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마이 레드 슈즈, oh my!
혼자 옷을 입다가 한쪽 팔을 채 껴입지도 못한 녀석. 한쪽 어깨를 드러내 자연스러운 언밸런스 핏 분홍색 곰돌이 내복 차림. 그 차림 그대로 현관 앞 신발장과 맞닿은 구석으로 향한다. 하늘색 물방울무늬가 있는 투명 비닐우산을 집어 들고 복도와 현관 사이 짧은 런웨이를 걷는다. 한두 번 오고 가더니 들고 있던 우산을 내려놓고 현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신발장 문을 연다. 순간 정적. 아이가 놀고 있는데 정적이 흐를 때 모든 엄마들은 직감할 수 있다. 폭풍 전의 고요. 긴장감이 흐르는 사고 현장을 직관하리란 사실을. 뒷일은 당연히 발견한 자의 몫, 사고 친 자는 영문도 모르고 눈만 깜빡인 채 알 수 없는 표정만 짓는 순간. 다행히 잠깐의 고요를 뚫고 ‘덜그럭 덜그럭’ 소리가 간간히 이어지는 걸로 봐서는 큰 사고는 아닌 것 같다. 고대 유물이라도 캐는 거니? 한참을 덜그럭거리던 녀석이 무언가를 꺼내 들고 거실로 달려온다. 아무래도 조심스레 엄마 구두에 발을 넣어 신어보려 했다가 실패한 모양이다.
예쁘다, 이 신발…… 엄마가 이거 신어봐. 예쁘니까!
이게 언제 적 구두인가 기억도 가물가물. 먼지가 켜켜이 쌓인 기억의 페이지를 더듬거려본다. 십여 년 전, 갓 사회에 진입해 적응기를 마치고 일하는 재미가 붙었을 무렵. 직장생활이 무엇인지 아주 조금씩 알아가고 돈을 버는 어른이의 세계로 입성한 이십 대 중반, 그 언저리. 철 모르는 스무 살 때보다는 생각의 층이 조금은 차올라 현실을 알아갈 나이. 멋모르고 새로운 즐거움을 알아가던 나이. 그래도 꽤나 열정과 에너지가 있던 나이의 내가 서 있다.
음반-공연기획사 업무 특성상 야근이 일상이었던 시절의 일이다. 밀린 보도 자료나 음반 북클릿에 수록되는 글을 쓰기에 남들 다 퇴근한 고요해진 사무실이 내겐 최적화된 공간이었다. 밤에 음반 녹음이 예정되어 있는 날엔 레코딩 스튜디오가 퇴근 후의 외근지다. 모니터링 지원사격을 나가야 하니 늦은 시간까지 책상을 지키는 일은 그리 이상한 게 아니었다. ‘칼퇴’가 아니어도 큰 불만 없이 야근을 밥 먹다시피 하던 중 하루, 그날만은 별일이 벌어졌다. 예정된 약속도 아니고 급작스런 친구의 호출로 퇴근 후 이대 앞으로 향한 날. 지하철 터널 밖 도시의 저녁은 쪽빛보다 푸르른 어둠이 짙게 드리웠다. 인파에 휩쓸려 잰걸음으로 비탈길을 내려간 곳에는 거리를 밝히는 상점의 노란 불빛이 총총히 떠 있다. 친구와 나는 홀린 듯 반짝거리는 조명 틈 사이로 어느 수제 구두 가게에 들어섰다.
맘에 드는 거 있으면 신어 보세요. 그냥 보고만 있으면 몰라요. 신어봐야지 알지...
가게 주인의 말에 마음속에 ‘탁!’하고 불이 켜졌다. 친구는 이미 반대편 코너로 넘어간 사이. 둥근 코에 반짝이는 아이보리색 애너멜 구두와 카리스마 뽐내는 블랙 하이힐 사이, 짙은 와인 빛에 가까운 붉은 스트랩 구두가 눈에 들어왔다. 한번 신어나 볼까, 뾰족한 코에 강렬한 색만큼이나 발목 위를 감싸고 올라오는 날렵한 스트랩과 고리가 맘에 쏙 들었다. 수제화라 조금 비싼 값이었지만 신어보니 다시 제 자리에 내려놓을 수가 없다. 그냥 보고만 있으면 모른다더니, 신어봐야 안다더니, 가게 주인의 말은 분명 요술 부림이었으리라. 매일 신기에는 부담스러운 조금 튀는 색깔이지만 대님 청바지 차림에 꽤 자주 신고 다녔던 생애 첫 빨간 구두.
무려 십 년 하고도 몇 해를 더 거슬러 올라가 과거의 나와 조우한 잠시. 네 살배기 아이가 엄마의 구두를 빤히 바라보며 빨리 신어보라고 재촉한다. 뱃속에 너를 품고 곧장 플랫슈즈로 갈아타 지금은 낮은 구두도 아닌 운동화가 세상 제일 좋은 엄마가 됐거든! 아이와 함께 한 후로 내 발은 마치 원래 그랬던 것처럼, 본능적으로 늘 안전한 선택을 한다. 단화 또는 운동화. 길게 생각할 필요 없이 매우 심플한 매치로 외출 준비도 끝. 예쁜 차림새보다는 결국엔 편한 차림을 택하고 만다. 신발장에 화석처럼 자리한 빨간 구두를 발굴한 너의 탐구력에 심심한 박수를 보내며. ‘좋은 구두를 신으면 더 좋은 데로 간다는’ 아이유 노래 ‘분홍신’을 흥얼거렸다. 아이가 무심코 꺼낸 나의 옛 빨간 구두를 보고 상념에 젖어든 날.
단 한 번, 네버랜드
소소하고 사사롭게
너의 말이 다가온 날들을 기억하며......
#빨간 하이힐 #이젠 못 신어요 #그저 감상용 #신어 봐요 #예쁘다 #2014 #네 살 #윤‘s 어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