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님(다음 제복)은 어디에
이 글은 지난해 7월 말에 쓴 글이다. 당시 나는 ‘오송 참사’ 1주기에 기해 탐사 기획 보도를 준비하고 있었다. 오송 참사는 2023년 7월 15일에 발생했다. 그리고 바로 며칠 전, 오송 참사 국정조사 계획서가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이미 참사 2주기가 지난 뒤였다.
눈이 마주쳤다. 씨익, 오른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크흑, 웃음이 났다. 마찬가지 얼굴의 상대방을 보며 키득키득하기 시작했다. 늘낙지 같이 느릿느릿한 목소리로 내가 말했다.
“선배애애애.”
“우비, 사샤 씨 거예요? 크흑.”
“네 것도 갖고 왔는데. 차에 있어.” 우리와 똑같은 표정으로, 마찬가지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던 또 다른 선배의 말에 “이거 제 돈 주고 산 거예요. 갠소템(개인 소장 아이템)”이라고 신나서 답했다.
개나리 색깔만큼 진한 노란색 우의에는 조화롭게도 검은색이 섞여 있다. 비가 올 때 입는 옷답게 윗옷에 달린 모자가 검은색이다. 모자에서부터 가슴 위쪽까지, 어깨에서부터 팔꿈치까지 검은색이다. 하의 역시 새까맣다. 하의까지 똑같이 입고 있었다면 순식간에 ‘빵’ 웃음이 터졌겠지만, 다행히(?) 비는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같은 업체에서 나온 동일 제품, 크기만 다른 우의 윗옷을 입고 나타난 선배와 나는 저 멀리서 상당히 노란색을 띤 서로를 발견하고는 키득키득 웃어버린 것이었다. 다만 다른 점도 있었다. 가슴팍과 등판에 적힌 지금 회사 이름. 선배 우의와 달리 내 우의는 회사가 사준 게 아니라서 아무런 표시도 돼 있지 않다.
새벽부터 무거운 몸을 기차에 싣고 서울역에서 오송역으로 온 날이었다. 오송역에서 다시 택시를 타고 청주지방법원으로 향했다. 두 선배는 전날 청주에서 취재 일정을 소화하고 이곳에서 하룻밤을 잔 뒤였다. 오전 10시 30분 재판에 출석하는 피고인들을 기다리며 법원 출입구 앞에 카메라와 장비들과 함께 서 있던 참이었다.
지난해 이맘때 장마 기간 벌어진 오송 참사 당시 담당 경찰들의 재판이 잡혀 있었다. 지하차도 안으로 강물이 넘쳐 들어와 그 안에 있던 14명이 숨졌다. 그 직전까지 현장 조치를 하지 않은 책임과 사실 관계를 따지는 두 번째 공판 기일이었다. 검찰 공소장 내용을 바탕으로 ‘그날’의 경찰들을 취재해 참사 1주기에 맞춰 보도할 계획이었다. 법원에 있다가 참사 현장에도 가봐야 했다. 이날 취재 일정을 고려하면 우산만으로는 부족했다. 하여튼 우의는 필수였다.
빗줄기는 약해졌다 굵어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사람이 걸어오는 건지, 우산이 걸어오는 건지 모르겠을 정도로 커다란 장우산이 우리들 앞으로 다가왔다. 우산이 접히자 말쑥한 양복 차림의 중년 남성이 보였다. 선배들과 내가 기다리고 있던 그 경찰이었다. 참사 당시 최고 결정권자였던 충북경찰청장. 법원 출입구를 지나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그 경찰’과 그의 변호인 얼굴이 선배들 카메라에 담겼다. 아마 법원 지상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부터 ‘그 경찰들’은 단번에 내 노란 우의가 눈에 들어왔을 테지. (위에 우의 사진을 보면 고개가 절로 끄덕여질 것이다.) 기자가 왔구나, 생각했을 거다. 그러나 나는 그들을 거의 알아보지 못했다.
언론 보도를 통해 얼굴이 공개된 고위직 경찰들조차도 일부는 눈앞에서 지나쳐버렸다. (나중에 이날 촬영본을 확인하며 알게 된 사실이다.) 경찰 제복이 아닌 셔츠와 재킷, 정장 바지 따위를 입은 경찰들. 심지어 경찰서라는 공간을 벗어나 경찰 일도 하지 않는 일시의 상태가 되니, 그들이 경찰인 줄 도무지 알아볼 수 없었다. 사복 차림의 형사들을 일주일에도 몇 번씩, 2년 넘게 봐온 내가 바로 그랬다.
노랑과 검정이 절묘하게 섞인 이 우의가 내겐 이 ‘경찰 제복’이었다. 강원도 기자, 그중에도 가장 연차가 낮은 막내 기자의 숙명은 물과 불이 일으킨 온갖 재난 재해 현장에 제일 먼저 출동하는 것이었다. 아, 재난 재해가 발생하기 전부터 나갔다. 카메라 앞에서 회사 로고가 쓰인 마이크를 들고 현재 상황을 생중계했다.
“네, 저는 지금 강원도 OO 시 XX 천 앞에 나와 있습니다. 빗줄기는 점차 굵어져…”
“지금까지 내린 비의 양은 OO 시 YY 면에 몇 밀리미터…”
“기상청은 모레까지 강원도 전역에 호우 특보가 내려져 있는 만큼 각별히 주의…”
난 그저 카메라 렌즈 중앙을 바라볼 뿐, 목소리로만 들리는 앵커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고 이런 중계 원고를 줄줄 읽었더랬다. 이런 원고는 그 내용과 취지만 보더라도 나는 거진 적은 양이라도 비를 맞아야 했다.
그 시절 나는 우의 윗옷 하나에 그치지 않았다. 검은색 우의 하의를 입고, 무릎까지 올라오는 장화를 신고 헬멧까지 썼다. 그리고 침수 현장에 찾아가 물살을 가르며 수재민들을 인터뷰했다. 물난리가 난 주민들 터전에 공공 화장실이 있을 리 만무했을 터. 특히나 화장실을 자주 가는 나는 근처 아무 주택 현관문을 두들겨 화장실을 빌려 쓰곤 했다. 난생처음 디뎌보는 남의 집 거실 바닥에 모르긴 몰라도 우의에서 흘러내린 빗물과 흙탕물이 꽤 떨어졌을 것이다.
지금 회사에 이직하기 직전 해였던 것 같다. 당시 회사에서 준 우의가 방수 기능이 약해 더는 못 쓸 지경에 이르렀다. 촬영기자 선배들이 부서 비용으로 새 우의를 산다고 하기에 “나도 껴달라”라고 해서 샀던 게 지금껏 집 신발장 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직한 회사는 서울에 있는 데다 하루 단위로 뉴스를 하는 곳(이른바 ‘데일리 매체’)도 아니다. 여름마다 비가 내리는 현장을 일부러 찾아갈 일은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그렇게 내 제복은 3년 만에 강원도가 아닌 충북 청주에서 햇빛을 보게 됐다.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편안했다. 이날 현장에 갔다 와 식당에서 밥을 먹는데도 빗물에 젖은 우의를 벗고 싶지 않았다. 드디어 내 옷을 찾아 입은 듯 든든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감마저 생겼다. 힘든 기억만 있는 줄 알았는데 돌이켜 생각해 보니 ‘우의와 함께했던 그때가 나쁘지 않았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스스로가 안쓰러우면서도 대견하고, 멋있었다는 생각까지도.
하지만 경찰들과 달리 내 노란색 제복은 더는 내 제복이 아니다. 재난 재해 현장을 주로 다녔던 2년여의 세월은 지나갔다. 내가 가야만 하는 현장은 더 많아졌고 다양해졌다. 옷차림을 비롯한 기자로서 내 모습도 카멜레온처럼 변하고 있다. 아쉬운 점은 이 중에 아직 ‘내 옷’으로 느껴진 적은 없었다는 것.
내게 잘 어울리는 또 다른 제복, 또 다른 현장, 취재원이 있을지 여전히 잘 모르겠다. 우의 같이 그야말로 내게 ‘착붙’인 옷차림이 머지않은 미래에 생기길 바라며, 방 한쪽에 말려서 걸어 놓은 우의를 고이 개서 신발장 구석에 다시 넣어 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