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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un Hyun Sep 15. 2020

고래는 바다에서 잘 산다

알다시피, 혹은 모르다시피 세상 대부분의 언어는 정치적이다. 

던져지는 말들은 저마다 생명력을 부여받는다. 입 밖으로 튀어나와 공기와 닿는 순간 말은 색깔을 가지고 산화된다. 정치색이다. 물론 아주 어린아이들이야 진공인 채로 말들을 뱉어낸다. 

옛날에 보면, '조선일보'의 칼럼 중 몇 가지는 쭈그려 앉아 읽을만했다. 글을 많이 써 본 사람이 맑은 정신으로 공들여 쓴 티가 역력했다. 좋은 글 그 자체가 아니라 '좋은 글을 쓰기 위한 노력'이 자연스럽게 정치색을 옅게 물들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 글들은 사라지고 전략적인 워딩과 레토릭이 선혈처럼 또렷이 드러나는 비린 토사물들만 인쇄되었다.  

내가 막 대리로 승진했을 때쯤이었을까, 그 신문사의 나이 지긋한 편집국 기자가 헤드라인 카피를 배우기 위해 우리 팀으로 파견되어 왔다. 광고는 기본적으로 팩트로 진술하지 않는다. (물론 거짓을 진술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진정성이 도구적으로 필요한 아주 가끔이면 모르겠다. 그럼에도 기자는 우리와 함께 카피를 써보고는 했다. 

'한겨레'의 언어도 마찬가지 그저 정치적이었거나 민망하게 정치적이었다. '한겨레신문' 시절부터 지금까지 좋은 글을 쓴다라는 인상을 주지 못했다. 워딩을 체화해내지 못하는 언어 정도로 기억된다. 한자어를 대치한 한글 사용은 언론의 존재 이유를 슬쩍 짓눌렀다고 나는 생각한다. 형식이 메시지가 되는 것은 좋지만... 신문은 역시 '메시지' 아닌가? 한겨레는 내개 종종 좋은 글이란 무엇일까 하는 의문을 던졌다. '오마이뉴스'의 장황함 속에 있는 설익음과는 다른 '덜 익음'을 보여줬달까. 

그러던 끝에 조선일보와 구분되지 않는 헤드라인들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물론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독일의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 자이퉁(FAZ)'은 대놓고 기독민주당의 기관지 역할을 한다. 그렇게 정치적이다. 정치적 역할을 정당하게 하려고 노력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우리 주변의 신문들은 간단한 맞춤법조차 모르기 때문에 단순한 이익집단에 머문다. 

신문의 맞춤법이란 '입장의 일정한 견지'이다. 일정함은 긴 시간 속에도 있으면서 한날한시의 헤드라인 한 줄 속에도 있어야만 한다. 흔히 '선전지'로 비유되는 우리나라의 신문들은 그저 날정치를 할 뿐이다. 뱉아서 던져서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입속으로 들어갈 때부터 그저 '정치'였다. 


"고래는 바다에서 잘 산다." 

'비유의 정치학'이란 표현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대통령은, 자신의 생각을 명확하게 피력한다는 점에서 좋은 카피라이터이다. '명확하게' 이야기한다는 점은, 첫째 워딩의 정확함, 둘째 비유의 적절함, 셋째 억양의 유려함이다. 그러니 명확함이 곧 전달력이 되고, 결국 감동이 된다. 흔히 감동은 행동을 유발하기 쉽다고들 하고... 

'비유의 적절함'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비유는 자신의 말이 아니다. 비유는, 엄밀하게 따지자면 누군가의 언어를 가져오는 행위다. 흔하게 '비유적'이라고 하지만 실제론 '언어의 중첩'에 가깝다. '당신은 천사요'라고 말한다면 그건 외국어 더빙과도 같은 언어가 된다. (후략) 

대통령은 가끔 비유적으로 말한다. 하지만 대통령의 비유는, 비유로 느껴지지 않는다. 자신의 언어로 자신의 입을 통해 말을 내어 놓는다고 느낀다. 이런 마법을 보여주는 것은, 그 비유가 '청자의 비유'에 가깝기 때문이다. 비유한 것이 아니라 청자의 언어를 가져와 이야기하는 것이다. 

후보 시절, 그의 카피를 보자. 

"고래는 바다에서 잘 살고 작은 물고기는 시냇물에서 노는 공존과 평화의 새로운 경제 생태계를 만드는 것, 

이것이 경제민주화입니다."

비유가 정당하다. 

과거 정치인 중 신문기자 출신 이 씨, 방송기자 출신 정 씨 등 비유를 통한 워딩으로 '나 어때?' 하던 정치인들이 있었고, 근래에도 사법시험 출신의 몇몇이 비유들을 해댄다. 그들을 정리해보면 '자극적인 워딩의 계보'쯤 되지 않을까.

참여정부 시절에는 대통령의 친구인 다른 대통령의 자기 언어를 들을 수 있어서 행복했다. 그분의 연설은 지금 대통령의 언어와는 또 다른 당신만의 언어가 있었다. 구어적인 것을 기반으로 정리된 연설문 때문이 아니라 비유 가운데서도 가장 사실 적시적인 직유의 화법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편집국의 헤드라인은 문장의 조합과 비겁한 비유를 통해 역류한다. 그리고 토해진다. 그런 언어 아닌 언어들과 자기 언어를 구사하는 몇 분 정치인의 언어들은 다른 세상의 언어와도 같다. 


대화할 수 없는 언어들은 합의할 수 없는 생각들이다. 

그럼에도,  

언어를 통해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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