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워지는 마음 위에 손을 포개는 가을의 찻잔
찻잔은 옷장 가득한 드레스와 같다. 차려입을 일이 좀처럼 없는 근로환경이었던 회사들에 편안함을 선호하는 내 취향이 더해지며 돌려 입을 티셔츠와 청바지 두 개가 고정 패션이지만 어쩌다 한 번씩 결혼식, 돌잔치 등이 있으면 입을 옷이 없어 옷을 산다. 드레스는 상하의를 고려하지 않아도 되니 가장 쉬운 선택이고, 어차피 자주 입을 것도 없으니 유행 없는 기본 스타일이 제일이었다. 잡지에 나오는 정석대로 액세서리만 바꾸면 느낌이 다르다는 블랙 미니드레스를 장만했다.
그러나 액세서리로 변화를 주는 것이 누구에게나 쉬운 일은 아니다. 가진 것을 다 꺼내 두르고 감아 보아도 이상하고, 똑같이 입고 가자니, 아무래도 지난번 그 옷이라며 누가 흉을 볼 것만 같다. 여전히 상하의 맞춰 입을 자신은 없으니 또 드레스, 그다음에도 드레스, 같은 상황이 반복되니 옷장에 가득한 것은 서로 다른 스타일의 드레스다. 나풀나풀 여신드레스, 타이트한 섹시 드레스, 단아한 숙녀 드레스, 리조트룩의 화려한 패턴 드레스, 스타일 있어 보이는 심플 드레스, 귀여운 미니드레스, 캐주얼한 데님 드레스, 귀여운 공주 드레스 등 종류는 가지각색이다. 언젠가 우리 집에 놀러 온 친구는 옷장을 열어보더니 날더러 변태란다. 입지도 않는 옷들을 사 모아서 밤마다 열어보고 좋아하는 거냐고.
찻잔도 그렇다. 접시는 음식을 돋보이게 하면 그만이니 몇 가지 정해두고 쓸 수 있지만 찻잔은 다르다. 보통 때는 편하게 쓰기 좋은 머그잔을 쓰다가 뭔가 기분을 내고 싶을 때 찾는 것이 찻잔이다. 하나로는 부족하다. 어떤 분위기를 즐기고 싶은지에 따라 옷이 달라지듯 잔도 달라진다. 차의 맛도 중요하지만 귀여운 잔에 담긴 차를 마시면 없던 애교도 생겨나고, 모던한 찻잔에 마시면 기분도 왠지 시크 해지는 듯하다. 혹은 여름이나 겨울이나, 비가 온다거나 눈이 내린다거나 하는 외부환경에 따라서도 다른 찻잔이 필요하다. 일반적인 상차림과는 달리 티타임에서는 그 찻잔 하나가 모든 분위기를 압도한다. 티푸드, 티 매트, 디저트 접시, 커트러리 등 테이블 세팅의 다른 요소들일랑 덜 고민해도 된다. 잘 고른 찻잔 하나, 열 세팅 안 부럽다. 상하의를 맞추지 않아도, 액세서리를 착용하지 않아도 그 자체로 충분한 드레스처럼 찻잔도 혼자서 큰 역할을 한다.
감성이 차오르는 가을에는 찻잔이 연출하는 분위기에 더 많은 영향을 받는다. 이 계절의 찻잔은 유독 이 시즌에만 꺼내게 되니 자주 쓰진 않아도 그 의미는 크다. 봄은 설레어 좋고, 여름은 초록이 우거져 좋고, 겨울은 추워서 정신을 못 차리다 눈이 내리면 강아지처럼 신나는데 가을만은 힘겹다. 습기가 사라져 가는 공기마저 외로운 계절, 가을의 찻잔은 일찍 저물어가는 태양을 바라보며 한 해를 되새기게 하고, 깜깜한 밤에는 상념에 잠겨 마음이 차가워지지 않게 곁을 지킨다.
내가 가장 아끼는 가을의 찻잔은 아라비아(Arabia)의 모티(Motti)다.‘한 꾸러미의 나무’에 해당하는 핀란드어로 예전엔 그저 꾸러미였던 것이 요즘은 정형화되어 1 세제곱 센티미터의 부피를 뜻하는 단어가 되었단다. 핀란드에는 사는 사람보다 녹지가 훨씬 더 많다는데, 인근 나라들과 전쟁을 치르면서도 빼곡한 나무 사이의 오솔길을 활용해 전세를 기울인 적이 많다. 핀란드 사람들이야 나무를 다루는 실력도, 나무가 가득한 숲에서의 전략에도 빼어났으니 가능했겠지만, 이방인에게는 낯선 지역이니 대응하기 쉽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전쟁 중에 모티는 그래서, ‘한 방에 해치울 수 있는 상대 군의 규모’를 일컫기도 했단다. 이러나저러나 모티라는 단어는 나무와 숲이 관련된 단어다.
나무는 둥근 잔을 비잉 둘러 차분하게 공간을 채우고 있다. 언젠가 걸었던 담양의 메타세콰이어길이 떠오르는 나무들이다. 2차선의 좁은 길의 양 옆으로 키가 큰 메타세콰이어 나무들이 손에 손을 잡고 서로의 붉고 노란 이파리들을 끌어안았었다. 이쪽 도로의 나무와 저 쪽 도로의 나무가 서로를 향해 있는 힘껏 손을 뻗으니 말라가는 나뭇 껍질은 핏대가 서듯 갈라졌다. 봄여름에는 씩씩하고 인자했던 나무들이 이제는 지치고 힘이 들어 보였다. 내가 걸었던 길과는 달리 잔 속의 나무들은 강물을 바라보며 서 있는 듯하다. 주욱 일렬로 늘어선 가로수 뒤로 석양이 비추고, 흐르는 강물 위로 그 나무들이 반사되어 보이는 것만 같다.
담양의 그 길처럼 나무들은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편과 저 편으로 갈려 있는 것 같지만, 반사된 강 위에서는 하나다. 서로 같은 강 위에 꼭 달라붙어 살을 맞대고 있다. 그림자가 자리하는 2차원의 평면에는 3차원의 세계에는 없는 평화가 있다. 사이가 좋건 나쁘건, 예쁘건 밉건, 키가 크건 작건, 남한이건 북한이건, 미국이건 시리아 건 그저 같은 공간에 있으면 이념과 국적, 성향에 상관없이 그림자와 그림자가 어깨를 나란히, 혹은 뜨거운 포옹을 한다.
언젠가 연인과 싸우고서, 가로등 아래서 침묵으로 서로 대치하던 때가 있었다. 무슨 일이었는지, 거기가 어디였는지 너무 오래전 이야기라 기억나지 않지만, 심각한 눈빛을 피해 잠시 고개를 떨구니 그와 나의 그림자는 서로 포개져 있어 우리가 마치 얼싸 앉고 있는 듯 보였다. 여름이었으면 그것이 우스워 푸핫 폭소해버리고 말았을 것을, 가을의 그 날에는 왠지 2차원의 저 세계와 3차원의 이 세계 사이의 괴리감이 서글퍼 눈물을 왈칵 쏟았었다. 가을, 가을이 문제다. 계절이 나빴다. 왜꼭 이 계절엔 세상 모든 것에 나의 생각을 투영해 멀쩡한 것도 슬프고 서럽고 외로운 걸까. 낙엽진 것은 나무지 내가 헐벗는 것이 아닌 것을. 차가운 바람을 잎새 한 장 없이 홀로 맞을 것은 내가 아니라 저 나무인 것을...
해가 지나고 또 새로운 가을을 맞으면 지난 가을의 내가 또 생각이 난다. 가을의 여인이 되어 걸음은 천천히, 호흡은 더 깊이, 커피는 좀 더 진하게 마시며 쓸쓸한 계절을 씁쓸하게 보낸다. 그리고 지난 계절을 추억한다. 다투는 두 연인의 가로등 아래 그림자를 생각하면 내가 걷는 거리 곳곳의 땅바닥과 그를 떠도는 그림자들에 눈길이 머물고, 그 그림자의 주인공인 사람과 사물로 시선이 이어진다. 과거의 사람이 아닌 현재의 사람들이 채운 거리는 그 전과는 다른 새로운 곳이다. 과거에는 과거의 기쁨과 슬픔이, 현재에는 또 현재의 기쁨과 슬픔이 있다는 것이 새삼스럽다.
그렇게 지나간 계절은 또 다른 계절의 추억이 된다. 비록 매일 꺼내보지 않아도, 자주 쓰지 않아 필요 없어 보여도 이 잔이 의미 있는 것은, 잠시면 지나가는 짧은 계절에 자신이 가진 온 빛을 내뿜어 나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비추기 때문이다. 같은 거리일지라도 예전과는 다른 사람들이 현재의 그곳을 메우고 있음을, 이 사람들이 지나면 또 다른 사람들이 달려올 것임을, 나 역시 그렇게 변하는 사람들 중 하나임을 생각하게 한다. 일 년에 한 번을 쓰건 두 번을 쓰건, 차가워지는 마음 위에 손을 포개는 가을의 찻잔은 버릴 수가 없다.
찻잔 말고도 살다 보면 ‘얼마나 자주’인지가 중요하지 않은 존재가 있다. 늘 함께 있지 않아도 마음으로 응원해주는 부모님, 자주 만나지 못하더라도 필요한 순간에는 ‘그냥 생각나서 연락했어’ 하며 텔레파시가 통한 듯 전화를 걸어오는 친구들, 매일 사랑한다 이야기하지 않아도 우직한 연인 혹은 배우자, 하루 종일 같이 있지는 않아도 언제나 마음을 채우는 아이. 따지고 보면 인생의 중요한 것들은 모두 만남의 횟수나 시간 등 절대적인 숫자에서 좀 더 자유로운 존재들이다. 중요한 사람, 중요한 사물들과 교감하는 한 이 가을의 상념일랑 조금은 가벼워져도 좋다, 가을밤의 차를 한 잔 기울이며 나를 다독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