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달콤, 새콤한 과일향
드디어 추억이 된 과일 리어카
"이 이잉"
일어나자마자 둘째의 눈치를 보며 후다닥 부엌으로 들어가 아침에 먹일 과일을 고르고 작게 자른다.
달콤한 과일이 한가득 담긴 접시를 눈으로 확인할 때까지 우리 먹보 둘째의 찡찡거림은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아이의 사랑스러운 함박웃음과 함께 나의 하루는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말레이시아에 온 후 만족스러운 점 중 하나가 새콤, 달콤 맛있는 과일이 종류도 다양하고 저렴하다는 거다.
덕분에 과일 좋아하는 우리 둘째를 위해 냉장고는 늘 과일로 가득 차있다.
가득 찬 과일을 보면 나는 무의식적으로 항상 아빠를 생각한다.
나의 아빠는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바로 며칠 전까지 시장에서 과일을 팔았다.
조그만 리어카 두 개가 사과, 배, 포도 등등 달콤한 과일로 가득 차서 여름이면 벌이 윙윙 날아다니고
겨울에는 과일이 얼까 봐 담요로 덮어놨었다.
그리고 이상하리만치 내 기억 속 리어카 앞에 있는 아빠는 젊고 튼튼하다.
그래서 그런가 나이가 들고 다리가 휘어져 걷기 힘든 아빠를 볼 때마다 깜짝 놀라곤 한다.
특히 사과는 아빠 생각이 많이 나게 하는 과일이다.
엄마는 항상 아빠가 과일을 너무 좋은 걸 사 와서 남는 게 없다고 했다.
아빠는 그만큼 좋은 과일을 파는 걸 가장 중요시했었다. 그중 사과를 가장 신경 썼던 거 같다.
사과를 볼 때면 "청와대 영빈관에도 들어가는 사과요~!" 하며 소리치던 아빠의 목소리가 자동으로 들린다.
어릴 땐 정말 영빈관에 납품하는 사과를 사 와서 파는 건 줄 알았다.
커가면서 장사를 위한 농담이란 걸 알았지만 아빠의 말에는 자신감이 넘쳐서 진짜 영빈관에 납품하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도록 믿게 하는 힘이 있었다.
"따르릉" 비켜주세요~
매일 똑같은 일상이지만 볼 때마다 새로웠던 건 아빠의 배달 가는 모습이었다.
아빠는 운전을 못해서 자전거로 배달을 했는데 자전거 뒤쪽에 높이높이 쌓여있는 과일상자들은 볼 때마다 신기했고 배달 가는 뒷모습을 보는 건 볼 때마다 걱정스러웠다.
얼마나 높이 쌓여있었나면 뒤에서 보면 아빠의 모습이 안 보일 정도의 높이였다.
아빠만 특별한 건 아니고 시장에서 장사하는 아저씨들 모두 그렇게 다녔다.
점점 오토바이로 바뀌는 동안 계속 자전거를 타는 건 아빠 혼자였지만 말이다.
그 자전거 뒤에 내가 타본 건 딱 한 번이었다.
그것도 다 커서 아픈 배를 부여잡고 응급실에 실려갈 때였다.
뭘 잘못 먹었던가 생각은 안 나지만 장염이었다. 아픈 배를 부여잡고 엄마와 병원을 가다가 너무 아픈 나머지 바닥에 주저앉아버렸다. 엄마는 다급하게 아빠에게 전화를 했고 아빠는 자전거를 타고 달려왔다.
그때 아빠의 표정, 그날 자전거 뒤에서 느꼈던 시원한 바람 그리고 "아빠가 참 자전거를 잘 탄다" 했던 나의 생각까지 다 기억이 난다.
저녁 8시
장사를 마무리하러 엄마가 시장에 내려가는 시간이었다.
오후 8시부터 아빠와 엄마는 그날 팔지 못한 과일을 다시 상자에 담아 핸드카에 실어서 집으로 가져왔다.
과일창고가 내 방 바로 옆이어서 부모님이 많이 왔다 갔다 하는 날은 집에서 편히 공부하는 게 죄송해서 몸 둘 바를 모를 정도였다.
그리고 과일창고에 상자들을 넣을 때면 아빠는 항상 개똥벌레라는 노래를 불렀다.
"나는 개똥벌레 친구가 없네~"라고 부르던 아빠의 노래가 어린 마음에는 그냥 좀 이상해 보였다.
근데 이제는 내가 이 노래를 종종 부른다. 아이들에게도 불러주고 혼자서도 가끔씩 부른다.
노래를 부르다 보면 마음도 편해지고 힘든 것도 사그라든다.
그래서 매일 아빠가 그렇게 노래를 불렀나 보다.
밤 10시가 다 되어서 집으로 들어오면 엄마와 아빠는 전대에 들어있는 돈부터 계산했다.
매일매일 정산하는 걸 긴장하면서 쳐다보고 있었던 거 같다.
그리고 이건 우리 가족의 가장 경건한 시간이었다.
정말 모든 게 다 끝나면 우리 가족은 안방에 모두 모여서 텔레비전을 봤다.
아빠의 이부자리는 달콤한 과일향이 났고 나는 그 자리에 누워서 TV 프로그램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편안하고 따뜻한 분위기에서 즐겁게 텔레비전을 보던 기억이 너무나 행복했기 때문에
결혼하기 전까진 가족'하면 이 모습부터 떠올렸다.
아빠의 과일가게는 집 근처였고 나는 매일매일 장사하는 아빠의 모습을 보며 자랐다.
아빠는 참으로 성실했다. 일 년에 명절 두 번 빼고 한 번도 쉰 적이 없었다. 나의 대학교 졸업식 날이 처음으로 명절 말고 가게 문을 닫은 날이었을 정도다.
아빠는 나와 동생이 자라는 동안 아프다는 말도 돈이 없다는 말도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그게 당연한 거라고 생각했지만 아이를 낳고 기르면서 그게 얼마나 대단한 일이었는지 알았다.
그리고 어쩌면 당연하게도 무릎이 다 닳아서 똑바로 걸을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장사를 그만해야 한다는 우리의 말을 한사코 물리치더니 이제 정말로 걷기가 힘들어지고서야
가게를 접고 수술을 받았다.
나의 아이들과 행복한 생활을 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는 아빠의 한 껏 휘어진 다리가 돌처럼 차지하고 있었는데 수술받고 활짝 핀 얼굴을 보니 정말로 행복하다.
그동안 고생했어요 아빠
새로운 인생을 축하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