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미약하였으나

by 이영희



모임 날짜가 다가오면 그날 입고 갈 옷을 미리 챙기게 된다. 장롱 안을 들여다보니 이 커피색 블라우스는 지난달에 입고 갔던 것이고 스커트며 바지도 후줄근해 보인다. 반지나 목걸이로 지 있게 장식해보려 했더니 밋밋하고 평범한 것들뿐이다. 생각 끝에 쇼핑을 나가 어떤 신상품이 나왔는지 돌아보며 눈요기를 하지만 가격이 만만치 않다.

누구에게 무엇을 보여주기 위한 피곤한 욕망인지.


눈요기를 끝내고 겨우 스카프 한 장을 고른다. 이것으로 그냥 입던 옷에 포인트만 주기로 한다.

백화점도 그러하지만 그곳과 연결된 지하상가엔 사람들의 발걸음이 물결치며 상가마다 모이고 훑어진다.


물 한 병을 사들고 간이 쉼터에 앉아 목을 축이 지나가는 여인들의 옷과 장신구를 흘깃거리며 살펴본다. 젊거나 나이 들거나 여인들의 옷과 장신구에 대한 욕망은 어디까지일까, 하며 모파상의 〈목걸이〉와 연암 박지원의 〈양반전〉이 문득 떠오른다.

모파상은 품 목걸이에서 빈약한 가문 때문에 말단 공무원에게 시집간 마틸드가 어느 날, 귀족들이 모이는 화려한 파티에 갈 수 있는 초대장을 받고 옷이며 장신구를 마련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마틸드는 남편이 꼬깃꼬깃한 비상금까지 내주어 맞춘 드레스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아 여학교 동창인 부자 친구를 찾아가 보기에 값비싸고 호화로운 목걸이를 빌린다.


그녀는 연회장에서 그동안 기회가 없어 보여주지 못했던 아름다움을 한껏 뽐내며 파티를 즐기는 시간만큼은 황홀해한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목걸이를 잃어버린다. 때문에 비슷한 것을 사서 부자 친구에게 돌려주느라 큰 빚을 지게 된다. 작가 모파상은 마틸드에게 빚을 갚게 하느라 십 년 동안 고생시킨 것도 모자라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그 목걸이는 명품이 아닌 값싼 짝퉁이었다며 십 년 공부 나무아미타불로 만들어버린다.

이 이야기를 표면적 진술에만 집착해서 본다면 그날 밤 몇 시간 동안의 우아한 귀족놀이를 위한 여자의 다루기 힘든 허영심이 어떤 결말을 맞이하는지를 보여준다. 하지만 소설이 끝나는 그 시점부터 비로소 생각다운 생각이 시작된다. 짝퉁 귀부인 흉내를 낸 여자는 마틸드가 아니라 가짜 목걸이를 빌려주었던 친구다. 모파상은 소설 안에서 이렇게 말한다. “만일 목걸이를 잃어버리지 않았다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누가 알겠는가. 누가 알아. 인생이란 얼마나 이상하고 무상한 것인가. 얼마나 사소한 일로 자신을 파멸시키기도 하고 구원받기도 하는가.”

그 구원이란 어떤 것일까. 세속적인 구원이라면 속물근성마저 가난한 마틸드에게 부자 친구의 뻔뻔함을 배우라는 것이겠지. 마음이 가난한 자, 애통한 자는 복이 있나니, 했건만 가짜 목걸이를 생색내며 빌려준 부자 친구가 복을 받았다. 만약 그런 구원이라면 연암 박지원의 양반전은 모파상보다 한 발 앞서 있다.

연암은 신분상승의 기회를 잡은 고을의 부자에게 군수를 통해 어떻게 처신해야 양반다운 점잖은 위선의 포즈를 취할 수 있는지 친절하게 하나하나 예를 든 증서를 만들게 한다. 타락한 그 시대의 사대부들에게 은밀한 주먹을 크게 날린다. 그리고 지위와 명예를 돈으로 사고팔 수 있게 된다면 더욱 한심한 세상이 될 것을 염려하는 마음도 들어있다.


군수가 만든 양반 매매계약서의 약관을 듣다가 신분을 샀던 천부는 인간의 탈을 쓰고서 비양심적인 행실은 이웃들에게 차마 못할 짓거리라며 양반 자리를 박차고 나온다. 하지만 자기 자리로 돌아간 그에게 신분과 맞바꾸었던 돈 중에 얼마라도 되돌려 주었다는 말이 없다. 거기다 환곡을 갚지 못해 신분까지 팔아버린 양반에게 원래의 지위를 되찾아 주었을 것이다. 결국 군수야말로 자신이 만든 증서의 부당한 특권을 제대로 이용했다. 구원받은 사람은 누구인가.

〈목걸이〉와 〈양반전〉, 두 작품은 몇 페이지 되지 않는 짧은 이야기다. 꼭 필요한 물건이 아닌데도 신용카드로 계산하고 돌아서면, 마틸드처럼 부자 친구를 더욱 부자로 만들어준 것 같고, 군수에게 휘둘림을 당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지 는지.


요즘 TV와 인터넷 광고를 보면 돈을 빌려 주겠다는 광고가 난무한다. 처음엔 은행이나 이름 있는 대 기업에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대학생에게까지 카드를 발급해주어 빚을 지게 만들더니 이제는 나라에서 듣도 보도 못했던 사채업자들에게도 교묘한 법으로 돈놀이하는 것을 허가했다.

이 달에 구입한 옷과 장신구에 대한 만족이 다음 달까지 지속되지 않는다는 게 늘 문제이듯 21세기의 마틸드들이여, 깜박하면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나중은 그 빚이 심히 창대해지리라.


차가운 생수 한 병, 냉수 먹고 속 차린다 해도, 눈요기든 무엇을 구입하든 쇼핑은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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