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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oilet Jul 01. 2019

우리 결혼할 것도 아니었잖아

중환자실에서의 이별

8년 전 강남 한 광고대행사에서 근무할 때의 일이다. 이직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데다 사무실이 워낙 조용한 탓에 개인 전화는 언제나 복도나 비상구로 나가서 받았다. 그날 뜻밖의 전화가 왔다. 그였다. 우리가 암묵적으로 헤어진 지 6개월 정도 흘러서였다. 그는 부산, 나는 서울에서 살다 보니 몸도 마음도 멀어졌고, 아니다. 그냥 2년 정도 만나다 사랑하지 않게 되었다고 말해야겠다. 그에게 대뜸 벌건 낮에 전화가 온 것이다. 나는 서둘러 비상구로 나가 전화를 받았다. 그는 울고 있었다. 간신히 터지는 울음을 가득 머금고 우물거렸다. 어디야? 회사지? 나는 응 맞아 무슨 일이야 물었다. 엄마가 아파. 어디가 얼마나? 지금 중환자실에 있는데 곧 죽는대. 근데 엄마가 자꾸 널 찾아. 우리 결혼할 것도 아닌데 왜 널 찾지. 하며 그는 끝내 터트리고 말았다. 정말 꺽꺽 우는 그에게 내가 갈까? 물었다. 그래 줄 수 있어? 응 내일 내려갈게라 말하며 전화를 끊었고, 나 역시 목울대가 뜨거워 눈가가 벌게져 있었다. 나는 그와 만날 때 그의 집에 며칠 머물 때면 그의 엄마가 해주는 밥, 용돈, 정돈된 이부자리, 오후의 믹스 커피 한 잔 이렇게 신세를 많이 졌었다. 한쪽 다리를 저시면서도 시장에서 일하시느라 바쁘셨지만 나를 정말 살뜰히 챙기셨다. 어쩌면 날 정말 며느리로 생각하셨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한편으로 정말 계산 없이 잘해주시는 걸 보고 우리 엄마도 이랬으면 하는 생각이 들기까지 했다. 본인의 엄마는 자식을 평가와 계산으로 판단해 상대방의 기분을 망치는 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건 ‘내’ 엄마이기 때문이라는 점을 잊고 말한 것은 아니다.


아무튼 나는 다음 날 부산으로 내려갔고 대형 병원 앞에서 그를 다시 만났다. 그는 여전히 다정했고 반가운 기색이 역력했다. 다시 손을 잡았고 날 따뜻이 안았다. 어머니는? 좀 이따 시간 맞춰 우리 가족 다 중환자실로 들어가게 될 거야. 그때 같이 들어가면 돼. 나는 병원으로 들어갔고 오랜만에 보는 그의 누나, 남편, 아기와 인사를 나눴다. 우리가 암묵적 이별 상태라는 것을 모르는 눈치였다. 잠시 기다린 후 여러 명의 다른 환자의 손님들과 함께 차례로 손을 씻고 거대한 실험실 같은 중환자실로 들어갔다. 3m 간격으로 환자들이 오픈된 장소에 실험군처럼 누워있었고, 나는 그를 따라 엄마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중환자실의 기계음과 뒤섞인 사람들의 목소리가 귓가에 웅웅거렸다. 그의 엄마는 고통을 견뎌내는 실험 대상 같았다. 인간의 몸에 이토록 많은 튜브를 연결할 수 있다는 것을 그때 알기도 했다. 그는 엄마 왔어 경희. 엄마가 찾아서 서울에서 내려왔어. 엄마는 고통에 몸부림을 쳤고 눈을 떴지만 뿌연 유리가 껴 있는 듯 앞이 보일 것 같지가 않았다. 입에 깊숙이 꼽아둔 튜브 때문에 말을 할 수가 없었지만 어으어어어 같은 소리를 내며 우리에게 고통을 말했다. 묶여있는 손을 허공에 흔드는 엄마를 보고 나는 어머니라고 부르며 엄마의 손을 잡았다. 저 왔어요. 엄마. 나는 솟아오르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결국 너무 크게 울기 시작했고 간호사가 즉시 퇴실 조치했다. 중환자실에서 우는 것은 다른 환자들에게 영향을 주기 때문에 금지되어 있다고 한다. 그와 함께 나온 나는 잠시 동안 그와 함께 울었다. 엄마 어떡하니 그 외에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너희 엄마 어떡하니. 나 왔다고 말해줘야 되는데. 어떡하니. 그는 엄마 백만 원 써본 적도 없는데 결국 아파서 하루에 백만 원인 데서 누워있네.라고 말했다. 그의 표정은 울음과 허망함으로 일그러졌다.


잠시 후 그의 가족들이 모두 나왔다. 그들은 나에게 와줘서 정말 고맙다고 말했고 둘이 어디 가서 밥이라도 먹으라 말했다. 나는 사실 지금 그와 밥을 먹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난 그때 써야 할 원고가 있었고 급히 피시방으로 가서 작성해야 했다. 그 병원 앞 횡단보도를 건너니 피시방이 있었고 나는 가야겠다 말했다. 그와 나는 포옹했다. 우리는 이 포옹이 친구로서의 포옹이라는 것을 말하지 않아도 알았다. 원래 우린 연인이 되기 전부터 둘도 없는 친구였으니깐. 잘 지내고. 엄마 소식 알려줘. 하고 난 뒷걸음으로 상가 쪽으로 들어갔다. 얼굴을 보여줄 수가 없었다. 하루 종일 운 탓에 더는 울면 정말 못생긴 얼굴로 기억될 것 같았다. 그의 작은 얼굴에서 짙은 눈썹이 비틀거렸다. 울음을 참으려는 듯 그의 목의 힘줄이 서고, 잘생겼던 눈은 인상을 쓰며 흔들렸다. 그는 다시 횡단보도 쪽으로 뒷걸음쳤다. 우린 서로 뒷걸음치며 공식적인 이별을 맞이했다. 그렇게 끝이었다. 난 줄줄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게임 소리로 시끄러운 피시방에 앉아 원고를 썼다.  


그 후 몇 달 후 기적적으로 엄마는 일반 병실로 옮겨졌다고 했다. 그리고 지금은 집에서 생활하시게 되기까지 상태가 호전됐다. 몇 년 전 엄마로부터 카톡이 왔다. 김경자라는 이름이라 나는 누군지 알지 못했다. 내용을 보니 그의 엄마였다. 잘 지내고 있니 경희야. 엄마는 많아 나아서 집에 와서 잘 지내고 있단다. 그때 와줬다고 했는데 엄마가 못 봤네. 미안하구나. 나중에 꼭 집에 한번 오면 맛있는 거 해줄게.^^

난 이 카톡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읽었다.

따뜻하고 참 슬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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