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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일 Aug 02. 2021

편리한 미움, 불편한 사랑

편리한 미움보다 불편한 사랑을 나는 택하기로 했다

“혹시 페미니스트세요?”

“아..네.”

“그럼 혹시 남자 싫어하고 막 그래요?”

“네?”


순간 귀를 의심했다. 페미니즘은 남자에 관한 의제가 아니라 여성에 관한 의제인데, 어떠한 연유로 이 연결고리에 남자가 불쑥 끼어들었을까. 대체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되물었지만, 나는 그 사이에 알알이 박혀있는 빈정거림을 더 먼저 읽었다. 사실 그 남자가 나에게 그 질문을 왜 했는지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묻고 싶었을 것이다. 그 정신병 같은 남성혐오를 하는 “메갈”이냐고. 어딘가에 가서 “페미니스트”라고 나를 소개하면 순간적으로 나에게 꽂히는 날카로운 시선들은 이제 제법 익숙하다. 짧은 머리에 화장을 하지 않고, 거의 셔츠에 바지차림인 나를 보고 “메갈”인지 아닌지를 검열하려는 시선 또한. 그런 사람들이 들으면 굉장히 놀랄지도 모르겠다. 사실 페미니스트로 스스로를 정체화시키며 내가 가장 먼저 직면해야 했던 것은 “남성혐오”가 아닌 정작 “내 안의 여성혐오”였다는 것을 말이다.


나는 나를 치열하게, 자세하게, 아주 성실하게 미워해왔다. 이유는 다양했다. 살짝 휘어진 내 콧대가 싫었고, 한쪽에만 있어서 사진을 찍을 때면 늘 괴물 같은 얼굴을 만드는 쌍커풀이 싫었고, 얼굴을 두 세배는 더 크게 보이게 하는 광대와 턱이 싫었다. 몸은 또 어떤가. 목이 짧았고, 허벅지는 두꺼웠고, 엉덩이는 또 왜 그렇게 큰 건지. 이 정도면 이제까지 이 얼굴과 몸을 멀쩡히 데리고 살아온 내가 신기하게 느껴질 정도로 나는 끊임없이 나의 외모를 점수판 위에 세워놓고 힐난했다. 얼굴이 보기 싫어서 사진을 찍지 않았고, 살찐 몸을 보여주기 싫어서 사람들을 피해 다녔다. 흉물스러운 나의 몸과 얼굴. 왜 그토록 내가 나의 외모를 죽을만큼 미워했는지 나는 알지 못했다. 늘 티비 속에 등장하는 아름다운 여성들을 흠모했고, 흠모하는 만큼 나는 절대 그렇게 될 수 없다는 사실은 늘 견딜 수 없을만큼 비참해서 현실에서 도망치곤 했다. 나는 왜 이 모양으로 태어났지. 이렇게 엉망진창인 나를 누가 구원해줄까. 밥 먹듯이 스스로를 미워하면서 화가 났다. 그런 내가 싫어서 그게 또 미웠다. 이 구렁텅이를 어떻게 벗어나야 하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아 진짜 여자들이랑은, 일 못하겠어.”

여성이 대부분을 차지했던 직장을 다니면서 밥 먹듯이 내가 했던 말이었다. 여자들 대체 왜 그래? 왜 그렇게 말이 많아? 왜 그렇게 누굴 씹는거야? 정말 수준 떨어져서 같이 못 있겠어. 여성 동료들을 욕하면서도 나는 그들과 다르다는 것을 인정받고 싶었던 걸까. “수준” 운운하며 나와 함께 일하는 여성들을 손쉽게 짓밟았다. 그렇게까지 하면서 내가 얻고 싶은 것은 뭐였을까. 지금 돌이켜보면 어떻게 저렇게 자연스럽게 여성들을 욕할 수 있었는지 새삼스럽지만,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저런 분위기는 굉장히 자연스러웠다. 나는 습관처럼 여성을 미워했다. 여성을 미워하는 데는 소름이 끼치도록 아무런 노력이 필요하지 않았다. 신기하도록 편리한, 미움이었다.


내가 늘 미워했던 것은, 여성이었다. 바람을 핀 아빠보다 그 상대의 여성이 더 미웠고, 엄마를 때리는 아빠보다 아빠에게 아무 말도 못하고 맞기만 했던 엄마가 더 미웠다. 그런 가정에서 태어난 스스로를 누구보다 가장 미워했던 사람은 늘 나였다. 나는 왜 이렇게까지 엄마를, 나를, 그리고 여성들을 미워해야 했을까. 엄마를 미워하는 시선은 늘 다른 여성들에게까지 옮겨졌고, 그 미움의 종착지는 언제나 나였다. 나의 미움이 전염병처럼 다른 여성들에게 옮겨갔고, 다른 여성들을 미워하면서 다시 나를 미워했다. 나도 여성이었으니까. 여성이라는 굴레는 미움의 굴레와도 같았다. 나는 이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답답해서 가슴을 꽉 쥐었다.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이 오래된 미움이 “여성혐오”였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후였다.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았다. 내가 싫어하고 증오했던 감정들이 사실은 그렇게 흘러가도록 입력된 결과였다는 것을. 그렇게 내 안의 여성혐오를 마주하면서 내가 가장 먼저 했던 일은 엄마와 화해하는 일이었다. 나는 죽을 때까지 엄마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고, 이해를 한다는 것은 결국 엄마를 포기한다는 선언이었다. 엄마를 이해하고 싶었지만, 그렇다고 엄마를 포기할 수도 없었다. 엄마가 아빠에게 그렇게 맞으면서도 도망가지 못한 이유를,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알았다. 엄마는 노예였다는 것을. 그리고 나 또한 이 굳건한 가부장제 안의 노예로 살았다는 것을. 딸이었기 때문에 할아버지는 나를 미워했고, 어린 여자아이였기 때문에 사촌에게 성추행을 당했고, 여성이었기 때문에 늘 부엌에서 엄마, 작은 엄마들과 남은 음식을 먹었다. 그러면서도 엄마가 늘 욕했던 것은 그렇게 만든 할아버지가 아니라 명절에 일찍 오지 않은 “동서”였다. 가부장제 안의 여성은 늘 대상화되거나 착취를 당했고, 착취를 당하는 동안의 분노는 나를 입혀주고 먹여주는 “주인”이 아니라 나와 같은 착취를 당하는 옆자리의 다른 여성을 향하곤 했다. 그 여성을 미워하면서 자신 또한 미워하게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수순이었다. 타인을 보는 관점은 늘 스스로를 비추는 시선과 연결되어 있으니까.


“더이상 여성들을 미워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 같아요.”

나는 말했다. 이 말은 의지이기도 하면서, 어떤 결단이기도 하다. 더는 쉽게 나를 미워하지 않을 것이란 결심. 편리하게 다른 여성을 흠집내지 않을 것이라는 다짐. 이 미움은 너무도 편리해서 성찰하지 않으면 금방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버린다. 더는 여성을 미워하고 싶지 않다. 편리한 미움보다 불편한 사랑을, 나는 택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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