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그녀의 이름은 최수진이었다. 최수진. 유명한 무용수와 이름이 같았다. 그래서 그 이름을 미디어에서 마주칠 때마다 나는 거의 항상, 아니 틀림없이 그녀를 떠올렸다. 재능에도 서열이 있다는 것을 나에게 처음으로 알려준 사람. 그녀의 이름은 최수진이었다.
중학교 1학년, 수진이와 나는 같은 반이었고 단짝이었다. 겨울방학과 봄방학의 중간, 녹기 시작한 눈들로 질척이는 운동장과 지저분한 길거리, 한낮의 따뜻한 햇살이 공존하던 2월이었다. 학교에서도 진도를 나가지 않고 다같이 비디오 같은 것을 보던 시기였다. 영어시간이었는데, 선생님이 갑자기 삼행시 대회를 제안했다. 중2병이 오는 길목에 있던 아이들은 질겁했다. 그 때 우리들이 가장 싫어했던 것은 글을 쓰는 것이었고, 공개된 장소에서 자신의 글을 읽는다는 건 거의 부관참시를 당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혼재된 계절처럼 교실은 아이들의 아우성으로 가득 찼지만, 언제나 그렇듯 질문을 받는다고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선생님은 자신의 이름으로 지은 삼행시를 써서 제출하라고 했다. 제한 시간은 이십분. 나는 고민에 빠졌다. 내 이름은 이어갈 수 있는 명사가 거의 없는 한자로 구성되어 있다. 꾸역꾸역 완성해서 삼행시를 제출했다. 나는 사실 그때, 글쓰기로 꽤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바로 옆 동네에 효석백일장이라는 유명한 백일장이 있었는데, 나는 거기서 이미 몇 번 상을 받은 전적이 있었다. 매년 학교에서 발행하는 교지는 나의 단골 가게였다. 그 명성이 이깟 삼행시로 무너지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반전은 수진이 차례에서 일어났다. “다음 차례는 최수진이네. 자, 다들 운 띄워보자!” 모두 다같이 외쳤다. 최!! 최수진이 세상에 태어났다. 수!! 수많은 사람들이 기도했다. 진!!! 진실된 마음으로 살기를. 아이들 모두 놀란 눈치였다. 삼행시를 읽은 선생님도 ‘얘 뭐지?’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중1이 쓴 글이라고 믿기 어려운 완성도였다. 나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쉽게 쓰여진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쉽게 쓸 수 없는 글이었다. 그 짧고도 묵직한 글은 나에게 처음으로 알려주었다. 재능에도 분명한 서열이 있다는 것을. 그 이후로 20년도 더 지났지만 이렇게까지 완벽하게 매료된 글은 없었다. 가까이에 있어서, 너무나 실현이 가능한 거리에 있어서 나를 더 절망시킨 재능이었다. 나는 수진이를 질투했고, 그만큼 그의 글을 사랑했다. 그래서 열등감은 길었고, 또 깊었다.
그 삼행시로 인해서 수진이도 ‘백일장 차출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화려한 데뷔였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수진이는 그 백일장에서 입상을 하지 못했다. 수진이의 삼행시를 들은 이후로 나는 계속 어정쩡한 마음으로 글을 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백일장에서 상을 받았는데, 그게 전혀 기쁘지 않았다. 대회가 끝난 후 그 친구의 글이 궁금해 미치겠는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글에 대해 물었다. 수진이는 아무런 경계심 없이 글을 보여줬는데 그 때마다 나는 지금도 영 소질이 없는 빌어먹을 표정관리를 해야했다. 잘 썼다는 반응도 어째서인지 겸연쩍어서 나는 그냥 얼렁뚱땅 넘겨버렸다. 한편으로는 이렇게 빛나는 재능을 알아보지 못하는 멍청한 사람들이 심사위원이라서 다행이라는 비겁한 생각도 했다. 하지만 그 멍청한 심사위원이 선택한 글은 나의 글이었다.
초라했다. 나의 글은 화려했지만 사실은 텅 비어 있었다. 글을 쓰는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대회의 입상과 상관없이 나는 늘 그에게 졌다. 나만 아는 패배였지만 그랬기 때문에 더 쓰라렸다. 이 정도면 많이 따라잡았다고 생각했는데, 수진이는 늘 두세걸음 앞서 있었다. 그 이후 나는 글을 쓰지 않았다. 그 멍청한 백일장으로 나의 글을 증명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근거 따위는 사실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 이후 우리는 중3이 되었고 나는 고등학교 입시에 매진했다. 명문고에 가고 싶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글쓰기보다는 고등학교가 훨씬 중요했다. 가끔 수진이를 만나면 그는 내게 글을 쓰냐고 물었다. 나는 ‘그것은 이제 쓸데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나 역시 그가 글을 쓰고 있는지 궁금했지만, 물어보지 않았다. 역시 아무런 소용이 없을 거라는 생각이 나의 입을 다물게 했다.
그리고, 어쩐 일인지, 나는 계속, 글을 쓰고 있다. 가장 쓸모없는 일이 이제는 나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 되어버렸다. 가끔 아직도 20년 전의 그 삼행시와 경쟁하고 있다는 이상한 생각을 한다. 지금의 글을 수진이가 읽는다면, 그는 나에게 무슨 말을 할까. 공부가 지금은 더 중요하다고, 이제 글을 쓰지 않는다는 나의 말에 일그러지던 수진이의 표정을 나는 오래 기억했다. 지금도 여전히 나는 궁금하다. 아직도 글을 쓰고 있는지, 쓰고 있다면 어떤 글을 쓰고 있는지. 그의 글을 읽으면 나는 다시 열넷의 내가 되어 그 막연한 패배감을 느낄지도.
모든 인간은 죽을 때까지 살아가야만 한다. 람슈타인의 <달라이라마>의 한 구절처럼 우리는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야만’ 한다. 매순간 살아가기를 선택한 것처럼, 나는 계속 쓰는 삶을 선택했다. 가끔은 쓰는 일이 결국에는 사는 일이라는 생각을 한다. 사는 만큼 충실히 쓰고 싶다. 아무런 성취가 없는 일에 이렇게까지 매진할 수 있다는 게 가끔, 진정으로 놀랍다. 이제 글을 쓰는 일은 성취와 상관없이 나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 되었다. 성취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닌 것처럼 그냥 내가 쓸 수 있는 것을 쓰고 싶다. 수진이가 다시 나에게 글을 쓰냐고 물어온다면 나는 이제 대답할 수 있겠지. 쓸모없어서 가장 소중한 일을 나는 그냥, 계속 하고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