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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a Aug 08. 2022

억지웃음 유발 금지

타인의 희생으로 유발된 웃음의 끝은 쓸 뿐

웃기고 싶은 사람이 되기 위해, 얼음장처럼 차가운 분위기를 조금이라도 녹여보기 위해 타인의 '웃음'을 유발하고 싶을 때가 있다. '웃음 유발'이라는 혼자만의 책임감 하에 잘못된 선택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동의를 구하지 않은 '타인'을 이용하는 것이다. 누군가의 표정, 생김새, 외모, 말투 등을 웃음의 요인으로 만들어낸 뒤에 터져 나오는 하하호호 소리에 안도감을 느끼는 순간. '상처'라는 것을 주고받은 가해자와 피해자로 나뉠 수 있다. 물론 강도와 분위기에 따라 상대가 쿨하게 넘길 수도 있지만 이 선을 지키는 것은 주관적인 데다가 정해진 바가 없기에 상당히 어렵다.


유쾌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 '이 사람은 괜찮을 거야'라며 누군가를 웃음거리로 만드는 일. 깔깔대며 웃던 자들은 기억하지 못한 순간이더라도 담담한 척, 분위기를 깨지 않으려 쓴웃음을 겨우 지은 누군가에겐 몇 년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은 끔찍한 순간 일 수 있다.


대화의 95% 이상을 늘 타인에 대한 희화화에 중점을 두는 지인이 있었다. 수염이 난 남성을 보며 수염의 고르지 못함을 여러 상황에 빗대며 비하했고, 지나가는 여성의 다리 모양을 보며 음식에 비유한 농담을 했다. 자리에 함께 하던 이들 중 일부는 웃었고, 몇몇은 분위기가 싸해지더라도 "그런 말 하는 거 아니야" 라며 지적하는 용기를 냈다. 10년 전이었고 현재보다 누군가를 희화화하는 것에 대해 관대한 편이었다. 당시 이십 대 초반의 강단 없던 나는 분위기를 깰까 봐 웃어야 하는 건가 정색을 해야 하는 건가 눈치를 보다가 남들이 웃기에 그저 입꼬리를 좀 올렸다. '이건 아닌데'라는 생각이 들며 비위가 상했다. 어느 순간 그 희화화의 대상이 하나둘씩 우리들에게 향하기 시작하자 비로소 개념 없는 막말이라며 분노하며 인연을 유지하지 않았다.


'유쾌한 분위기'이라는 목표 하에 가해자가 된 적도 피해자가 된 적도 있었을 나. 희생자의 입장을 겪어본 뒤에 비로소 나로 인해 또 다른 상처를 받았을 누군가를 떠올려보게 된다는 점이 가소롭긴 하지만 웃음 유발하기 위해 누군가를 희생양 삼는 것을 습관화하는 자들의 노력에 웃어주는 것조차 타인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행위라는 것을. 또 억지로 웃어주는 행위로 동조하는 것 자체가 또 다른 폭력을 유발한다는 것을. 여러 유형의 가해자들과 그로 인해 상처받는 피해자를 바라보며 절실히 느꼈다. 


사회생활을 하며 타인을 웃음거리 만드는 유형의 유머를 일삼는 자들의 노력에 웃어주지 않아 피곤해진 적이 여러 번 있었지만 당시 내 무표정에 얼마나 많은 용기가 담겼는지 알기에 과거의 내 선택을 여전히 응원한다.


이전보다는 누군가의 외모, 취향 등을 희화화하는 것이 무례하다는 사회적 인식이 높아지면서 어느 정도 조심하는 분위기가 생겨났지만 여전히 누군가를 이용한 '억지웃음 유발 쟁이'들의 생각 없는 말들에 상처받는 사람들이 많다.


강제적으로라도 일시적인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위해 누군가의 희생을 당연시 여기는 분위기가 더 많이 사그라들길 바라보며 진정성 없는 '웃음'을 위해 누군가의 인격을 조롱하는 자들에게 경고를 줄 수 있는 '억지웃음 유발 금지법' 이 생겼으면 좋겠다는 터무니없지만 어찌 보면 아주 터무니없지만은 않은 생각을 해본다. 타인의 희생으로 유발된 웃음의 끝은 결국 쓸 뿐이니까.





[이미지 출처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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