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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진 자리

시&에세이

by 여상

[ 꽃이 진 자리 ]


꽃잎 떨어진다고

돌아서진 말자


어떤 사랑은

외로움 밟으며 서성이고

또 어떤 사랑은 고단하여

가엾게 잠이 들었다


둥근 것만 사랑이라면

차가운 가을밤

사위어 가는 달과

팔방으로 찢기는 별빛


어찌하랴


바람에 꽃잎

떨어져 날린다

한 잎마다 새겨진

찬란한 햇살의 日記


떨어진 꽃자리

자리마다

다시 꽃 피울

동그란 씨앗들을





[꾸미기]지는 꽃02.jpg


essay

계절을 아름답게 빛내던 꽃들이 이제 꽃대와 이파리를 갈색으로 말며 꽃잎을 떨구고 있다. 늦가을까지 견디는 민들레와 쑥부쟁이 꽃, 가을에 피어난 구절초, 무리 진 산국들이 가까스로 시간을 붙잡고 있다. 꽃잎 떠난 대공이 처연하고 쓸쓸해 보이는 것은 온전했을 때의 모습을 기억하기 때문일 것이다. 키가 큰 나리꽃 발치에는 굵은 씨앗들이 떨어져 있다. 그중 몇몇은 겨울을 견디며 다음 계절을 기다릴 것이다.


온전함이 무너지는 자리에는 당연히도 불안정감이 일어난다. 예기치 않게 느껴지지만 사실상 예상하지 못했던 일들은 아니었을 것이다.


무엇인가가 흐트러지거나 소멸되어 감을 목도할 때 무의식적으로 완벽한 원(圓)의 궤적을 그리게 된다. 균열이 없이 완전해 보이는 형태, 시간이 흐르지 않을 듯한 회전. 그러나 우리에게 만월(滿月)은 한 달 중 단 하룻밤의 일일 뿐이다. 가장 완전하게 느껴지는 순간은 삶 전반의 시간에서 그리 길게 유지되지도, 자주 일어나지도 않는다.

우리가 소중하게 간직하려 했던 찬란함은 끝내 부서진 파편에 되어 팔방으로 흩어진다. 그래서 우리는 끝없이 불완전해 보이는 소용돌이 속에서 매끈하고 둥근 원을 갈망하게 되는가 보다.


엔트로피의 법칙 하에서 모든 것은 무너지는 것일까? 적어도 만져지는 세계에서는 그렇게 보인다. 하지만 물리적인 현상세계에서와는 달리 소멸 후에도 사라지지 않고 이곳에 중력처럼 남는 것들이 있다. 찬란하고 완전해 보였던 모습들, 고단했던 관계의 굴곡, 가슴 저리게 아팠던 기억들, 방황하던 걸음들 모두 가슴속 빈터에 쌓여 부엽토처럼 숙성된다.


그렇게 증류된 기억들은 응축되어 다음 순간을 위한 생의 의지로 환원된다. 그리고 때가 되면 먼저 것들이 비켜준 자리에 새로움이 되어 활달하게 다시 일어선다. 순환하는 것이다. 새롭게 일어나는 것들은 본래의 것과 다름 아니다.

사랑의 마음이 그와 같이 매 순간 윤회한다. 슬퍼할 수 있어야 기쁨과 만날 수 있다. 한 가지 마음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아픔도 사랑이다. 애태움도 그렇다. 불만족의 반목도, 심지어 종말적인 헤어짐도 당장의 당혹감과는 달리 훗날 사랑의 어떤 모습으로 환생할지 모른다. 꽃씨처럼 영글어서 새로운 마음을 피울 테니까.




#가을 #낙화 #사랑 #이별 #순환 #치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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