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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reensian Nov 01. 2019

시간의 맛, 티타임 is 롸잇 나우

나누는 마음을 그득 담아 <레몬트리의 정원>


레몬트리의 정원으로 향하는 대문이 활짝 열렸다. 솜씨 좋은 손과 튼튼한 팔, 나누는 마음을 그득 담아 음식을 준비하는 레몬트리. 어쩐지 엄마의 손길이 느껴진다.


매끈하고 세련미 넘치는 레몬과는 달리, 어딘가
소박한 온정이 깃든 유자가 생각나는 날.

해마다 늦가을이면 유자청을 손수 만들어 지인에게 나누는 친정엄마의 손길도.




가을 끝 무렵 코끝에 겨울이 달랑달랑 걸려있을 즈음, 해마다 친정집엔 달콤 새큰한 향기가 진동한다. 향의 출처는 전남 고흥에서 올라온 유자 두 상자. 제철 유자를 들여놔야 일 년 동안 가족의 건강을 보살필 수 있다는 엄마 스스로의 소임 덕에 우리 가족은 수제 유자청을 사시사철 차로 즐겨 먹는다.


요즘같이 클릭 한번, 터치 한 번이면 시판되는 유자청을 바로 다음날 받아볼 수 있는데도, 엄마는 10킬로나 되는 양을 손수 만드는 걸 고집한다. 다른 이유는 없다. 그저 마음을 담은 손맛 때문이다. 배가 살살 아플 때 따스한 엄마손 만한 약손이 없듯이, 엄마는 다 큰 자식들 아플까 봐 걱정하는 마음을 뜨끈한 차 한 잔으로 전한다.


유자의 과육을 얇게 저미고 설탕을 재워 청으로 만드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다만, 5킬로 상자 두 개를 꽉 채우는 엄청난 양에 압도되는 일이라서 지치지 않는 마음가짐이 우선이다.



수제 유자청 만들기(feat. 친정엄마표)

1. 개수대를 박박 닦아 반짝반짝 윤을 내고 청량한 물을 반쯤 채운다.
2. 유자를 개수대에 풍덩- 쏟아 넣는다. 가볍게 찬 물 샤워로 과실에 붙은 먼지를 씻어낸다.
3. 식초를 섞은 베이킹 소다 가루를 유자 겉면에 골고루 입혀 하나씩 정성스레 닦고 찬 물로 헹궈낸다.


엄마의 손길이 유자에 닿는다. 뽀드득뽀드득 명징한 소리 끝에 오동통하게 살이 차오른 노랑빛이 한가득 반짝거린다.


4. 잔여물을 없애기 위해 유자가 잠길 정도로 물을 채워 10분여간 그대로 둔다.
5. 시간이 지나면 키친 타올로 톡톡 두드려 물기를 완전히 없앤다.


알알의 고운 유자의 얼굴이 말갛게 드러난다. 티 없이 완전히 매끈하고 완벽한 형태는 없다. 까만 주근깨 가 톡톡 박힌 노란 민낯은 대체로 둥그스름한 모양새지만 저마다 굴곡이 다르다. 보기보다 강한 늦가을의 햇살 때문일까. 조금 일찍 낙하해 땅에서 구른 탓일까. 있는 그대로의 자연스러운 모습이 풋풋하게 살아있다.


6. 바구니 두 개를 준비한다. 과실의 꼭지를 떼고 십자로 칼집을 낸다. 껍질을 벗겨 알맹이를 분리한다. 바구니 하나에는 껍질만 썰어 담고, 다른 바구니에는 알맹이 속 씨앗을 빼낸 하얀 속 열매만 썰어 채운다.
7. 뜨거운 물에 소독한 유리병에 껍질과 과육을 담고 설탕을 붓는다.




처음부터 유자를 껍질 통째로 썰어내려 하면 씨앗에 걸려 칼질이 미끄러져 위험하다. 양이 많다 보니 일의 효율을 높이려면 두 개의 과정으로 나누어 집중하는 게 좋다. 반복되는 작업은 꽤나 번거롭고 지루하기만 하다.


하지만 손이 빠른 엄마는 한 치의 머뭇거림이나 실수 없이 여유롭게 유자를 다룬다. 껍질과 과육, 씨앗을 다 분류하고 나면 칼질 소리가 일정한 간격으로 울린다. ‘송송송 송-’ 유쾌한 음파는 공기 중에 열을 맞춰 섰다가 금세 흩어지고, 상큼한 향기만이 남는다. 어느새 커다란 통에 엷게 저민 유자의 속살과 껍질이 가득히 채워지고, 순백의 설탕이 눈처럼 솔솔 내린다.


이제 유자와 설탕이 만나는 순간.


할머니, 아까부터 뭐하시는 거예요?”



옆에서 구경하던 아이가 유자 향기에 취해 코를 벌름거리며 얼굴을 들이민다. 친정 엄마는 녀석에게 설탕에 재워진 유자 속살 몇 가닥을 건넨다.


아이, 새콤다콤해.
하나 더 주세여!


녀석도 반했다. 달달, 새콤, 싱그러운 매력에 그윽한 향기까지 반하지 않고서는 버틸 수 없는 맛. 하늘과 땅과 바람과 햇살이 빚어낸 우리 고유의 맛.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바다 건너 이국땅에서 출하하여 반짝반짝 보기 좋은 상태를 유지하려 보존제를 써야 하는 수입 과일보다 아무래도 우리 땅에서 나고 자란 유자에 진득한 애정과 손길이 가는 건 너무 당연하다.


엄마는 보통의 꿀 유리병 크기로 유자차 열댓 개를 뚝딱 만들어냈다. 사서 먹는 것보다 껍질과 과육은 실하고 설탕은 적게 들어간 수제 유자청. 엄마의 마음은 이제 가족과 가까운 친척들, 아끼는 지인의 집으로 아낌없이 보내질 일만 남았다.


유자청을 숟가락으로 듬뿍 퍼서 따뜻하게 데워진 머그잔에 옮겨 담는다. 끓여 놓은 물을 부어 유자차 한 잔을 만든다. 두 손 가득 온기를 붙잡고, 호호 불어 호로록 마신다. 달큼한 감미에 새콤한 향이 더해져 감기 바이러스도 곧 힘을 잃는 기분......


유자차는 달달, 새콤, 싱그러운 매력에 그윽한 향기까지 온전히 다 내어주는 맛이다. 하늘과 땅과 바람과 햇살이 빚어낸 우리 자연의 맛, 시간의 맛이 느껴진다. 차를 마시며 늘어진 시계추가 주는 느림에 잠시 몸을 싣는다. 계절의 변화 속에 난 오늘도 엄마의 마음을 뜨겁게 마신다. 나의 가족도 지친 몸에 그렇게 작은 쉼표를 새긴다.


레몬트리의 정원에 가을바람이 불면 엄마의 수제 유자청을 보내주고 싶다. 햇살 아래서 벌컥벌컥 마시던 레모네이드와는 사뭇 다른 시간의 맛과 향도 느껴보라고. 호호 불어 호로록 홀짝홀짝... 달큰 새콤한 느림의 티타임을 마음껏 누려 주길.



친구들, 햇살, 함께 나누는 대화......
하지만 날이 더우니 시원한 걸 마셔 줘야 해요.
레몬트리는 유리잔에 레몬을 짜 넣었어요.
꿀벌이 날아다니며 꿀을 조금씩 떨어뜨려 주었지요. 빗물이 상큼한 레모네이드로 변했어요.  친구들은 레모네이드를 벌컥벌컥 마셨어요.
와, 맛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친구들은 서로를 이해할 수 있었어요. 그래서 함께 웃을 수 있었지요.

/레몬트리의 정원/
앙젤리크 빌뇌블 글, 델핀 르농 그림, 권지현 옮김, 씨드북(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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