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감정 속의 초보 프리랜서 03. 실망스러운(Disappointed)
"잠깐 앉아봐." 낮게 깔린 엄마의 목소리는 나를 움찔하게 만들었다. 어린 시절부터, 폭발하는 뜨거운 감정보다 가라앉은 차가운 감정이 훨씬 무섭다고 생각했다. 무드 미터에서 빨간색 사분면과 파란색 사분면은 모두 쾌적함이 낮은 상태라는 것은 동일하지만, 활력에 차이가 있다.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감정은 쾌적함과 활력이 모두 낮은 파란 감정이다.
스물다섯 가지 파란 감정들 중에서 특히 '실망스러운' 감정은 마음에 "쿵"하고 바위가 떨어진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실망스럽다는 것은 바라던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 마음이 상한 감정을 일컫는다. 실망스러움을 설명하는 여러 가지 단어들 중에서 '바라던'이라는 단어가 가장 크게 눈에 들어온다. 무언가를 바라는 마음. 즉, 기대와 희망이 섞인 이 마음은 그 자체로 내가 인생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다. 퇴사를 할 수 있었던 것, 프리랜서로 새 출발을 한 것, 궁극적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이유까지 모두 기대와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실망스러운 감정이 들 때는 힘들어도 그 원인을 자세하게 들여다봐야 한다. 뭉뚱그리지 않고 하나씩 객관적으로 살피다 보면, 오히려 감정의 불꽃을 잠재울 수 있다. 실망스러운 감정은 세 가지 관점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내가 다른 사람에게 실망할 때, 두 번째는 다른 사람이 나에게 실망할 때, 마지막 세 번째는 내가 나 자신에게 실망할 때다.
1. 내가 다른 사람에게 실망할 때
부모님의 엄격한 교육관 아래, 어릴 때부터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사람으로 자랐다. 그 덕분에 혼자 계획을 세우고 꾸준히 노력해 결과를 달성하는데 탁월한 소질이 있다. 하지만 이런 성향이 회사에서는 단점이 될 때가 많았다. 회사에서는 목표 수립부터 실천 방식까지 상명하달로 이뤄졌다. 내가 담당자인데, 아이러니하게 그 일에 내 의견은 개입되지 않았다. 수직적인 회사의 업무 방식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태생적으로 내향적인 성격과 외동딸이라는 성장 환경까지 어우러져 조직에 어울리는 것이 어려웠다. 그래서 프리랜서를 선택하며, 이 부분의 변화를 가장 크게 기대했다. 하지만 실제로 겪어보니, 프리랜서에게도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하게 혼자서 하는 일은 없었다.
크리에이터로 활동하는 나는 혼자 일할 수 없다. 나만 보는 일기가 아닌, 타인의 마음에 닿는 글을 쓰기 위해서 철저히 대중 속에 머물러야 한다. 다른 사람들과 끝없이 대화를 나누고, 그 속에 담긴 생각을 더욱 깊게 들여다보아야 한다. 의뢰받은 콘텐츠를 제작할 때에는 클라이언트와 의견을 맞추기도 한다. 작가로 일할 때에도 마찬가지다. 혼자 방에 박혀 글을 쓴다고 해도, 결국 편집부터 홍보까지 각 단계를 많은 사람들과 함께 해야 한다. 집단지성이 있어야 반짝반짝 빛나는 창작물이 탄생하는 것도 사실이다. 새삼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라는 것을 되새긴다.
이렇게 직업의 변화가 찾아와도, 결국 사람들과의 연결고리를 유지한다. 사람 덕분에 웃고, 사람 때문에 운다. 중요한 인터뷰를 갑자기 취소하는 경우, 세부사항 조율까지 끝낸 협업을 중단하는 경우, 사전 미팅 때와 전혀 다른 제품 또는 서비스를 제시하는 경우 등은 내게 커다란 실망감을 안긴다. 무엇보다 콘텐츠 창작의 과정을 자판기 버튼을 누르면 나오는 것 정도로 생각하는 클라이언트를 만나면 그 감정이 더욱 거세진다. 나에게 일이란 단순한 돈벌이가 아닌, 자아실현의 수단이자 존재의 이유다. 아침에 눈을 뜨면, 글을 쓸 생각에 가슴이 설렌다. 내가 쓴 글을 보고, 단 한 명이라도 삶의 기대와 희망을 되찾길 바란다. 이것이 내 인생의 사명이다. 일이 고단해도 그 과정을 즐기며 충만한 성취의 감정을 공유하고 싶은 마음은, 때때로 실망과 함께 와르르 무너진다.
"두 번째 화살을 맞지 말라." 실망스러운 감정이 범람할 때마다 나는 붓다의 명언을 떠올린다. 화살은 외부에서 날아온 것이라 피할 수 없지만, 화살에 맞은 현실을 비관하며 스스로 그 고통을 부풀리지 말라는 뜻이다. 다른 사람의 언행은 그 사람의 자유의지이니 피할 길이 없다. 하지만 감정을 느끼는 것은 내가 주체인만큼, 얼마든지 그 경중을 선택할 수 있다. 바로 이때 프리랜서의 장점을 마음껏 발휘하면 좋다. 회사의 상사는 내가 선택할 수 없지만, 클라이언트를 포함해 함께 일하는 사람은 내가 선택할 수 있다. 끝내 해결 방법이 보이지 않으면, 조용히 마음속으로 이별을 한다. 프로젝트의 종료와 함께 인연도 정리한다. 굳이 화를 내거나 불필요한 대응을 할 필요가 없다. 기대한 마음에 상처가 났지만, 나와 맞는 사람을 분별하는 눈을 얻었다. 그것이 상처를 치료하는 소독약이 된다.
한 단계 더 나아가, 나의 기대 수준이 적당했는지 되돌아본다. 기대와 실망은 동전의 앞면과 뒷면 같아서 기대가 클수록 자연스럽게 실망이 따라온다. 실망감이 클 때면, 뒤집어 생각해본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너무 큰 기대를 한 것은 아닐까.' 한때는 더 이상 실망하고 싶지 않아서, 기대를 내려놓으려고 노력한 적도 있다. 기대를 낮추면 실망도 줄어든다. 하지만 설렘과 호기심도 함께 줄어든다. 무미건조한 삶 속에서 감정의 온도가 낮아진다. 그것은 내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삶의 모습이 아니었다. 여러 가지 시도 끝에, 지금은 기대를 하되 최악의 상황도 예상하며 실망스러운 감정에 크게 상처받지 않는다.
2. 다른 사람이 나에게 실망할 때
회사원일 때는 생각이 항상 1번에 머물렀다. 즉, 내가 다른 사람에게 실망한다는 사실에만 집중했다. 나와 결이 다른 회사의 시스템과 상사의 성향이 싫었다. 점심시간이 되면, 동료들과 함께 회사와 상사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을 토로했다. 무형의 생각이 실체인 말이 되면, 그 마음은 더욱 분명해진다. 억지로 참고 견디는 마음이 커지니, 마음에 빈 공간이 줄어들었다. 퇴사를 하고 프리랜서가 되자, 마음에 여유가 생겼다. 그때부터 변화가 시작되었다. 조금 더 객관적으로 나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마음의 방향이 바뀌자 생각도 바뀌었다. '반대로, 내가 다른 사람에게 실망스러운 감정을 준 적은 없을까?'
내가 다른 사람에게 기대를 하듯, 다른 사람들 역시 나에게 기대를 한다. 게다가 나는 그동안 쌓은 경력을 포트폴리오로 예쁘게 담아 어필하는 프리랜서다. 기대를 품게 하는 것이 내 직업의 필수 조건이다. 앞서, 기대와 실망은 한 세트라고 했다. 나를 스쳐간 꽤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실망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아찔하다.
그럴수록 자신감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해결되지 않는 고민을 뒤로하고, 결국 퇴사할 수 있었던 이유는 오로지 자신감 하나였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잘하는지 충분히 알고 난 후 생긴 마음이다. 프리랜서가 된 후 내 선택에 책임을 지고 목표를 현실로 만들기 위해, 일을 할 때마다 마지막인 것처럼 최선을 다한다. 초보 프리랜서지만 업무 단가를 낮추지 않는다. 단가에 맞는 능력을 보이기 위해, 끝없이 배우고 도전한다. 사소한 그 무엇도 모두 나의 포트폴리오가 된다는 생각으로 치열하게 일한다. 세상의 모든 프리랜서가 나처럼 행복하게 일하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업무 스킬과 노하우를 묻는 사람들에게 지식과 경험을 아낌없이 나눠주기도 한다.
단단히 마음을 먹어도, 프리랜서는 자신감을 온전히 유지하기 어렵다. 때로는 한껏 부풀었다가 힘없이 사라지기도 한다. 끝없이 변하는 환경 탓에 일이 언제 끊길지, 수입이 어떻게 달라질지 알 수 없다. 불안정이라는 존재는 프리랜서의 자신감을 갉아먹기 위해 자꾸만 틈새를 엿본다. 하지만 그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스스로 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자세가 중요하다. 초보 프리랜서일수록, 착한 아이 증후군을 경계해야 한다. 부정적인 정서나 감정을 숨기고 타인의 말에 무조건적으로 순응하는 경향. 이 증후군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프리랜서에게 독으로 발현된다.
"보석을 찾는 걸 결혼이라고 다들 생각해요. 결혼을 꿈꾸며 한 번쯤 그려보는 자신의 이상형. 그게 결혼이 아니라, 원석을 만나서 보석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이라 생각해요. 사랑하는 사람이 보석이 돼가는 모습을 보는 게 정말 신나는 일이에요. 그리고 원석인 나도 내 배우자를 통해 점차 보석이 되어 간답니다. 보석만 찾다가는 결혼 생활에 실망할 수밖에 없어요."
2014년에 방영된 <힐링캠프>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한 가수 션의 인터뷰는 시간이 지나도 또렷하게 떠오른다. 결혼뿐만 아니라, 일로 엮인 관계에도 적용된다고 생각한다. 프리랜서가 된 후, 나는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모두 원석으로 여긴다. 소속과 신분은 다르지만, 서로를 존중하는 공통된 마음으로 협업하며 모두가 보석이 되어가는 과정을 즐긴다. 시작 단계에서 내가 보석이 아니라고 탓하거나, 나를 원석이라고 여기지 않는 사람과는 더 이상 일을 하지 않는다. 업무 제안을 거절하면, 클라이언트들이 불만을 표시할 때도 있다. 하지만 나는 정중하게 사과하고 인연을 정리한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실망감을 드러내면, 먼저 마음을 활짝 열고 들어 본다. 이때 유의할 점은 상대를 판단하지 않는 것이다. 그 후에 수용할 것과 아닌 것을 구분한다. 수용할만한 것이 아닐 때에는 감정을 다치지 않는다. 중심은 칭찬에도, 비난에도 있지 않다. 중심축을 오로지 나에게 세우고, 현재 할 수 있는 일에만 묵묵히 집중한다. 이렇게 흔들리지 않고 중심을 유지해야, 오히려 상대와의 관계가 끈끈하게 오래간다. 중심을 잘 세우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 덕분에, 나는 협업을 하면 일이 한 건으로 끝나지 않고 추가로 이어진다. 클라이언트가 다른 사람에게 나를 추천한 덕분에 예상하지 못한 일을 한 적도 많다. 스스로에게 당당한 보석이 될 수 있도록, 나는 오늘도 최선을 다한다.
3. 내가 나 자신에게 실망할 때
앞서 살펴본 두 가지 경우보다 훨씬 마음 아픈 것은 내가 나 자신에게 실망할 때가 아닐까. 자신감 하나로 프리랜서를 선택한 나의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프리랜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 고민하고 오롯이 책임져야 한다. 이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나 자신과 마주하는 시간이 늘어난다. 회사원일 때는 잘 보이지 않던 내 모습이 구석구석 훤히 다 보인다. 회사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이제 마음껏 하늘을 날려고 하는데, 막상 내 날개가 작다는 것을 인지할 때 크게 실망한다. '나의 능력은 여기까지구나.', '나의 최대치가 이것밖에 되지 않는구나.' 하는 슬픈 마음이 드는 것이다.
"기대와는 다른 현실에 실망하고, 대신 생각지도 않던 어떤 것을 얻고, 그로 인해 인생의 행로가 미묘하게 달라지고, 한참의 세월이 지나 오래전에 겪은 말미의 기억과 파장을 떠올리고, 그러다 문득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조금 더 알게 되는 것. 생각해보면 나에게 여행은 언제나 그런 것이었다." <여행의 이유>, 김영하, 51p.
내가 여행을 좋아하는 이유를 멋진 문장으로 마주하니 반갑다. 스위스에서 신혼여행을 즐기던 중, 하루는 거대한 알프스 산에서 눈썰매를 탔다. 경사진 산속에서 타는 눈썰매는 생각보다 더욱 많은 주의가 필요했다. 운동신경이 부족한 나는 결국 썰매를 제어하지 못하고 빙벽에 세게 부딪혔다. 하마터면 절벽 밖으로 떨어질뻔한 상황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놀란 신랑은 달려오다가 썰매에 부딪혀 발목 인대가 파열되었다. '나는 왜 썰매도 제대로 못 타나'하는 생각과 함께, 자책감과 미안함이 넘실거렸다. 울적한 마음에 휩싸여 썰매를 반납하고 케이블카로 향했다.
바로 그때 나는 평생 잊을 수 없는 장면을 목격했다. 웅장한 산 아래로 구름이 자욱하게 깔린 모습이었다. '3대가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고 불리는 마테호른인데, 나는 산뿐만 아니라 더욱 멋진 풍경까지 보게 된 것이다. 바로 그 순간에만 볼 수 있는 장면이었다. 만일 눈썰매를 계속 탔다면, 이 기회를 놓쳤을 것이다. 부족한 실력과 어설픈 실수가 예상 밖의 멋진 길로 나를 안내해줬다. 시간이 흐르고, 이날의 사건은 우리 부부에게 소중한 추억이 되었다. 지금처럼 이렇게 글로도 탄생했다. 나에게 다가오는 사건을 행운으로 받아들이는 마음이 나의 또 다른 능력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 사건 덕분에, 이제는 예상 밖의 일이 벌어져도 나에게 크게 실망하지 않는다. 한계에 부딪히면, 반성은 하되 자책은 하지 않는다. 나에게는 스스로 인지하지 못한 또 다른 재능이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위기가 기회라는 말은 사실이다. 나는 현재의 나에게 계속 머물러 있지 않기 때문이다. '아직' 못하는 것이지, '평생' 못하는 것이 아니다. 매일 노력을 반복하는 만큼, 1분 1초 단위로 끝없이 생각이 확장되고 새로운 능력이 생겨난다.
꾸준히 노력하는 사람은 벽에 부딪힌다. 끝까지 달려왔다는 증거다.
좌절하지 않고 몇 번을 계속해서 부딪히면,
결국 벽이 허물어지고 그 너머의 세상이 나타난다.
나 자신에게 실망스러운 감정을 느낀다면, 드디어 다른 세계를 마주할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자주 부딪히고 더욱 실망할수록 좋다. 부딪히고 실망하고 넓어지고, 또 부딪히고 실망하고 넓어진다. 나는 이 여행을 평생 반복할 것이다. 프리랜서는 그 여정을 쉽게 짐작할 수 없어서 더욱 흥미롭다. 마침내 여행의 끝에 도달하면, 진정한 나 자신이 활짝 웃고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