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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reensian Nov 06. 2019

내 삶에 가득찬 너의 자리

그땐 그랬지 <네가 아주 어렸을 때>

                                                   * cover image

_ the end page of [when you were small](면지)



이야기는 언제나 이렇게 시작되었지.
“아빠, 내가 어렸을 때 얘기 좀 해 주세요.”

             *
네가 아주 어렸을 때
너는 슬리퍼에서 잠을 잤단다.
내 왼발 슬리퍼였지.
보송보송한 행주를 담요처럼 덮어주고,
베개 대신 티백을 베어 주었어.

              *
네가 아주 어렸을 때
난 너를 셔츠 주머니 속에 넣어 다니고는 했단다. 너는 작은 머리만 주머니 위로 살짝 내놓고 두 팔을 옷에 기댄 채 달랑달랑 매달려 있었지. 사실, 넌 셔츠 주머니를 꽤 뜯어 놓았단다.
 「네가 아주 어렸을 때」 중에서....
_ 사라 오리어리 글, 줄리 모스태드 그림,
김선희 옮김, 사파리(2007)



시간이 더디게 느릿느릿 기어가는 아이의 밤.
그제야 하루의 끝을 매듭짓는 나의 밤.
 
아이가 잠든 뒤 말갛게 드러나는 나의 밤은 짧고 달콤하다. 이제야 주어진 자유시간, 빌려두기만 하고 정작 들여다보지 못한 책을 보다가도 잠이 들기 직전엔 다시 휴대전화로 손이 간다. 잠든 아이를 옆에 두고 전화기 속 앨범을 뒤져 사진을 본다. 자잘한 자투리 시간마저 빽빽하게 들어찬 온통 너의 자리.
 
잠들기 전 아이의 질문이 늘었을 무렵, 아이는 묻고 또 묻는다.



나는 어릴 때 어땠어?
엄마는, 엄마는 어릴 때 어땠어?
 


수많은 에피소드 앞에서 얼마든지 자유롭게 전지적 작가 시점이 되어도 좋으련만.


끝내 울음을 터뜨리고 품에 안아보지도 못하고 바로 인큐베이터로 들어간 너의 이야기를 아직까지도 스스럼없이 할 수가 없어 망설인다. 이름 모를 별에서 낯선 지구로 여행을 막 시작한 너를 만난 그 순간을 떠올리면, 말할 수 없는 벅참과 먹먹함이 뒤섞여 마음엔 무심히 툭 떨어진 먹물이 아지랑이 피듯 강이 일렁인다. 그 강을 차마 들여다보기 싫은 마음에 빛의 속도로 강을 뛰어넘어 아예 편집의 달인이 되기로 한다.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두개골 골절, 폐렴, 기흉 등 여덟 가지나 되는 병명을 진단받고 신생아 집중 치료실에 있었다. 난 하루 두 번만 허용된 면회시간에 아이를 만날 수 있었다. 물론! 지금은 다행히 너무나 건강하게 잘 크고 있다.)
 




“모유 먹는 아가였는데 일주일이 지나도 응가를 안 하다가 결국 기저귀가 펑! 하고 폭발하고 말았어.”
                                *

“아빠가 레고 상자 뚜껑 위에 널 올려놓고 슝슝~

그네를 태워줬지. 일명, 파파랜드.

넌 정말 놀이기구처럼 레고 상자 타기를 좋아했어.”
                                *

“동생이 태어나던 날에 넌 열이 펄펄 끓었어. 열감기에 걸려 39도까지 열이 올랐지 아마.”
 

                                ***


“엄마 어릴 적엔 스프링이 달린 말 놀이기구가 있었는데 말이야. 엄마가 말타기가 재미있었나 봐. 동요도 나오고 그랬거든. 그런데 어느 날 그 스프링 말을 끌고 가는 아저씨를 천연덕스럽게도 뒤따라서 길을 건너가고 있더래. 그걸 보고 놀란 외할머니가 급히 뛰어와서 엄마를 데리고 왔대.”

                                *

”한 번은 레미콘 트럭이 와서 부어놓은 시멘트를 밟은 적도 있어. 기억은 잘 안 나지만 아끼던 빨강 슬리퍼를 잃어버렸지.”





오늘의 이야기도 넘치고 흐르지만 덧붙이지 않아도 천진난만한 어린 날의 시간. 하지만 부모로선 심장이 쿵- 내려앉던 순간도 추억의 페이지엔 함께 얼룩져 있다.


휴대전화를 켜고 사진 폴더에 손가락 터치만으로 단 몇 초 만에 불러들일 수 있는 아이의 유년은 피사체를 응시하고 있던 나의 기억 속에서 더 생생하게 움직인다. 스틸 사진임에도 분명하고, 한 컷의 이미지는 태연하게 그날의 시공간을 가로지르며 한 장의 추억 속을 유려하게 헤엄친다. 그건 찬란히 빛나던 찰나를 찍는 자의 시선이 있어서다. 바로 내가 그 자리에 있고, 내 눈에 담고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나의 시선으로 얼마든지 아이의 유년을 리본을 훌훌 풀어헤치듯 이야기를 꺼낼 수 있는 거겠지.

아이에게 어릴 적 이야기를 꺼내 놓는 헨리의 아빠처럼.


그에 비해 나의 어린 날은 저 멀리, 그보다 더 아득히 멀찌감치 떨어져 있다. 친정 장롱 귀퉁이에 꽂혀있는 앨범을 펼쳐 한 장씩 인화되어 있는 필름 사진에 손이 닿아야만 볼 수가 있으니 말이다. 언젠가 한 번은 어릴 적 사진을 휴대전화 카메라로 찍어두었다. 기억하고 싶어서 찍었다지만 곧 잊어버렸고, 다시 들여다볼 일도 없었다. 데이터 저장 용량을 확인하라는 알람이 떠서 사진을 정리하기 전까지 말이다. 그저 저장된 만 여장의 사진 중 하나일 뿐, 나 혼자 보는 옛 사진은 스토리텔링이 부족하니 아무래도 감응이 떨어졌고 괜스레 텅 빈 쓸쓸함만 느껴졌다.


필름 사진은 온 가족이 모여 함께 봐야 제 맛이다. 피사체를 응시하던 아빠의 눈으로, 그 자리에 함께 있던 엄마의 눈으로 그날그날의 기억을 더듬어 잊지 못할 생생한 에피소드를 얹고, 추억을 방울방울 양념을 쳐야 그 시절, 그때로 응답할 수 있다.


지나고 나면 다 추억이라고, 힘든 기억은 옅어지고 다시는 되돌아갈 수 없는 예쁘고 사랑스러운 시간만이 아련해진다. 어찌 이런 감성들만 남는 건지. 그림이 예뻐서, 글이 예뻐서 애정해 마지않는 이 그림책을 보고 있으니 또 이렇게 마음이 아릿, 몽글몽글해진다.



Every night at bedtime Henry and
his father have a chat.

It always begins the same way.
“Dad,” says Henry.
“Tell me about when I was small.”

              *
When you were small
we let you sleep in one of my slippers.
The left one.
You used a fuzzy wash cloth for a blanket and a tea bag for a pillow.

              *
When you were small, I used to carry you around in the pocket of my shirt.
Your little head would just stick out and
your little hands would grip onto the edge of the cloth. Actually you ripped a lot of
my shirts that way.



 「When you were small」
SARA O’LEARY
with illustrated by JULIE MORSTAD
/ Simply Read Books(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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