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은 절박함이 담긴,
인사말이 있다.
"다녀오세요."
'돌아옴'을 살짝 과장하면 살아서 돌아오라는 말이 된다. 대부분의 슬픔이 '다녀오지 못함'에서 비롯한다. 떠나간 연인, 출근한 아버지, 장을 보러 간 어머니, 친구에게 다니러 간 아내, 공부하러 간 자식, 출장을 떠난 남편...... 누구든 꼭 다녀 '와야 한다'. 하기는 언제 죽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인간 존재로서는 숙명적 인사말이기도 하다. '다녀오'거나 '다녀오지 못'하거나. 오히려 죽음 앞에서는 '돌아간다'라고 표현하는 그 숙명 말이다. 그래서 인생은 속절없는 다녀옴의 연속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 하더라도 누군가에게 자식이 되는 아이들이 다녀오지 못하게 되는 것은, 세상 그 어디에도 비할 수 없는 슬픔이 된다.
지난주 출근길, 라디오에 중국 우한에서 유학 중인 젊은이가 전화상으로 출연했다. 그 젊은이는 우한으로부터 한국으로 교민을 수송하는 등의 일을 현지의 한국 영사관과 더불어 책임지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한국으로 두 번의 수송을 마치고도 그는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남아서 할 일이 있다고 했다. 젊은이의 책임감이 대단했다.
이번 주의 출근길 지하철은 4호선 2호선 모두 평소보다 승객이 적었다. 평소 사당역에서 2호선으로 갈아타려면 줄을 길게 서서 두 번의 2호선을 보내고야 세 번째 정도에 탈 수 있었다. 이번 주는 기다리지 않고 갈아탔고 직장이 있는 삼성동 역시 평소 오전부터 북적이던 관광객이 확연하게 줄어들었다.
오늘자(2월 8일)로 중국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사망자가 700명을 넘어섰다고 한다. 문재인 정부의 위기관리 대응은, 평범한 시민의 입장에서 보면 위대하다고까지 보인다. 하지만 불안감이 가시지 않는다. 중국에서는 아직은 더 악화되는 것으로 보이는 데다 최근 연이어 발생하는 '이상한' 사건들-오스트레일리아의 불이 쉽게 꺼지지 않고 남극의 얼음은 자꾸만 녹아내리고 거대한 먼지가 도시 농촌 가리지 않고 뒤덮이며 일본은 방사능 오염수를 바다로 흘려보내려고 한다-이 마음에 걸려 있다. 불안감이라기보다 이런 상황이 낯선 건지도 모르겠다. 세계는 한때 전쟁에 휩싸였고 이제는 오염에 휩싸였다. 전쟁에 직접적이지 않은 내 세대의 기억 속에는 이런 전 세계적 오염이 낯설고 무섭다.
앞이 보이지 않는 지독한 먼지가 출근길을 덮어버린 날, 이전 직장에서 동료였던 혜현 씨가 내게 메시지를 전했다.
"무서워하지 말고 우리 차근차근 하나씩 실천해보아요."
큰 종이컵 사용을 그만두고 작은 종이컵만 사용하다가 다시 스탠리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 아, 그러고 보니 저 많은 버려진 일회용 마스크는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든다. 노후 경유차 폐기 지원 라디오 캠페인이 따뜻하게 들린다. 디지털 물건들을 멀리하기 시작했다. 파타고니아의 '닳은 옷 정신'을 높이 사 그 어떤 옷도 물건도 오랫동안 사용하기로 마음먹었다. 아이들에게 더 따뜻하게 말할 수는 없을까 고민하고, 한 번이라도 더 웃어주려고 노력하기 시작했다.
"꼭 건강하게 다녀오십시오."
조금 전 보았던 TV 뉴스의 클로징 멘트는 그래서 감동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