진 교수님께서 개발한 예민함 테스트를 해본 적이 있다. 총 28가지 문항 중에서 7가지 이상 해당되면 예민한 편이라고 한다. 나는 총 20가지 문항에 '그렇다'라고 체크했다. 직접 두 눈으로 테스트 결과까지 보니, 예상이 현실로 바뀌었다. 나는 공식적으로 예민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연구에 따르면 시인의 50%, 음악가의 38%, 화가의 20%, 조각가의 18%, 건축가의 17%가 우울증을 앓는 것으로 알려졌다. 빈센트 반 고흐, 슈베르트, 말러, 헤밍웨이도 우울증을 앓았던 것으로 유명하다. (중략) 또 예술가의 뇌가 우울증 같은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의 뇌와 비슷하다는 견해도 있다. 일반인의 뇌는 수많은 자극 가운데 필요한 것만을 선택해 받아들이지만 정신질환자는 자극을 걸러내지 못해 모든 자극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미술가나 음악가 등 예술가 역시 색채나 형태의 변화 등에 있어 일반적으로는 알아채지 못하는 미미한 자극에도 예민한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예술가는 왜 우울증을 앓는가>, 헬스코리아뉴스, 임도이 기자, 2019.01.24.


예술과 우울의 상관관계를 설명한 뉴스 기사를 읽으며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 역시 예민한 성격 탓에 우울한 감정을 자주 느꼈기 때문이다. 작은 사건이 일어나도, 일반 사람들에 비해 훨씬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특히 직장에서 보내는 시간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변수가 많은데, 감정적으로 유약한 나는 변수가 생길 때마다 두려웠다. 상사의 기분 역시 예상할 수 없는 변수였다. 같은 일을 해도 상사의 기분에 따라 칭찬을 받기도 하고 혼이 나기도 했다. 오늘 상사의 기분은 어떨지 알 수 없어서 출근할 때부터 스트레스를 받았다. 동료들이 별다른 생각 없이 툭 내뱉는 말에도 나는 하루 종일 곱씹으며 속으로 끙끙 앓았다. 예정에 없던 갑작스러운 야근을 해야 할 때면, 상상 속의 지옥으로 떨어지는 기분도 들었다.


서퍼들은 바람이 세게 부는 날을 좋아한다. 높고 거친 파도를 즐기는 덕분이다. 하지만 수영도 할 줄 모르는 나는 바람이 불 때부터 공포스럽다. 파도를 타고 넘으면 재밌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막상 파도를 보기도 전에 미리 도망칠 생각부터 한다. 자신감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타고난 내향적인 성격까지 맞물려, 나의 고민과 스트레스는 밖으로 향하지 못하고 자꾸만 안으로 파고들었다. 달궈진 숯이 자꾸만 마음속에 하나씩 늘어나, 활활 타오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뜨거운 감정을 혼자 감당하기 힘들 때마다 나는 책을 펼쳤다. 파도를 피해 일단 책 속으로 도망치는 것이다. 두려움, 외로움, 불안함, 초조함, 스트레스 등의 모든 감정을 버리고 싶었다. 다행히 책은 내가 피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주었다. 하지만 자꾸만 이 방법을 사용하다 보니 면역력이 생겼다. 책을 읽으면서도 다른 잡념이 떠오르는 멀티플레이 기능이 탑재된 것이다. 그때부터 나는 책을 거꾸로 읽기 시작했다. 책을 뒤에서부터 읽으면 내용을 파악하기 어려운 탓에,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없어서 책에만 집중할 수 있다. 그리고 특별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책 속 주인공의 삶을 거꾸로 살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책 속 주인공의 삶을 거꾸로 살아보는 것에는 세 가지 장점이 있다. 첫 번째는 주인공의 장밋빛 미래를 가장 먼저 볼 수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주인공에게 빙의되어 '결국은 잘 될 것'이라는 희망과 용기를 얻는다. 두 번째는 장밋빛 미래를 읽고 난 뒤에, 주인공이 겪는 수많은 고난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이다. 내가 책을 펼칠 때에는 보통 두 번째 단계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주인공에게 동질감을 느낀다. 결말을 미리 읽은 덕분에, 밝은 미래 앞에는 높은 확률로 장애물이 있다는 사실을 되새긴다. 고난과 고비에도 결국 끝이 있다는 사실 역시 내게 큰 위로가 된다. 소설뿐만 아니라 만화, 에세이, 자기 계발서 등 다양한 문학 장르에 이 단계가 있다.


마지막 세 번째 장점을 가장 힘주어 말하고 싶다. 앞의 두 가지 단계를 거친 뒤 처음으로 돌아가면, 책 속 주인공의 탄생 배경에 남들과 다른 점이 있다는 사실에 집중하게 된다. 내가 <해리포터> 시리즈에 열광한 이유 중 하나도 주인공 해리포터에게 선천적으로 탁월한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영웅 서사' 구조를 지닌 책은 대부분 이렇게 특별한 탄생 배경이나 고유한 재능이 있다. 책이 맨 앞장에 도달할 때쯤이면, 나의 타고난 특별한 재능이 "예민함"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끝나지 않을 것처럼 막막하고 우울한 감정 덕분에, 어릴 때부터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책을 읽고 꾸준히 글을 썼다. 의도하지 않았는데, 꾸준함이 발휘하는 강력한 마법 덕분에 자연스럽게 속독 능력과 글쓰기 실력이 늘었다. 가장 중요한 점은 예민함이 재능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부정적이라고 생각했던 우울함의 뒷면에는 이렇게 긍정적인 결과가 존재한다.


하지만 그 뒷면의 긍정적인 결과도 자꾸 꺼내서 삶에 적용하지 않으면 실제로 체감하기 어렵다. 어린 시절부터 써 내려간 여러 권의 두툼한 일기장에는 우울한 감정으로 가득했다. 그래서 퇴사를 하고 홀로 버텨야 하는 프리랜서가 되면, 더욱 우울한 사람이 될까 봐 걱정스러웠다. 불안정한 수입과 소속감의 부재 등 퇴사를 망설인 이유는 너무나 많았다. 그중에서도 단연 가장 큰 이유는 내 안의 우울감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질 것 같아서 두려웠기 때문이다. '커다란 파도 앞에서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으면 어떡하지'하는 고민이 들었다.


고민은 고민이기 때문에 크게 느껴지는 법이다. 막상 현실이 되면 그 몸집이 줄어든다. 퇴사한 날이 딱 그렇다. 내 안의 우울감은 프리랜서가 되자마자 서서히 옅어졌다. 직장에서는 예민함이 독이었는데, 프리랜서는 예민함을 드러낼수록 득이 된다. 오히려 예민함을 마음껏 발휘해야 한다. '천천히, 꾸준히, 꼼꼼히' 성향은 프리랜서 크리에이터 및 작가로 활동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지금처럼 글을 쓸 때, 한 문단에 불필요한 단어가 반복되지 않도록 신경을 기울인다. 한 문장에도 의미를 지닌 단어가 고르게 분포되도록 배치한다. 현재 연재 중인 <프리랜서 감정 처방전>의 소제목 "나에게서 한 발자국 떨어지기", "요가하듯 유연하게 살아보니" 등도 의도적으로 네 글자씩 배치한 것이다. 내가 만드는 글과 그림 등의 창작물에는 예민함이 한껏 녹아있다.


창작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에게 예민함은 축복이다. 일반인이라면 스쳐 보내기 쉬운 그 무언가를 기어코 잡아채, 깊게 사유하고 끝까지 파고들어 세상에 없던 새로운 것으로 탄생시킨다. 털끝을 스치는 작은 자극 하나에도 예민하게 반응해 감각의 떨림을 분석하고, 그것을 어떻게 다른 사람들과 공유할지 고민한다.


얼마 전 업무상 취재를 하기 위해, 동네 노래자랑 대회에 방문했다. 80세를 훌쩍 넘긴 할머니가 노래를 부르셨다. 옛날 노래를 좋아하지 않아서, 평소였다면 무감각하게 흘려보냈을 것이다. 하지만 이날은 달랐다. 할머니의 구슬픈 노래에 마음이 저리고 눈물이 고였다. 노래의 한 소절마다 할머니의 절규가 담긴 것 같았다. 노래가 끝난 뒤, 할머니와 사회자의 대화에서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할머니는 작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생각하며 이별의 노래를 불렀다고 하셨다. 할머니의 절절한 그리움이 담기지 않았다면, 그 노래는 이 세상에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감정이 세포 깊숙이 파고들 때, 그 감정은 하나의 작품이 된다. 존재의 결핍이 역설적으로 세상에 없던 작품을 탄생시킨다.


우울한 감정을 느낀다면, 먼저 그 사실을 충분히 받아들이는 것이 좋다. 천천히 해도 괜찮다. 그 단계를 거쳤다면, 이제 생각을 다르게 가져보자. 특수교육학에는 '인지 재구조화(cognitive restruction)'라는 용어가 있다. 기존에 개인이 인식하고 있는 것을 다시 재구성해서 사고의 방식을 변경하는 것이다. 나는 프리랜서가 된 후, 내가 예민한 사람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인지 재구조화를 이뤘다. 예전에는 누군가 나에게 "왜 이렇게 예민해?"라고 물으면 발끈하며 변명했지만, 이제는 다르게 반응한다. "그건 프리랜서에게 꼭 필요한 능력인데, 인정해줘서 고마워!" 소설 속 주인공이 특별한 탄생 배경을 지녔듯, 나는 예민함을 타고났다. 이것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니 오히려 우울한 감정이 사라졌다. 예민함은 축복이다.


마지막으로 유의할 사항은 이번 파트에서 전하는 감정이 '우울감'이라는 사실이다. 우울감은 '우울증'과 다르다. 우울감은 스스로 견딜 수 있지만, 우울증은 혼자서 극복하기 힘들다. 우울증이라고 생각된다면, 망설이지 말고 전문가에게 도움을 요청하자.


keyword
이전 05화의기소침한|나에게서 한 발자국 떨어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